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9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특징들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고, 분노를 다스려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 복수심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도둑질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어려운 자를 도우며, 더러운 말이 아닌 덕을 세우는 말과 선한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종교적 형태와 종교적 내용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윤리적 태도와 도덕적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으로 요구되는 내용과 세상의 윤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거짓말과 도둑질이 나쁜 짓 인줄 알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좋은 줄 알며, 화내는 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파괴적인 요소임을 압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하며 할 수만 있으면 나쁜 말보다 좋은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윤리와 성도의 윤리가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다면 굳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 나와서 이런 삶을 배우고 훈련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해 굉장히 중요한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25-29절까지는 이미 우리가 확인한 윤리적 요구였고, 본문의 31-32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반복됩니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도 전부 윤리적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앞뒤의 모든 윤리적 요구의 중간에 30절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본문을 원어에 더 충실하게 번역하면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로 성령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이죠. 지금까지 사도가 설명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원리가, 또 앞으로 설명할 성도의 삶에 대한 모든 요구가 모두 성령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도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윤리란 말 자체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기본적인 도리 아닙니까? 그것이 지켜져야 그래도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으로 유지 된다고 믿기에 불신자들도 윤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윤리는 그 동기가 기독교 윤리와 다릅니다. 사람들이 윤리적인 삶을 사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거짓말하지 않고 도둑질을 안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분노를 억제하고 선한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합니까?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45% 이상이 남이 보지 않을 때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합니다. 그처럼 세상 윤리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비난을 의식해서, 혹은 자신의 신분이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동원됩니다. 조금 더 고급한 동기는 자기 기쁨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윤리나 도적이 실행됩니다. 그래서 누가 보지 않거나 제도적인 규제나 거기에 따른 보상이 없으면 알아도 윤리적인 삶이 잘 발동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그런 동기에서 실행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새사람이 되면 그때부터 성령하나님이 믿는 자 안에 거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연합된 존재들입니다. 남남으로 따로 살던 사람이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그때부터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동행의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 안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며 확증해주십니다. 30절에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그 차원에서 시작되고 요구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의 윤리와 다르지 않게 보이지만 매우 다릅니다. 동기와 차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거짓을 말하지 말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할 때 기독교 윤리는 단순히 거짓이 나쁘고 참된 것을 말함이 옳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는 지체와의 관계, 그리고 자기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동됩니다. 많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거짓과 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참과 진실이 상대방에게 감당이 안 되는 진실이며, 공동체의 유익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덕이 안 되는 진실이라면 말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상대방의 어깨와 공동체 가운데 집어 던지는 것을 정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 정직과 진실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교묘한 거짓입니다.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렇게 큰 내용의 차이가 벌어집니다. 세상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큰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기독교 윤리의 동기는 철저하게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나의 말, 행동, 선택,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인가를 의식하는 거기서부터 기독교 윤리는 출발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식하고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 동원되는 윤리는 비록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한번 발동되기 시작하면 굉장히 놀라운 영향력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있든 없던, 자신에게 유익이 되던 안 되던, 다른 사람의 시선과 제도적 규제가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식하는 윤리이므로 세상의 윤리와는 다른 차원의 강력한 동기로 유발되는 윤리입니다.

기독교는 윤리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도덕으로 구원에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윤리가 세상의 윤리보다 훨씬 차원이 높고 고급하며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동기와 근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의 태도가 없다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그것을 의식하며 성령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그분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혼한 부부에게 가장 모욕적인 일이 무엇일까요? 배우자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언약이며 연합입니다. 언약을 통해 결혼을 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배우자를 의식해야 하며 매사를 의논하고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연합이며 결혼이며 동행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찾는다면 그것만큼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 없습니다. 가장 큰 모독이며 모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성령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존귀한 분입니다. 없는 사람 취급해서는 안 될 분이며 매사에 그 분을 의식하고 조심하며 대접해야 할 분입니다. 그런 성령님이 믿는 자 안에 실제적으로 계십니다. 계시면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롬8:26). 믿는 자 안에 계시면서 시기하며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십니다(약4:5).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며 복인지 모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근심하거나 시거하거나 사모하면서 질투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근심하며 질투하며 탄식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얻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근심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신 후에는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시기하고 근심하고 사모하며 질투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은 무한히 낮추시고 우리는 무한히 높이셔서 거의 똑 같은 수준에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놀라운 대접이며 은혜요 복입니다. 그렇게 해봐야 하나님이 덕 보시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런 은혜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지요? 이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분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모욕적으로 대접하고 취급하는 것이 없으며 그것만큼 불경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면 귀찮고 속박 받을 것 같지만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고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기며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진리로 자유하게 되며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매사에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사람의 삶을 기쁨 가운데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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