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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안보ㆍ경제ㆍ윤리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3)셋째, 윤리가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안보 경제 윤리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

인간 문명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는 언제나 윤리적인 타락이 망하고 쇠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역사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강한 제국들이 망하거나 쇠하는 요인 중에 윤리의 타락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학자들도 인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모든 것이 지난 다음에 흥망성쇠의 요인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역사를 거울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니, 역사는 인간의 수준을 나름 정직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한 나라의 안보와 경제와 윤리를 나란히 놓고 생각할 때, 윤리 보다는 경제가, 경제보다는 안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대 가난에서 윤리는 사치처럼 여겨질 수 있고, 경제적 부요는 안보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치질서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원리에서 보면 그것은 가치질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볼 때 개인이나 국가가 경제와 안보를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경제나 안보를 위해 개인이나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은 막중합니다. 안보와 경제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대한 개인이나 국가의 책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성경은 경제와 안보가 윤리적 태도에 의해 좌우된다고 가르칩니다. 윤리라는 용어를 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윤리에 대해 이런 저런 설명이 가능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윤리는 곧 사랑입니다. 윤리란 쉽게 말해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가치이고 최고의 목적이며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사상과 이념과 철학이라고 해도 사랑에 기여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에 실패하는 개인이나 국가의 경제도 안보도 궁극적으로 보장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역임,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셋째, 윤리가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채영미 시인이 고은을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인간의 기본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하할 때 개나 돼지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채영미 시인은 고은을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괴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괴물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신도 아닙니다. 괴상하게 생긴 외모에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괴악하고 포악한 행동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괴물입니다. 괴물은 아무런 동기나 목적도 없이 질서를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 존재입니다. 괴물은 그 존재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모든 생명체에게 물리적 또는 정신적 해를 끼칩니다. 괴물에게는 일체의 동정심이나 자비나 측은지심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괴물에게는 동정심이나 자비나 측은지심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괴물을 만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여 버리는 것이 자신은 물론 사회와 인류를 위해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고 그 괴물이 어떤 생명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모든 합법적 방법을 찾아서 제제를 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괴물의 행동을 두둔하거나 방관하는 자도 어느 순간에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괴물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괴물이기를 포기한다면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이 조심하여 자기를 철저히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금수보다 못한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사님들에게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거듭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개에게 비유하자, 강의를 듣던 어느 목사님이 화를 내며 사람을 개에게 비유한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사 목사님이 ‘예,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사과를 하기는 하는데 개에게 사과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개가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얼마나 모독 감을 느꼈을까를 생각하니 개에게 미안하여 사과를 안 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은, 이윤택, 안희정, 조민기... 수많은 목사, 신부, 승려, 교수, 의사, 법조인, 고위 공직자 , 기업인, 군인 등... 한 분야의 갑의 자리에 있던 이들의 주위에는 어떤 이들이 있었을까요?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도 안 될 거라는 것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그 괴물들이 있기까지, 괴물이 괴물 되게 만들어 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의 대가를 지불하고 소위 출세한 이들은 억울한 이들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관행이었고 출세와 성공의 지름길이었으며, 힘 있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성추행이나 폭행이 죄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드러내 놓고 죄가 아니라고 주장 하지는 않지만 그 특권(?)을 내심 또는 공공연하게 부러워하며, 서로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싸워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속물들이고 괴물들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즈가 ‘권력은 미약이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미약(媚藥)이란 성욕을 일으키는 흥분제입니다. 인간이 권력을 갖게 되면 마치 미약을 복용한 것처럼 성을 탐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적 본능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섬뜩하게 잘 지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탐내는 것은 권력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그 권력으로 쾌락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가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종교의 씨를 심어 놓으셨고 천지만상에는 당신 자신을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안 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허망하고 미련한 마음으로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방법이 바로 우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상은 인간 쾌락을 위한 종교적 방법입니다. 하나님 대신 쾌락을 섬기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는 것을 신학적으로 유기(遺棄)라고 합니다. 그 유기의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 동성애입니다. 동성애는 왜곡된 성의 한 형태입니다. 근친상간 수간 등 온갖 종류의 성 왜곡은 쾌락을 좇는 현상들이고 쾌락을 좇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반드시 성을 왜곡하는 방법을 이용하게 됩니다.

정통 기독교 안에도 성의 왜곡과 범죄는 무수히 많습니다. 교회와 수도원 안에서 성직자들에 의해 저질러 진 성 범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의 왜곡과 추행과 폭력은 교회 안이라고 절대 안전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저질러지는 성 범죄는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경우보다 더 효과적으로 감추어지고 덮여집니다. 이곳 미국 보스톤 지역 신부들이 저지른 성 추행과 폭행은 오랫동안 교회에 의해 가려지고 묵인되고 덮여져 오다가 법정 소송에 의해 드러나게 되고 교회가 엄청난 피해보상비 지불로 파산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던 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 안에도 드러나지 않은 미투 건수는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국 교회 목사들이 저지른 성 범죄들을 모아 놓은 인터넷 싸이트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신전의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한 범죄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독을 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재로는 무신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만 모이는 교회가 이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의 윤리적 타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유명인사들의 성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충격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해자들의 태도가 진심으로 자기 행위를 뉘우치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을 당장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또 다른 경우는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해자가 자기의 행위를 부인한다면 그 또한 죄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권력을 주어 죄를 벌하고 제재하도록 하셨지만, 간통죄도 폐지되고, 동성애도 정당화 되는 현실에서 성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점점 너그러워져(?) 가고 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 간통은 형법 제241조에 따라 형사 처벌되었는데, 사적인 영역의 일에 형법이 개입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의견이 형법 제정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오다가 지난 2015년 2월 26일에 ‘형법 241조(간통)는 헌법에 위반된다.’판결로 간통죄의 효력이 상실되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의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금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국가가 금하지 않는 것은 윤리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윤리적 가치도 다수에 의해 결정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무신론자들도 윤리적 선악의 기준을 위해서 가정으로서의 신을 상정하였었는데 지금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를 하면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유티프론에게 물었습니다.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신이 하지 말라고 했나, 아니면 신이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이 나쁘냐?’유티프론은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신이 금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그 대답이 틀렸음을 설명해 주는 내용이 플라톤의 ‘대화’에 나옵니다. 개신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플라톤의 방법을 차용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옳은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반대로 설명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합니다. 윤리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윤리의 기준을 인간이 결정하게 됩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도 결국은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일 뿐 아니라 유물론을 따릅니다. 모든 가치는 물질로 평가하기 때문에 인권도 성도 물질적 가치로 평가할 뿐입니다. 물질은 그 효용성에 따라 가치가 평가 될 뿐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공산주의나 유물론을 따른다면 일체의 인권이나 자유나 정의 같은 것은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인권과 여권과 성을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해방은 유물론적 사관에 기여하는 해방일 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인권을 말살하는 사상으로 수많은 해악을 양산하였으며 거룩하고 신성한 가정을 세우는데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공산주의 유물사관에는 인간의 가치도 결혼의 가치도 가정의 가치도 성의 가치도 혁명을 위해 소비하는 물질로서의 가치일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혁명전 봉건시대의 부조리와 무지함이 불행하게도 공산주의 유물사관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환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70-80년 대 좌경 대학생들의 의식화 훈련에서까지 성이 사회혁명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지금의 윤리적 형편과 수준으로서는 인권과 성을 도구화 하는 유물사관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회가 불신 사회보다는 나아야 하나님 나라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마저 윤리적 붕괴를 막을 수 없다면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밟히게 되고 그것은 곧 사회를 무너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한국의 안보ㆍ경제ㆍ윤리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2)

한국의 경이적 경제 발전은 자타가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 두 가지 근본적인 토대는,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이고, 둘째는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원리입니다.

경제에 있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보편적 원리는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리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는 그 어떤 경제이론도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고 더 나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나 성실한 노동을 통하지 않고는 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가는 과거보다 더욱 예민한 국제정치 관계 아래서 경제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이 아무리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해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토대가 없었다면 경이적 경제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튼튼한 안보의 토대 위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통해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은 미국이 뒤를 봐 주는 튼튼한 안보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 때문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가지 중요한 토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안보가 위태롭다는 것인 데, 그것은 곧 경제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가 하나님 나라 원리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을 대체할 만한 이론이나 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원리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도전을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룩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경제 이론은 둘 다 사람이 만들어서 운용하는 이론이고 원리입니다. 따라서 그 경제 이론을 만들고 운용하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의 전제 위에 세운 이론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전제 위에 세운 이론입니다.

Adam Smith(1723-1790)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 경제학자이며 윤리철학자입니다. 그가 쓴『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고전이며 그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경제 이론은 성경으로 말하자면 타락한 인간론의 전제 위에 세워진 이론입니다. 그가 볼 때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인데,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부를 창출하는 에너지라고 본 것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악하다고 하여 억제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만 스미스는 그 이기적 욕망이 부를 창출하는 에너지라고 보았으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생각 덕분이다.” 또 하나 스미스가 경제에 도입한 중요한 개념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기능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야말로 물건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가 2년에 걸쳐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국가들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여 1776년에 <국부론>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들이 자본주의 폐단으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한 국가가 자본주의를 도입하면 처음 얼마 동안에는 부익부 빈익빈 형상이 심화되지만 좀 더 지나게 되면 그와 같은 부작용들이 개선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사회주의가 나름의 긍정적인 도전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발전과 개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비해 상대적 평가를 할 때 훨씬 우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평가의 정당성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다가 실패한 국가들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사회주의 체제를 지속하던 국가들 중 북 유럽의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북 유럽의 나라들은 자본주의 약점을 보안하는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를 표방하여 상당할 정도로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 국가들이 사회주의적 경제 이론을 표방하면서도 나름의 성공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소위 북 유럽의 선진국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의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경제적 인프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인간의 노동을 신성하게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실하게 일하여 부를 창출하고 그리고 얻게 된 부를 근검절약하여 경제 발전을 위해 재투자 하며 또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북 유럽의 여러 나라의 기업들 중에는 어느 정도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폐업하지 않고 계속 운영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기업을 통해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란 본래 인간의 이기심을 에너지로 하여 작동되는 원리이기 때문에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고, 사회주의 경제란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결국 망하게 되지만, 부 유럽 여러 국가의 경우, 사회주의 경제 체제 아래서도 성실한 노력을 하게 하는 에너지는 종교개혁이 일깨워 준 소명으로서의 노동의 가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노동은 타락의 결과이지만 또 한편 노동은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실하게 노동하는 것은 하등에 나쁜 것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복을 더 많이 가진 자는 부족한 자들과 나누어야 하지만, 인간의 타락을 전제할 때 이 땅에서의 절대 평등이란 불가능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하게 나누어 갖도록 노력하고 힘써야 하되 그것이 강제에 의해서 되게 하는 것은 좋은 제도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일종의 평등을 강제하는 제도입니다. 평등을 강제하는 것은 이기심이 부를 창출하는 에너지로 작용하듯이 자발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법과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어느 정도 통제되어야 자본주의의 약점인 지나치게 심화되는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이기심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통제는 노동과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 발전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지금의 한국 정부는 이 점에서 크게 실수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내놓는 경제 정책들은 하나같이 투자심리를 위축시키는 것들뿐입니다. 청년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 노력들이 오히려 청년 일자리를 더욱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내 놓는 정책들은 기업들의 투자심리와 노동자들의 근로의욕을 동시에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돈과 강제에 의한 복지와 일자리 만들기는 투자와 근로의욕을 상실하게 하여 결국 나누어야 할 부 자체를 창출하지 못하여 필연적으로 가난하게 될 위험이 높습니다.

애담 스미스가 그의 경제 이론을 세우는데 영감과 도전을 준 사람은 네덜란드의 버나드 맨드빌(Bernard de Mandeville, 1670~1733)입니다. 네덜란드는 1200년대부터 상업 국가로 번성하여 1600년대 상업과 금융의 중심국가가 됩니다. 당시 영국은 강국으로 부상하며 네덜란드 해상무역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하여 양국은 전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을 계기로 서로 경쟁 상대국이던 영국과 네덜란드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상업과 금융도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맨드빌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부패한 정치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그 폭동에 관여하면서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폭동을 거치면서 그가 알게 된 것은 세상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온통 악당으로 가득 하며 모두들 제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그 폭동에 연루되어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사회 경제 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발표하게 되는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 『꿀벌의 우화; 사적 악, 공적 이익』등의 책들은 종교와 미덕을 폄하하여 국가에 해를 끼치고 사치와 탐욕이 공공복지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고발되고 그의 책들은 불태워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 가운데 절제의 덕을 폄하한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이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경제 이론의 전제로 삼은 것은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통찰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맨드빌의 영향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맨드빌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는 동일하지만 스미스는 그 전제에서 경제이론을 전개하였으나 그는 자본주의의 한계와 약점을 통찰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도덕감정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정직하고 바른 이해에서 그의 이론을 전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 어떤 이론이나 철학이나 사상도 바른 인간론의 토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기대하는 이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의 한국 정부의 안보관과 경제 정책이 불러 올 결과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합니다.

지금의 세계 경제는 그 동안의 불황의 늪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하여 OECD 국가들의 경제 사정도 조금씩 호조를 보이고 있는 데 유독 한국의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경제 정책들은 그릇된 인간론 때문에 실패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전철을 밟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覤혁명 이후 좌편향이던 세계 국가들의 정치와 사상적 흐름이 우선회하고 있는 것도 결국 사회주의적 경제 이론의 실패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트럼프의 인간 됨이나 지도자로서의 인품에 박수를 보낼 수 없으나 소위 진보주의자들의 사회과학적 허상과 거짓을 폭로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젊은 지도자 마크롱 대통령의 강성 노조와의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성노조를 두둔하는 한국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사회과학입니다. 과학적 이론은 상당히 긴 임상실험 기간을 통해 진위가 가려집니다. 공산주의로는 경제를 부흥시킬 수 없다는 사실의 임상실험에는 7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타의 실패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문제와 부작용도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개선되고 진보한 반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폐단은 너무나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셈입니다.

한국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은 인간 이성과 능력에 대한 오해가 경제적인 면에서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에서는 긍정적이나 부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는 실패한 이론임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 발전을 도모하면서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표방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적 상황에서는 필경 경제를 무너지게 하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운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한국의 안보ㆍ경제ㆍ윤리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1)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 마치 박근혜의 책임인 것처럼 못된 언론과 정치권이 난리를 피웠고 많은 국민들이 비 이성적으로 흥분하였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대형 사고에 대한 책임이 대통령에게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를 그렇게 수습하고 해결하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정당한 정치적 방법도 아니고 올바른 사법적 처리도 아니며 정직한 사회과학적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회과학을 그렇게 신뢰하지도 않지만 대한민국의 정치권과 언론과 국민의 지력과 의식과 상식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갖는 것마저 어리석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선진국에서나 후진국에서나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에 대처하는 방법은 나라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사고에 대처하는 태도와 방식이 한국과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게 하면 운전자를 무조건 구속합니다(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미국에서는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어도 그것이 사고이면 운전자가 구속되지 않습니다. 고의성이 없는 사고는 불가항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사고를 100%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공위성의 경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예방을 하지만 사고를 완전하게 막지 못합니다. 인간은 최선을 다해 사고를 예방할 책임이 있지만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떤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이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는 주장이 원칙적으로는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성경의 인간론적 차원에서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고의성이 확인되지 않는 한 그 말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미국인들이 사고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에는 그와 같은 인간 이해의 토대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어떤 사람의 범죄 혐의를 대할 때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식적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을 ‘benefit of doubt’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의심의 이익’이지만, 그 뜻은 명백한 범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정상인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미국인의 신사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곳 미국도 언론의 여론조작이 장난이 아니지만 이러한 상식적 신사도의 의식적 인프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연장선상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안보 경제 윤리적으로 침몰하고 있다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무너지고 있는 듯 한 대한민국의 안보 경제 윤리 문제를 세 번에 걸쳐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안보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왜 남의 나라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분도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걱정하면 뭘하느냐는 의미의 자조적인 표현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부와 지도자는 국가의 안보를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안보(Security)는 안전보장(安全保障)의 준말로 국가안보를 의미하며, 통상 국가가 공포, 불안, 걱정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안보는 정부가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중 하나이며 국내외의 각종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 영토, 주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국제 연맹 규약 전문에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가 타국에 의해 공격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고 타국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나라로부터 즉시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 용어(安全保障)를 일본 외무성이 국제 연맹에서 처음 사용한 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탈 냉전이후 국가안보의 개념은 상당히 넓어졌습니다. 과거에는 군사력이 국가 안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의 안전보장이 타국의 군사적 침략을 통해서만 위협 받는 것이 아니고 비군사적 다차원에서 위협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치 외교 경제 환경문제 인권 등 여러 측면에서 국가 안보는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 안보를 지키는 방법도 다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안보가 무너진다는 것은 당장 북한이 공격해 온다는 뜻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영토와 주권이 훼손된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전체적으로 적국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즉 국민 삶의 질이 떨어지고, 영토에 대한 주권이 유린 또는 훼손되고, 국내외적으로 주권이 침해를 당하게 되는 모든 것이 안보가 무너지면 발생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북한의 핵 문제는, 대한민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일본과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6.25 참전 국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 빠르고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고, 전 세계 다른 국가들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열강의 틈바구니, 이를테면 국제정치적 우범지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힘센 깡패 러시아, 중국, 일본이 기회만 있으면 차지하려고 어슬렁거리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러시아, 중국, 일본은 그 집안 내력이나 철학, 사상, 정치사적으로 볼 때 인류 보편가치를 배우거나 존중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깡패 국가로부터 자비나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사탕으로 유인하는 유괴범에게 넘어가는 어린아이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6.25 동난 이후 지금까지 60여 년이 넘도록 그 깡패들 중 누구도 대한민국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힘센 미국이 뒤를 봐 준 때문입니다. 미국도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적 깡패입니다. 모든 힘센 나라는 약한 나라에게 깡패입니다. 나라에 깡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일면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정직한 표현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는 그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인간은 도덕적이지만 집단은 비도덕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집단이 비도덕적이지만 그 중에 가장 비도덕적인 집단을 국가라고 보았습니다. 현대 국제정치학은 마치 그의 이론의 전제 위에 세워진 이론이기나 한 것처럼 국가 관계를 철저하게 힘이 지배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는데, 의로운 국가가 이 땅에 있을 리 만무합니다. 모든 국가는 이기적이고 모든 힘센 국가는 약한 국가에게 깡패이지만 그래도 미국은 러시아나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대한민국에게 자비를 베푼 국가입니다. 미국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힘없는 대한민국은 의지하고 가까이 지내야 할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비위를 거슬러서 이로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이라도 미국이 뒤를 봐주지 않는다면 주위의 힘센 깡패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뺨을 얻어맞고 걷어차일 처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대한민국에서 손을 뗀다면 바로 그 다음 날 일본 자위대가 독도에 상륙할 것이고, 이에 뒤질세라 중국은 제주도를 접수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러시아가 같이 나누어 먹자고 끼어들 것이 자명합니다. 미국 때문에 깡패 국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위 인사가 그런 표현을 노골적으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도덕이나 정의나 평화나 자비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국제정치란 보편가치를 일체 배제한 냉혹한 현실이라는 점을 나라의 지도자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핵을 다루는 트럼프에 대해서 한국의 보수국민들은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폭격 해주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공격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목표는 중국이지 북한이 아닙니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다루면서 처음부터 중국에게 그 일을 하라고 요구 했습니다. 중국이 하지 않으면 미국이 직접 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이 북한의 핵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미국은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이 미국의 전술 군사력의 이동과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도록 한 다음 설마 했던 곳에 치명적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미국의 전투기가 북한을 폭격하게 될까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군사적 옵션과 경제적 옵션이 연동하는 작전은 어렴프시 걱정은 하면서도 눈치체지 못하였습니다.

트럼프는 군인 출신이 아니라 경제 전문가입니다. 경제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협상에서는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그는 피 흘리지 않고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무릎 꿇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미국은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혼내 줄 때 덩달아 설치는 일본도 겁주는 방법으로 중국과 북한 공격을 시작하여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만 미국의 공격을 받은 중국이 중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비굴하리만치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온 세계가 중국이 미국의 지위를 넘본다고 생각했었는데 중국이 미국을 향하여 ‘형님, 저는 절대 형님의 지위를 넘본 적이 없고 그럴만한 힘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소문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식의 항복이나 다름없는 기자 회견을 왕이 외무상이 내놓았습니다.

북한의 김정은도 중국이 이렇게 할 것을 눈치 채고 비핵화니 대화니 하면서 미국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형식은 대화하자는 것이지만 내용은 항복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중국과 북한에게 동시에 치명적 폭격을 가하고 항복을 받아내는, 경제 전문가답게 가장 돈이 적게 들어가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이 뒤를 봐주는 동안 북한이 사용했던 방법은 시간 끌기였습니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과 유엔과의 약속을 여러 차례 어겼으며 온갖 거짓말을 하면서 핵을 개발하는 시간을 벌어왔습니다. 그 같은 수법이 역대 모든 미국의 대통령에게 먹혔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마치 씨름 선수가 상대의 기술을 역으로 이용하여 되치기를 하듯 그동안 북한이 전유기술처럼 사용하던 시간 끌기 수법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전략 무기들을 한반도 인근 해역으로 이동시킬 때 중국과 북한은 엄청난 경제적 군사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가 사용할 수 있는 중국과 북한 고사작전의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몇 가지 쓰지도 않았는데 중국과 북한이 우선 손을 들었습니다. 군사력은 시위만 하고 실제로 폭격은 경제제재로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한 편으로는 언제나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거침없는 경제 폭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쟁 방식은 항복을 한다고 봐주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과 북한은 이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총 한 방 맞지 않고 죽을 지경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간 끄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중국과 북한은 이제 시간을 끌수록 그들의 운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트럼프가 미국에 맞서는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을 길들일 수 있는 옵션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미국 정치인들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럼프는 장사꾼이기 때문에 미국에 맞서는 나라도 완전히 망하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고두고 후회할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습니다.

미국은 러시아나 중국이나 일본처럼 질 나쁜 국제 깡패는 아니지만 미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손을 보는 무서운 깡패이기도 합니다. 이 냉혹한 현실 국제정치에서 정의, 평화, 도덕이나 윤리, 사랑,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만이 정의로 간주되는 국제정치적 현실에서 저돌적으로 정의나 평화의 이상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들이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질 나쁜 깡패보다는 덜 나쁜 깡패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순진한 것은 미련한 태도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폭력국가를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기회가 아주 없거나 아주 늦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자존심 세우지 말고 질 나쁜 국제 깡패들에게 봉변당하기 전에 그동안 우리의 안보를 지켜준 미국에게 고맙다는 태도를 보이고,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입니다. 미국은 역사상 그 어떤 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나라이지만 미국만큼 너그러운 초강대국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미국은 한반도를 접수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깡패국가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덜 나쁜, 착한 면도 있는 깡패국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미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국가안보를 보장 받는 가장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31, 32)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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