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을 깨뜨릴때 천국 문은 열린다. 교회의 생명력은 고귀한 헌신으로 채워진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Th.D, 본헤럴드 발행인, 등/ 저서: 주기도문 연구,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 등.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위대한 계명과 위대한 명령에 대한 위대한 헌신과 온전한 순종은 위대한 교회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된다”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어 때문이다. 어린시절 한적한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아왔기에, 그리고 20대 이후 서울생활도 그리 여유만만하게 출발하지 않았기에 내안에 뭉쳐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시간 하늘보다 땅만 쳐다보며 한숨 짖고 살았던 과거가 있기에, 위대한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위대한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웬지 스케일 자체가 넓고 깊고 모든 것을 받아주는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 내가 생각했던 위대함이란 세상적인 힘을 같는 것의 범주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깊은 세계에 점점 들어가면서 위대함이란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나를 버릴 때 찾아오는 선물인 것을 알아가고 있다.

 

[주님의 마음]

예수님은 위대한 삶을 사셨다. 그분의 위대함은 낮고 소외되고 어둠속에 갇혀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친구로 가족으로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일 것이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살고있는 시몬 집을 심방하면서 식사를 하셨다. 시몬은 한센병을 앓았던 분이다. 나병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접촉하는데 꺼림 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본인도 나병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한 사람일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운 약자인 시몬의 집에 심방을 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의 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지향해야할 사명의 방향이다. 이렇게 사명의 길은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초라한 모습일 수도 있다. 기독인은 항상 사명의 언져리에 있어야 한다. 사명의 자리란 화려함의 자리보다는 어쩌면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되는 자기 포기의 길이다. 따스한 열린 마음과 긍휼함만 있으면 된다. 사명의 길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 예수님의 사역을 조명해보면 지친영혼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삶이었다. 제자의 길이란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300 데나리온]

식사 자리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마리아이다.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존귀한 이름이 된 분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옆에 와서 귀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 옥합의 가치가 무려 300데나리온 이상 간다고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옥합의 가치는 한 노동자의 일년치에 해당하는 고가 향수이다. 마리아가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아무나 이런 행동을 할수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자신의 것을 아까워한다. 이것이 인간의 생리이다. 아낌없이 타인을 섬기는 사람은 사랑의 깊이를 체험한 분들만이 가능하다. 만약에 자신에게는 무한히 후하고 아까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극도로 인색할 경우, 이런 분들은 인생의 깊이를 모르고 사는분일것이다. 사랑의 깊이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기에 옥합을 깰수있었다고 본다.

 

[낭비했다]

여인의 행동을 보고 제자들의 태도가 돌변한다.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아주 기분 나빠한다. 왕되신 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기분 나빠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드린 이 향유를 낭비했다고 보았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귀한 것을 깨뜨렸던 것이다. 여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여인의 사랑의 깊이와 헌신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 희생을 하는 것이다. 사랑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헌신과 희생의 깊이가 달라진다. 여인의 사랑의 헌신과 깊이를 제자들은 낭비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발을 내 딛기전에 주님에 대한 드림의 모습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하나님께 드린 것은 낭비가 아니다. 더 못 드려서 마음이 안타깝지, 절대로 낭비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 모든 것은 낭비가 아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헌금,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가는 것들을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낭비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다 기억하신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모든 거룩한 섬김 그 자체로 이미 마음의 부요함을 얻었다. 그래서 낭비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헌신이 낭비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 자체가 결국 낭비가 될 확률이 높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의 모든 행위는 거룩한 낭비이다.

 

[선교를 통해 경험된 열매들]

18년 전에 지하실에서 교회사역을 시작했다.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던 시절이다. 늘 재정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마음의 큰 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음을 짓누르는 짐이 하나있었다. 바로 선교에 대한 마음의 짐이다. 주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비전과 범위는 항상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거룩한 임무를 주셨다.

그런데 현실은 땅끝 커녕 항공료를 살 물질도 없었다. 한달한달 겨우 겨우 메꾸어 가며 힘겹게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셨다. 내가 선교사로 땅 끝은 가지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가르치는 일은 할 수 있지 않니. 이런 마음에 선교에 대한 동기를 주셨다. 그래서 해외 신학교 사역을 시작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교 강의는 강의자가 항공료와 숙박비와 학생들 간식과 회식등을 감당하던 시절이었다. 신학교 강의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강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다면, 한번하면 끝까지 하는 그런 인내심과 지구력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오늘날까지 신학교 운영을 하고 있.

작은 교회는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에 늘 노출되어 있고, 매달 허덕거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비판하기를, 교회도 자립하지 않았는데, 무슨 선교냐? 또한 선교에 쓸 돈 있으면 자녀들 학원에 보내서 공부를 가르쳐야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늘 들었다. 다 맞는 이야기이다. 선교는 나이 먹어서 은퇴 후에 시간도 있고 재정적 여유도 있을 때 하면 좋지, 맞는 말이지만 틀리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래는 내 시간이 아니다. 내 시간은 현재뿐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지금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선교를 하면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참으로 많았다.

첫째, 한 주간 한 학기 과정을 가르쳐야하기 때문에 공부하며 글을 쓰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다. 그 결과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결국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을 주셨다. 내가 드린것은 아주 작은것에 불과한데, 나를 향한 주님의 배려와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다.

둘째, 나는 언론 사역을 좋아한다, 또한 나하고도 잘 맞는다. 나에게 언론은 그냥 또 하나의 정보지가 아니라 가상교회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정보를 종이보다 핸드폰으로 검색하여 지식과 정보를 습득한다.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중에 상당수가 믿음과 불신앙의 중간 지대에서 머뭇 거리는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가상세계는 유익한 정보도 많지만 우리의 신앙체계를 무너뜨리는 불신의 글도 많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공격은 가상세계에서는 가공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언론은 가상교회이다. 믿음의 글 하나가 중간지대에 있는 분들에게  생수를 공급하는 한줄기 희망이 될것이라 믿는다. 지금 언론을 하는 것도 신학교 강의를 위해 많은 시간 글을 쓰며 경험된 축적의 결과라고 본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셋째, 30대 후반부터 선교지를 다니며 살았기에 가치관이 병들지 않도록 주님이 도우셨다. 내 체질을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아셨던 것 같다. 나는 삶이 궁색해지고 초라해지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세상적인 가치관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주님이 내 삶의 모든 방향을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그래서 15년 동안 사역의 규모의 크고 작은 것의 차이점으로 인해 감당해야할 시간적 정신적 소모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아주 큰 배려였다. 이것도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감사의 제목이 된다.

넷째, 사역중에 가장 큰 사역은 가정 사역일 것이다. 가정이 믿음의 유산을 함께 나누지 못하면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하게도 가족이 큰 무리없이 믿음의 유산을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 되었으니 이것도 주님의 은혜요 선물일 것이다.

주님을 위한 헌신은 낭비가 아니다. 거룩한 드림이다. 거룩한 씨앗을 오늘 심어야 한다. 오늘이란 현재를 회피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인생 가운데 꽃피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룩한 헌신의 길을 다음에 하겠다는 분들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주님과 관계된 거룩한 사역은 항상 현재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교를 꾸준해서 인생의 참된 행복과 기쁨의 문이 열렸다고 자부한다. 또한 우리 교회도 선교를 했기에 오늘이 있다고 본다.

 

[좋은 일을 하였다]

랍비라 고백하면서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낭비라고 책망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의 깊이의 차이일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와 제자들이 주님을 생각하는 수준의 차이가 드림의 차이로 증명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자신의 믿음을 삶을 통해 살아내야 한다. 이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가야할 모습이다. 주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의 수준은 바닥난 항아리처럼 요란한 경우가 많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인을 가만두어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여인을 칭찬했다.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주님께서 매우 좋아 하신다. 이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별처럼 빛나다]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이 평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 여인이 자기 전부를 드려서 주님의 장사를 예비했던 아름다운 행위에 대해서 주님의 평가가 내 마음에 소망으로 사무친다. 믿음의 드림이 사소한 것이든 매우 큰 사명의 자리이든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저도 이 여인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예수님 나도 여인처럼 주님 나라에 기억함이 되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믿음”이 있을 때 그의 삶의 발걸음이 별처럼 빛날 것이다.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랑으로 헌신으로 순종으로 옥합을 깨뜨리는 모든 행위를 기억하신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희생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실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기억을 안 해주어도 인정을 안 해주어도 행복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 교회 역사속에서 믿음의 후손들이 나와 함께 땀을 흘렸던 동역자들의 고귀한 헌신을 기억하지 않을까? 또한 선교현장에서 만났던 충성된 일꾼들이 먼 훗날 한국의 목사를 생각하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추억할수도 있으리라. 이런 작은 소망을 꿈꿔보기도 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