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41년 만에 처음으로 가는 정릉

貞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가 안장된 능이다. 본래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던 능이었다. 그러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자, 현재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되었다.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이 현종(조선)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를 꼬드겨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 신덕왕후를 싫어하였으며, 신덕왕후 역시 방원을 경계하고 있었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잡아죽이고 이복동생 이방번과 이방석을 붙잡아 죽였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신덕왕후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와 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방원이 정릉 석물들을 광통교 밑에 처밖아 놨기 때문에 청계천에 잠겨 사람 손이 타지 않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 까지 보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계모를 향한 태종의 효심이었다. 석물에 새겨진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가 절대화 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가에도 그려져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서울 중구 정동은 정릉이 처음 조성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이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다고 한다. 

암튼 조선 건국역사와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연 많은 능이다. 지금은 서울 시내 안에서 한적하게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더불어서 수유리에서 신설동까지 연결된 경전철 정릉역이 생겨서 한결 편리하게 다녀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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