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저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는 조완호 집사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60여년의 세월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삶의 굴곡이 심해서 평범한 분들과 비교해 보면 삶의 길이가 서너 배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가족을 건져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서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1952년생충남 서산 출생서울공업고등학교 졸업유원건설 자재부 근무천호텍스피아 수출업무 담당(현) 상업용 건물 시설관리 업무

【신앙역대기】20. 인천에서 온 형사들

 경주현장에서 일하면서 가족이 다녀간 후에 늦여름이 되였다. 그 날도 점심식사 후에 2층 현장의 한쪽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누워있는데 나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가 나를 찾았다. 지금 현장입구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인천에서 온 형사라고 하면서 파란색 봉고차를 가져온 사람을 찾고 있으니 그 차량의 주인은 잠간 밖으로 나와서 자기들을 만나 달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그래요? 내가 지금 나가서 만날께요!" 하고는 곧장 현장 뒤편의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내가 지명수배 상태였고 채권이나 채무를 해결하고 있는 중이라서 일단은 피신해야 했다. 산속에서 여관을 신축하는 현장이어서 현장 뒤로 10여 미터만 올라가면 바로 산이었다. 더더욱 산림이 우거진 늦여름이어서 산 속에 들어가서 5분만 걸어가도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찾지도 못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형사들이 나를 검거할 생각이 없었다. 진정으로 나를 검거할 생각이 있었다면 기다렸다가 내가 운전하고 출발 하거나 도착 할 때에 검문을해도 되고 현장입구에서 나를 알고 있는 사람과 동행해서 함께 현장 안으로 들어왔으면 되는데 형사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지명 수배자 보고 스스로 걸어서 나오라고 하면 어떤 수배자가 스스로 걸어 나올까? 지금도 의문 사항이다. 그러니까 그 형사들은 나한테 간접적으로 말을 전해서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말고”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형사들은 간단히 돌려보냈다.

 일단 현장을 벗어나니까 다시 그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 하겠고 숙소로도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또한 형사들이 내가 일하는 현장을 알고 있을 정도면 경주에서는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은 4차선의 큰 도로로 나갔다. 물론 길이 아닌 산속을 헤매면서 큰 길로 나가려니까 흙더미에 미끄러지고 나무 가지가 할퀴고 거기에 땀까지 범벅이 되어서 정말로 간첩이 아니면 정신 이상자의 행색 이었다. 국도변에서 경주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는 차량에 손을 흔들면서 태워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참 후에 소형 화물차 한대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유심히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간절히 사정을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감포에 아주 급한 일이 발생해서 가야합니다" '좀 태워 주십시오!" 다행히 감포 시내는 아니지만 거의 그 근처까지 가는 차량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잠간 이야기를 해보니까 그 운전자가 착하게 보였다. 두 번째로 다시 부탁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수배중이며 현재는 돈도 없습니다. 가능하시면 시내까지 부탁 합니다”. 

 그 사람도 나의 형상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는지 불쌍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감포시내의 초등학교 앞까지 태워 주고 되돌아갔다. 

 다음은 포항의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전화를 해야겠는데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뿐이다. 경주 숙소 옆에 있는 감리교회로 전화를 했다.  항상 나의 신분이 불안했기 때문에 어디든지 새로운 현장에서 공사가 시작되면 가까운 교회를 찾았고 또 나의 처지를 말씀 드리면서 기도를 부탁하고는 했다. 그리고 급할 때 편의를 봐 줄 것을 미리 부탁했다. 교회로 전화 하니까 사모님이 받았다. 동전 몇 개뿐 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포항에 있는 내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내가 감포의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퇴근하는 대로 나한테 오도록 연락을 부탁 했다. 내 친구도 처음에는 낯선 여자가  갑자기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해서 장난인줄 알았는데 자기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면서 교회의 사모님 이라고 해서 믿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앉아있는 내 꼴은 정말로 몸이나 마음이나 더 이상 초라해 질 수 없는 상태였다. 

 해가 지고 전깃불이 켜지기 시작 할 무렵에 포항의 친구가 차를 가지고 도착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사태파악이 안 되는 그런 느낌 이었는데 천천히 나의 앞과 뒤를 돌아보더니 배꼽이 빠지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신나게 웃기만 했다. "야 임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사업한다는 사장님이 이꼬라지가 뭐야. 임마? 도대체 너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야? 아니면 내가 귀신을 보고 있는 거냐?" "야! 내가 지금 피곤하고 배고프니까 우선 너의 집으로 빨리 가서 밥이나 먹자!" 그 친구의 차를 타면서 내 가 신고 있던 현장의 운동화와 양말을 그 자리에 벗어서 버리고 맨발로 차를 탔다.  그 친구가 집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친구 하고 같이 가니까 저녁 준비 해 놓으라고 하면서 이놈아가 많이 배고프니까 대충해도 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30여분 후에 포항의 시내에 도착해서 그 친구는 운동화부터 새로 하나 사주었고 츄리닝도 한 벌 사서 갈아입히면서 헌 옷도 그 자리에서 모두 버렸다 . 그런 다음에 그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 저녁식사 후에 그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다음 날 친구의 아내는 나에게 외출용 옷 한 벌을 사주었다. 

 그 친구는 군에 있을 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나한테 전도를 많이 했던 친구다. 그러나 내가 찾아갔을 때에는 그 친구 부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 친구의 딸은 대학부에서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었다. 친구 집에서 며칠 묵었다가 서울로 돌아 왔고 다른 현장에서 일은 계속 했다. 

【신앙역대기】19. 경주 현장에서 가족과의 만남!

기도원과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한 달 정도씩을 지낸 후에 나도 다시 기운도 차리고 집의 살림도 걱정이 될 때에 친척 한 분이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을 하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하려고 준비 할 때라서 즉시 건설현장의 잡역부 일을 시작했다.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고 경량철골 조장 밑에서 일당 받는 일 이었다. 그동안은 방안에만 갇혀 있어서 답답했었는데 일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잘 먹고 잠을 잘 자니까 기분전환도 되었다. 그 중에 한 곳이 경주 현장이었고 경주 현장에서는 잊지 못 할 두 가지의 사연이 있다. 그 중에서 하나가 가족과 함께한 생활이었다.

일 년 이상을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생활을 하니까 가족이 너무나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급식소에서 일하던 아내와 아이들이 동시에 방학이 되어서 가족이 쉬는 동안에 내가 일하고 있는 경주에 오라고 했다. 방학이 시작되어서 아내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경주까지 왔다. 오래만에 만난 가족은 너무나 반가웠고 일주일 정도를 같이 생활하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한 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놀랬다. 우리 일행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경주의 외곽에 있는 시골의 빈집을 얻어서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고 그 옆에 빈방이 있어서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시골집은 방문 앞까지 지렁이가 기어 다니고 있었고 화장실은 재래식 이었다. 또 한 그 화장실을 한동안 치우지를 않아서 안에 있는 봉우리가 화장실 바닥의 평지와 비슷하게 올라와 있어서 아이들은 화장실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모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래도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이런 곳에서 매일 고생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일주일만 참으면서 함께 생활 하자고 했다. 아침에 출근 할 때면 아이들이 "아빠 다녀오세요!" 하면서 인사를 했다. 아빠하고 헤어져 생활 하기전만 해도 출근 시간에는 신사복 입고 승용차타고 출근 아빠가 이제는 안전모를 쓰고 옷은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군화 같은 신발을 신고 출근하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아빠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저녁 퇴근 시간에는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서 초라하기 그지없는 아빠가 되어서 돌아 왔다.

얼마 전에 큰 딸 애가 그 당시의 이야기 하다가 나 에게 한 말 이 있다. 경주에 가서 아빠 보고 와서 얼마 후에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를 가는데 지하철 공사장 현장이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지하철 공사장은 꽤 깊은 곳 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머리에 쓰고 있는 하얀 모자만 보였고 그 모자를 보면서 너무 불쌍하게 보였던 아빠 생각이 났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래도 나의 모습은 그토록 초라했지만 퇴근을 해서 숙소로 갈 때면 아내와 아이들이 동네입구의 큰 나무 밑까지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너무 반갑고 행복했다

예정된 일주일은 금새 지나갔다. 가족이 서울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은 현장에 출근하지 않고 쉬면서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 바닷가로 놀러 갔다.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고기를 사다가 구워먹고 큰 수박 하나는 시원하게 물에 담근다고 바닷물에 담갔더니 바다의 짠 물에 절여지기도 했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추억 만들기가 끝나고 드디어 서울로 올라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식구들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경주의 고속 터미널에서 헤어지기로 했었는데 경주에서 그날 아침에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아쉬워서 대전 까지만 내 차로 같이 가기로 했다.

대전에 도착하고 터미널 근처에 차를 세우고 우리 다섯 식구는 아무 말 없이 고속버스를 타러 갔다. 터미널 대합실 근처에 오니까 아내가 더 이상 따라오지 
못 하게 하고 나 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나도 서울로 가는 버스를 보면 아쉬움이 더 할 것 같아서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두 번 다시 뒤돌아서서 아이들을 쳐다 볼 수 가 없었다. 경주를 향해서 혼자 되돌아가는 길에 차를 운전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물만 조용히 흐르다가 감정이 점점 격해 지면서 소리가 나기 시작 했고 차의 문을 꼭 닫고 고속도를 달리기 때문에 알아 볼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 놓고 소리치며 울었다. 정말로 많이 울었다. 그때 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시간들 이었다.

비록 시골의 작은 방 이었고 모기와 벌레가 극성을 부렸지만 가족이 함께 있다는 그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난 일주일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현장의 일행들과 떨어져서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는 동네입구의 큰 나무 밑에 가서 이야기도 하면서 떠들고 웃고 했던 시간들이 생각나면서 정말로 나의 가슴은 후비고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낯 선 곳 이었지만 주일 예배 때에는 우리 다섯 식구가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서 각자 소원대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것 이지만 수배자의 몸으로 가족과 헤어져서 생활하다가 온 가족이 함께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잊지 못할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시간만큼은 나의 신분과 처지를 모두 잊어버리고 오랜만에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온 가족이 건강 하고 무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언제인가는 회복해서 다시 내가 출석하든 교회로 돌아가서 마음껏 충성하고 봉사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지난주에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그 당시에 주일 예배를 드렸고 인천에서 형사들이 왔을 때 도움을 준 감리교회로 전화를 했다. 아쉽게도 10여년전에 담임 목사님이 새로 부임을 해서 그 때의 목사님과 사모님은 안계셨다.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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