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歷史意識)이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깨어있는 역사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www.bookleader.org) 대표,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 바울의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목사

들어가는 말 

역사(歷史)는 과거의 사실(the fact of the past)에 관한 학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역사는 사람들이 엮어낸 이야기이다. 사상ㆍ운동ㆍ사건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과거 기억 자체가 역사의식이 아닌 것처럼, 과거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살아나는 과거만이 진정한 역사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문화적 영향 아래 있다. 또한 그는‘현재’의 제약 가운데 있다. 만일 그가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그는 그의 시대의 안목이 아닌 다른 시대의 안목(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현재 안에서 과거를 받아들인다.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하는가? 역사,특히 교회사(敎會史)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우리는 역사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대개 이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역사(歷史)란 무엇인가?

“과거는 항상 우리에게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은 하나의 신비이다.”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은, “역사는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은 행위 그리고 불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볼테르(Voltaire)는 말하기를, “역사는 우리가 죽은 자들에게 행하는 속임수의 꾸러미일 뿐이다”라고 했다.

국어사전은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인류사회의 과거에 있어서의 변천 흥망의 기록 2)어떤 사물의 금일에 이르기까지의 변화  자취

역사란 낱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역사란 “인류사회의 과거에 있어서의 변천 흥망(變遷興亡)의 기록”이다. 흔히 역사는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갖는다고 일컬어진다.

(1)객관적 역사(사건)

객관적 의미의 역사란‘역사적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킨다.즉,‘역사적 사건의 과정’,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all happened in the past)이란 뜻으로 사용될 때,역사는 객관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일상대화에서 사용되는‘역사’라는 말은 대부분 객관적 의미의 역사다.

역사 연구에서 사료(史料)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사료가 없다면 역사도 없다.우리는 사료를 통해서만 과거에 접근할 수 있다. 지난 날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접근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또한 역사가 되지 못한다. 역사가는“가능한 한 자기의 연구에 필요한 역사자료들을 발견‧수집하여 연구주제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는 찾아낸 사료들의 역사적 가치를 심사‧비판‧결정해야 한다. “역사는 항상 주어진 정보들을 앞에 놓고 사실을 해석하는 문제이다.”

(2)주관적 역사(탐구)

본래 라틴어historia는 탐구(inquiry)나 탐구와 연구의 결과로 얻어진 역사지식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단편적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사실과 사실간의 연관성을 그 전후관계에서 해명한 탐구와 지식이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헬라인과 야만인의 영광스러운 행적을 보존하려고<역사>를 썼다. 9권으로 구성된 그의<역사>는 동서 양대국이 충돌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인데, 그 사이사이에 많은 에피소드를 삽입하였으며,대여행에서 얻은 견문도 진술하였다.페르시아 인에게 공정하고 타민족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그는 언제나 페르시아의 노예들을‘아무 주인도 없고 다만 법을 소유하고 있는 자유민’인 헬라인과 대조시켰다. 그는 각 민족마다 풍속과 습관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관습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3)역사의 동양적 의미

동양에서 역사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중국에서는 명말(明末)에 이르러서야‘역사’란 말을 썼고, 그 이전에는 단지 사(史)란 말밖에 쓰지 않았다.

사(史)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역사적 사실 그 자체, 2)역사서(역사 기술), 3)역사기록자(사관)의 의미가 있었다.

사(史)는 손 수(手)자와 가운데 중(中)자의 합성어라고 한다. 여기서 중(中)은 바를 정(正)을 뜻하므로, 사(史)는 곧‘바르게 쓴다’라는 뜻이다.

(4)역사가와 역사 연구

김동길 교수에 의하면, “우리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것은 결국 역사가가 잡다한 사실들(facts)가운데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만을 추려서<역사>라고 단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사실이냐 하는 문제는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시대적 환경과 그의 철학,인생관,가치관 등등에 좌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현재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는 과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박성수 교수는<역사학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역사 속에서 태어나 숨쉬며 조금은 역사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단 역사학에 종사하는 사람만 역사를 생각하고 역사를 논하란 법은 없다. 그러나,역사를 단지 생각한다는 차원과 연구한다는 차원은 다르다. 왜냐하면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역사연구의 대상,목적,방법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필요한 것이며, 역사와 역사학의 본질문제에 대한 식견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역사에는 일종의 매력이 있다.역사에는 다른 어느 과목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유의 심미적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역사학이 추상적 관념의 학문이 아니라, 인간적 냄새가 물씬 나는 구체적 사실의 학문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강렬한 매력이다. 또한 역사에는 구경의 재미가 있다. 역사가는 마치 연극이나 영화를 구경하듯 역사를 감상할 수가 있다. 등장 배우들(역사적 인물)의 연기를 보고 칭찬도 해 주고 비난도 할 수 있다. 즉 역사가는 역사의 드라마를 구경하며,그 구경의 재미로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재생하는 것인데, 이 때 역사가는 그 자신의 세계관이나 현재적 관심,편견 또는 신념 등의 주관적 관점 때문에‘있는 그대로’를 재생하지 못한다.

존 브릭스(John Briggs)는 ‘하나님과 시간과 역사’라는 글에서 말하기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인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역사가는 각 세대가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개인의 기억상실이 의사의 치료를 요구하는 정신적 결함인 것처럼 역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없는 공동체는 어려움을 경험한다”라고 했다.

그러면,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필립 샤프는 말하기를, "역사는 참과 사랑의 정신으로(in the spirit of truth and love)친구와 적의 원자료로부터 기록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다른 모든 것을 함축하는 역사가의 첫째 의무는 성실과 공정이다. 그는 역사 그 자체를 재생산해야 하고, 그의 진술에서 역사를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

필립 샤프에 의하면, 역사를 구성하는 작업은‘예술’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건들을 진술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는 과정 속에서의 교회의 발전을 재생산해야 한다. “역사는 해골의 무더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영혼에 의해 채워지고 다스려진 유기체이다.” 그는 역사가에게“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해 공정하라”(Do justice to every person and event.)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들이 그의 선배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하나의“마주침”이다. 그러나 타자와의 참다운 만남이 실현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주체와 역사의 대상(역사 문헌을 통해서 나타난 인물)사이에 교우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는 그의 연구자세에 있어서 사랑의 단계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5)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對話)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Ranke)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되는 역사인식론이 금세기에 크로체(B.Croce)나 콜링우드(R. G. Collingwood)에 의해 피력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칠 따름이다”. 그들에 의하면,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 하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E. H.카(Carr)는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관계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사실의 노예도 아니요,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 continuing dialogue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2. 왜 역사를 배우는가?

지나간 역사를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①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자는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의식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Herbert Luethy).

②역사를 아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문화사요 사상사이다. 과거의 문화와 사상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인류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역사의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사도들과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이는 하나의 커다란 공백에 불과하다...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무식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쉽게 이단에 넘어가는 모습을 본다."(브루스 셜리)

③삶에 뜻이 있듯이 역사에 목적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에서 우러나오는 의미에 감동된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힘을 갖고 있다.이 호소력도 역사연구의 한 매력이다. 역사는 사람을 연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제외된 역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경제와 계급과 정치 등의 비인격적 세력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결정론적 역사 기술을 경계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도 역사로부터 피할 수 없다. 현재의60%는 과거요, 40%는 미래라는 말도 있다. 역사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를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지동식 교수는 역사 연구의 이유를 말하면서, “과거를 더듬어 지식을 축적하여 우리와 세계의 상관성에 입각한 현재를 알아,민족과 국가 그리고 인류와 세계의 진로를 전망하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생활화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만길 교수는 역사 연구의 동기에 관하여, “우리를 역사를 알려고 하는 이유는 선택한 사실(史實)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서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법칙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하여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 그 사실(史實)을 해석하여 의미를 알아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3.기독교와 역사이해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되 교리적 진술이나 신학적 연구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과 언약 관계의 이야기 가운데 계시한다”(John Briggs).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고 따라서 전(全)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계속되는 역사의 흐름은 의미 없는 사건들의 복잡한 얽힘이 아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는 이것을 가리켜‘하나님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물론 순환론적 역사관(시 간관)에 반대하여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직선적’시간 개념을 소개한 것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1)그리스도인과 역사연구

그리스도인은 역사연구의 기본 입장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의 역사서들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로서 역사적 사건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요시하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과거(過去)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느 시대나 기독교학자들은 이러한 물음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신앙과 학문적 노력의 통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가능성을 믿고 역사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도 많이 있다.

기독교와 역사라는 주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를 지나치게 신봉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주 오류를 범하였다. 전자에 속하는 역사가들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고 역사 속의 선과 악의 세력들을 지적하는 것이 기독교적 역사연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복음주의 전통 안에 있는 기독교사가(基督敎史家)들이 빈번히 갖는 생각이다.그 가장 통속적인 형태는‘세대주의’라 불리는 역사이해(歷史理解)이다. 홀 린드세이(Hal Lindsey)는 이러한 해석의 가장 통속적인 옹호자이다.물론 그는 전문적 의미에서는 역사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세대주의적 견해가 고도(高度)의 성경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사건의 의미와 목적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사건들,특히 중동의 사건들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두려움과 의심의 기색 없이-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세계에 일어날 사건들까지 상세하게 예견(豫見)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세대주의는 성경을 보다 용이한 방법으로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에 연관시킴으로써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온 역사학의 제규범(諸規範)들을 무시하고 있다.

보다 온건하고 학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교회사가 중에 이미 고인이 된 라토렛(K.S.Latourette)교수를 언급할 수 있다. 라토렛은 많은 역사가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선(善)의 세력과 악(惡)의 세력을 구분하였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하게 역사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결과들을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기독교와 역사의 관계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역사와 기독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신자>의 저자 반 하비(Van Harvey)는 일부 기독교사가들이 의식적으로 신앙과 학문을 연결시키려 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많은 기독교사가들은‘비평적 판단’과‘신앙윤리’가 서로 상반된다고 간단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신앙이 의식적으로 학문과 결탁되면 건전한 사료 비판체계(史料批判體系)가 침해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왔다. 그 결과,기독교신앙과 학문은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과거의 해석자로서의 역사가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에도 불구하고,기독교적 역사연구는 가능하고 유익하다. “왜냐하면 비록 역사가가 과거의 사건들을 완전하게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인간,그리고 인간과 그의 이웃과의 연결성에 유의하면서 역사를 연구하게 되면 가치 있는 결과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역사연구의 동기와 목적

그리스도인은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마르스덴(George M. Marsden)에 의하면, 역사가는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일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다.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의 문화와 세계에 관련을 맺으면서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이웃들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현세에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깊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마음에 둘 수 있다.이웃을 이해하려면,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이해는 사랑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역사 연구를 통해 사회 속에서 수천년 동안 행동해 온 인간을 연구하는 것은 값진 일이다.

역사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1)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다주며,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도움이 된다.

2)시간과 공간의 편협성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3)사실적 지식습득만이 아니라,분석 평가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

4)사회내의 정치적,종교적,지성적,경제적,예술적인 모든 발전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5)현대의 유사한 문제들의 해결방법에 필요한 연구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

6)연구 대상이 되는 사회의 가치관과 전제 등을 이해 할 수 있다.

(3)역사해석의 문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비그리스도인과 다르게 역사를 해석하는가?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실들’의 고찰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역사가의 가치체계(혹은 세계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독교사가는 파스칼(Pascal)을 논할 때,그의 종교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비기독교사가는 세속적인 계몽운동의 선구자적 요소들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한 역사가의 가치체계는 그가 기술하기 위해 선택한 사실(事實)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역사가들은 모두 각자의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편향된 왜곡은 선택의 과정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선입관을 가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역사가는 부단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이용할 수 있는 증거를 신중히 검토하고,그것이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에 꼭 들어맞지 않더라도, 발생하는 사건을 공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경향들을 극복하여야 한다”(G. M. Marsden).

기독교사가는 성경의 계시로부터 얻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그의 역사해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 속에서 활동하신다.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시다.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경험은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His Story)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시다(대하20:6,시103:19).

2)인간은 최상의 피조물인 동시에 타락한 자기기만자(自己欺瞞者)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최상의 피조물이요,‘창조의 면류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필요이상으로 높이려는 유혹을 받는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이룩한 문화적 업적을 보며 자기경외감(自己敬畏感)을 갖는다. 기독교사가는 인간의 역설적 양면을 동시에 보면서 인간의 문화적 업적을 평가한다.

3)역사적 행위는 그 행위를 가능케 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의 인간본성(人間本性)에 관한 이해는 인간행위의 동기를 서술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역사가는 가끔 자기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인간을 유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경제적 이해관계,사회적 압력, 계급투쟁, 무의식적인 심리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인가? ”종종 역사가들은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인간의 행위를 유발케하는 주요원인(主要原因)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인간이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기독교적 관점은 인간행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4)모든 역사적 해석은 도덕판단과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료(史料)선택까지도 가치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기독교사가는 인간의 문화적 업적을 찬양하거나 세계종교들을 기술할 때,끊임없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된다. “역사가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그가 그의 사명에 진정으로 충실한 자라면,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Donald A. Macphee).이같은 의미에서 볼 때 역사는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학문이 된다.

5)모든 역사적 심판들은 잠정적인 것이다.이것은 역사의 모호성의 다른 측면이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심판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요 잠정적이다. 세상 끝에 가서야 역사 현상의 절대적 선악이 드러난다. 따라서“지나친 확신과 지나친 소심 사이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역사해석은 기독교적 역사서술로 표현된다. 매킨타이어(C. T. McIntire)에 의하면, “기독교적 역사서술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서술한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인간관,사회관,규범관,역사관,세계관 그리고 피조 실체 전반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가치와 통찰에 의거하여 인간,사회구조,제도,사상,관습,생활양태의 역사를 평가하고 있는 역사서술(歷史敍述)을 가리킨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ma)교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거절해야 하는 두 가지 역사해석이 있다.하나는 고대 헬라인의 역사 이해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기 가운데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위에서는 역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이 역사관에는 역사의 목표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관에 의하면,역사는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이 아니라 직선적 방향성을 가지고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요,하나님의 목표를 향한 움직임이다.

우리가 거절하는 또다른 역사해석은 무신론적 실존주의(實存主義)의 역사이해이다. 이 경우에도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목표를 향한 움직임도 없다. 따라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의하면, 각사람은 의미 있는 결정을 함으로써 확실한 실존에로의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미이드(Sydney E. Mead)교수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에게는 부분적으로만 인식가능하고 또 인식된 학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궁극적으로 역사를 알고 계신다...하나님만이 역사의 종국을 알고 계신다는 단언은 역사의 단편들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작업들이 한정적이고 가장적임을 말하여 준다. 환언하면, 이 사실은 인간은 산 자(者)의 하나님, 즉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삶을 영위해가야 함을 의미한다“.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는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신학(a theology of history)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있다. 우리는 성경적(기독교적)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갖지 못하면,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4)기독교 역사관과 하나님 나라

필립 샤프에 의하면, “보편적 역사의 중심적 흐름과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다...교회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지상에서의 천국의 일어남과 진보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탄보다 강하시고,빛의 나라가 어둠의 왕국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경은 역사와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시간과 역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라나도록 고무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파루시아)으로 역사는 주전(B. C.)과 주후(A. D.)로 양분되었다.

“보편적 역사의 중심적 흐름과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다...교회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지상에서의 천국의 일어남과 진보이다.”

“그 정당한 출발점은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이다. 그 말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그의 영광을 계시하셨다.그 영광은 성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육체로 계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미움을 받으시고,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마찬가지로 그의 교회는 어둠의 권세에 의해 공격을 받고 박해를 받는다. 기독교의 역사는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역사를 포함한다...한편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탄보다 강하시고, 빛의 나라가 어둠의 왕국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혹은 마태의 표현을 따르면 하늘나라(천국)의 도래이다...누가복음4:43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가 자기 사역의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전파하신 하나님의 말씀(눅8:11)은 천국의 말씀(마13:19)이라고 부를 수 있다.또 신약의 모든 말씀을 요약할 수 있는 복음은(눅4:43,8:1.16:16)은 그 내용이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 개념은 그리스도의 비유의 핵심이며,그의 전(全)활동과 메시지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신약성경 전체는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 책이다. G. R.비슬리-머리는 그의 저서<예수와 하나님나라>에서 말하기를, “예수에 의하면,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자신의 말씀과 행위의 사역 속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다;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정점에 이르며 불시에 있을 그의 파루시아로 이어진다. 예수의 전망 속에는 신적 주권의 겸손한 섬김 속에서의 인자의 사역들과 종말에서의 그의 행위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파루시아에서도 구원하시는 주권을 중보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신자들의 은혜의 체험은 인자로서의 예수의 행위의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기독교인의 실존은 성취된 구속과 기약된 종말(consummation)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이미 임하였으며 현존하며 앞으로 임할 주의 은혜에 대한 의존을 포함한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구속사(救贖史)속에서 활동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시간>의 저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구원을 역사(歷史)로 이해하면서 현대신학에 있어서‘구속사’(救贖史)를 새롭게 문제시했다.

구속사는 ‘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하는 지속적인 시간과정’이다. 따라서 구속사의 전진하는 진행은 구속의 완성으로서 보편 역사 위에 다가오는 미래의 최후 심판을 향한다. 그러므로 미래적 종말론을 객관적인 구속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구속사는 창조-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종말론적 완성이라는 구속의 그리스도 선(線)의 세 가지 결정적 단계의 전진적 과정을 지닌다. 그리스도 사건은 구속사의 중심점으로‘단 한 번의’되풀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성격을 지닌다. 쿨만에 의하면,구약의 전 구속역사가 성육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과거와 미래를 중심적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연결하는 구속사의 현재의 단계는‘이미 이루어진 결정’과‘앞으로 다가올 완성’사이에 존재하므로, 긴장의 구조를 지니다.현재는<이미>종말의 때이나<아직도>그 종말은 아니다. 그리스도 초림 이후 재림 전까지의 시간은 결정적인 싸움과‘승리의 날’사이의 기간이다.

쿨만은 구속사의 현재의 단계를 <종말 전의 마지막 때>라고 부른다. 이 현재의 단계는 그리스도의 지상의 몸인<교회의 시기>이다. 교회의 시기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의 재림 사이의 기간이다. 쿨만에 의하면,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이런 뜻에서 구속사는 역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역사 옆에 나란히 있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와 역사는 결코 동등시될 수 없다. 그는 개인의 미래는 전 구속사의 미래에 의존한다고 본다. 한 개인은 모든 역사가 최후적으로 완성되는 때 부활의 몸을 가질 수 있다.

(5)역사와 법칙 그리고 섭리

필립 샤프에 의하면, “역사는 두 가지 면,즉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편에서, 역사는 시간의 질서에서의 그의 계시이고(창조가 공간의 질서 안에서의 그의 계시이듯이), 무한한 지혜와 정의 그리고 자비에 대해 연속적으로 펼쳐 보이시는 것이다. 그의 영광과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면서.인간 편에서 역사는 인류의 전기요, 인류의 육체적 지성적 그리고 도덕적 힘의 점진적 발전이다(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포함하는)...보편적 역사의 관념은 하나님의 통일성과 인간의 통일성과 공동의 운명을 전제하고 있다.”

역사는 법칙의 영역을 보여 준다. “역사적 사건들은 어떤 의미에서 법칙적인 것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것들도 한번 일어난 후에는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가 있다...역사에서의 인간 존재의 자유의지와 법칙의 지배는 서로 화합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조화할 수는 있는 것들이다.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까지 그 사회에서100여년 간에 걸쳐 일어났던 커다란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에 어떤 사람은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과정들을 분석하고20세기는 엄청난 전쟁과 전쟁의 긴장이 지속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허버트 버터필드에 의하면,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그 섭리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생존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부분적으로는 두 개의 다른 요인들을 통해 역사한다.즉 우리들이 이 세계에서 모험을 각오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따라 살아가게 한 것은 섭리이다...하나님의 섭리는 나치주의의 패망에나...우리 개개인의 일상 경험 가운데도 역사한다.“ “그러나 섭리라고 할 때 섭리가 단지 우연적으로나 변덕스럽게 일어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전쟁 자체는 우리 문명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악에대한 심판으로 그런 방법이 아니고는 그 뿌리를 뺄 수 없는 방법으로 보게 된다...사실 우리들은 유럽 대전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던1914년 이전의 도덕적 병(病)들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고 있다...모든 크리스천들은 역사는 궁극적으로 약속에 기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4.교회사(역사신학)의 의의

(1)교회사의 정의(定義)

교회사가들은 교회사에 관해 여러 가지 정의를 제시한다. 에벨링(G. Ebelling)에 의하면,교회사는 <성경해석의 역사>이다. 보른캄(H. Bornkamm)에 의하면,교회사는 세계복음화의 역사이다.베버(O. Weber)는 교회사는 “교회 역사의 변천 중에 교회가 듣고 대답한” 말씀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김성태 교수에 의하면, “교회사는 학문적 역사방법을 통하여 얻어진 교회의 과거사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그러나 교회사는 신학의 일부이므로 신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요구된다. 따라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교회사를 연구할 수 있으며, 신학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교회사가가 될 수 있다”.

교회사는‘필수적인 보조학문’이다. 교회사는 교회공동체의 과거에 관한 연구요 기록이다.그러므로 교회사는 역사의 흐름에 따른 교회의 발전 및 각 시대의 특징 있는 사건들을 서술해야 한다.

(2)역사신학(교회사학)의 위치

역사신학(歷史神學)은 역사가 짧은 학문이다.유세비우스(P. Eusebius)의<교회사>는 고대교회300여년 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교회사의 효시’라고 까지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초대교회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기록한 고대교회의 최초의 교회사라는 점이다.근대의 교회사 기술의 아버지는 모스하임(J. L. Mosheim)이다. 그는<교회사강요>라는 저서를 썼다(1726년).

19세기 후반에는 실증주의적 역사주의가 승리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룩된 전제들과 업적은 오늘날도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르낙(Harnack)은 그 방법으로서 고대교회의 선교사(宣敎史)와 교리사(敎理史)를 연구했다.

20세기 개신교 교회사 기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전문화’이다. 라토렛(K. S. Latorette)의 선교사(宣敎史)로서의 교회사 전집은 뛰어난 저작이다(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I-VII,1937-45).곤잘레스(J. L. Gonzalez)의<기독교사상사>는 인물 중심이나 주제 중심의 방법론을 택하지 않고, 주요 신학자들과 이들의 사상을 역사적 사상적 배경 하에 조명하면서 세밀하게 서술하였다.저자의 모든 주장은 풍부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20세기의 기독교 역사가 중 기독교와 역사에 관해 폭넓은 사상체계를 구축한 학자는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와 크리스토퍼 도오슨(Christopher Dawson)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기독교 역사관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였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 사상사에 관해 심도 있는 강의를 했고 그 강의들은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나가는 말

역사란“사람들과 시대들에 관한 연구로서,시대를 통해 변화하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이다. 더 나아가 역사는 시대를 통해 변화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의 기억이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인은 그들의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참다운 정체성이 집단성에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즉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지체인 것이다.”

필립 샤프에 의하면,교회사는 신학의 등뼈이다. 교회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실제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경고와 격려,위로와 조언의 보고로서). “모든 시대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있다.”

그에 의하면,교회사는 1)첫째로 모든 교양있는 지성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다. 2)신학자와 목회자를 위해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3)기독교의 현재의 상턔에 대한 열쇠이다. 4)성공적 사역을 위한 안내자이다.

뿐만 아니라“교회사는 교회의 참된 본질과 특성을 알려주는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부여한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역사의 주(主)로 고백한다.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움직임 가운데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행17:28). 기독교는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기독교다. 기독교신앙도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적 안목(眼目)을 가지고,역사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식(歷史意識)이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깨어있는 역사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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