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의 구속을 보면서 MB의 대통령 당선 당시에 썼던 글을 올려 본다

르네상스를 통하여 시작된 이성주의는 18세기 계몽주의를 통하여 그 열매를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의 자식들인 다윈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인본주의는 20세기까지 세계를 주름잡았습니다. 다윈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사회주의와 인본주의는 무서울 정도로 세계를 제압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통한 근대사상의 몰락과 구소련 사회주의의 몰락은 20세기 사회의 개편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세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합니다. 절대권위를 부정하고 진리는 있으나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적 진리관을 추구합니다. 이성보다는 직관과 개인적 신념을 요구하는 사회입니다. 회의주의자를 환영하는 사회가 21세기의 사회의 흐름입니다. 이전 시대가 권위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도전을 하였다면 이제는 실재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다원주의로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제적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진리에 대하여 기회이자 위기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의 흐름의 한편에 여전히 근대의 사상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이 모든 계층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제입니다. 바로 경제입니다. 경제의 문제가 사상의 문제를 다 잠식하고 만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모습 가운데 나타난 실용주의는 근대가 낳은 자식입니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실용주의는 인본주의 전도사들의 강력한 구호였습니다. 모든 것이 삶의 질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실용적이지 못한 것은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용주의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실용주의 대표적 철학자인 존 듀이가 중심이 된 인본주의 선언을 통하여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말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인간의 이성이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도 실제에 있어서 유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현실에 쓸모 있는 지식을 얻을 때 사회 속에서 건강한 성장체로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육도 성장을 위한 도구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삶에 쓸모없다면 교육의 의미가 없다고 여길 정도입니다. 이러한 운동의 비정상적인 성장이 바로 인문학의 비틀거림을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실용 가능성이 있을 때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성장에 유용하지 않는다면 가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삶의 도움이 크게 되지 않는 것은 배울 가치도 없다는 생각을 낳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이 두개의 사상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회의주의가 만연하고 있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실용주의가 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번 총선을 통하여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회의주의 세대인 젊은 세대는 투표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말은 찍을 자가 없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거짓입니다. 출마자의 공약과 지역구 의원들의 공약 이행 사항을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고 미리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누가 되어도 똑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회의주의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실용주의가 기세를 부렸습니다. 강북의 대다수의 후보들이 저마다 뉴타운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정책도, 도덕도 국가적 비전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용성을 보고 찍은 것입니다. 물론 그 공약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거짓이 되었고 소용돌이 속에 나라가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잠깐 교육부의 교육 자율화 정책이 발표되었습니다. 핵심 내용은 경쟁을 통하여 살아남기입니다.

이제 새벽부터 천리행군을 하여야 할 아이들을 봅니다. 그리고 열 삽 뜨고 허리 한번 펴야 하는 우리 내 부모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이제 학교도 유용성에 맞추어서 반을 편성하게 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실용주의가 깃발을 날리는 것입니다.

청와대에서 불어 온 실용주의는 이제 기업을 지나 교육의 현장을 휘감고 가정과 급기야 교회에까지 파급 될 것입니다. 성장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의지가 과연 성경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실용주의 목회 때문에 이렇게 몰매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세습도 실용주의 논리에 의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실용주의가 전부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 흐름에 마냥 흘러가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르게 분별하고 경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본주의 신앙에 물들어 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시대로부터 복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 지탄을 받는 것은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성장에 목말라 있는 시대에 성장을 위한 토대인 실용주의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이미 긍정의 힘과 씨크릿을 통하여 그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선한 것은 아닙니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분별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신이 지금 온 세상을 휘감고 있습니다. 모든 논리가 경제논리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것이 죄가 아니듯 부자가 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용한 양식으로 우리를 먹이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이는 없는 이를 위하여 나누어 주고 없는 이는 좀더 절약하고 절제하고 다시금 일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실용주의를 너무나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그럴수록 우리는 심사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신동식 목사(빛과 소금교회, 기윤실 자발적불편운동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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