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로마서 7장 1-3절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 얽매여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얽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얽매여 있었지만,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얽매였다고 합니다. 옛사람으로 있을 때는 율법에 얽매여 율법의 저주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룬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라는 남편은 죽고 새로운 남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하여 살면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내가 율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안에서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함으로 내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성령과 함께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을 맺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다른 것에 얽매이면 안됩니다. 만일 다시 율법에 얽매이거나 세상에 얽매이거나 다른 세상 우상 신들에게 얽매이면 이는 영적 간음입니다. 이것이 7장 3절의 암시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므로 “우리 중에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참조, 롬 14:7-8). 

이에 로마서 7장 4절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 시대에 대하여 죽었고, 따라서 이제 율법의 얽매는 효력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니 부활하여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 가서 믿음으로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서’라는 것은 원어로 (케네스싸이)인데 이는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새언약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합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니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충성하면 의로움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로마서를 전반적으로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얽매일 때만이 율법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즉,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야 우리는 실제로 율법을 자연스럽게 온전하게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내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과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믿음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격적인 결단과 믿음의 과정에는 성령의 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 역시 우리의 자유 의지적인 결정에 따라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묶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한편,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한 옛 사람은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과거의 ‘나’를 말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 3:9)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6:6). 

그 ‘나’는 거듭난 사람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어로 (사륵스)라고 불리는데 개역 개정에서는 ‘육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옛 사람과 육신은 같은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8:12-14; 롬 13:14; 참조, 고전 3:3; 고후 10:2; 골 2:8; ) 

따라서 7장 5절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거듭난 사람이 옛 사람을 따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경우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었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거듭나지 않는 자는 오직 아담에게 물려 받은 옛 자아만 있습니다. 그 옛 사람은 죄의 노예 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사탄의 다스림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옛 사람의 상태에 대해 에베소서 2장은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라.](엡 2:2-3)

즉, 불신자는 자기 안에 있는 육체의 욕심, 곧 ‘육신’이라는 죄성을 따라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에 대해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창 6:5)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 안에는 옛 사람 또는 육신이라고 불리는 죄성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주어진, 새 사람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나’에게 전반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두 인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격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 또는 옛 생명과 새 생명이 영향을 끼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로마서 7장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율법과 죄에 대한 관계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은 계명의 역할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즉,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에 선합니다. 그런데 계명에 의해 죄가 살아난다고 합니다. 계명은 선한 것인데 죄는 계명이 없을 때는 죽은 듯 하다가, 사람이 계명을 알게 되면 그 사람 안에서 죄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내 안에 원래부터 있는 육신 또는 옛 사람, 곧 죄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 안에는 새 사람, 또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7장 5절을 다시 보면, 거듭난 사람이 육신에게 져서 육신에 속하면 그는 계명을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많은 죄의 욕망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내용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여기서 죄의 욕망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로 물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또한 육신 곧, 나의 옛사람은 오직 불신자처럼 죄를 짓는 것 밖에는 못합니다.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롬 7:18). 

그런데 ‘내’가 육신에 있지 않으려면, ‘내’가 율법을 지키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는 계명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죄의 정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정욕은 계명에 대해 나의 육신이 반응할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없이 ‘내’ 힘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주권과 인도하심에 맡겨짐으로 주와 연합하게 되니,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죄의 정욕이 죽고 속 사람이 힘을 얻어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더라는 것이 로마서 7장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로마서 7장은 우리의 지체와 관련한 법을 알려주는 점에서 다른 서신에 없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개역개정은 23절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빠뜨렸는데, 몸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내 지체”가 아니라 “내 몸의 지체”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교정 번역)

23절과 24절은 “내 몸의 지체”가 죄의 법 아래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언제나 내 몸의 지체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한편, 거듭난 신자의 마음은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바른 생각과 바른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과 소원이 내 몸의 지체를 다스리려고 할 때 놀랍게도 죄의 법이 가로막음으로 내 소원이 수포가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법은 로마서 7장 전체가 설명하는 죄의 활동 원칙을 말합니다. 즉, 계명을 알면 알수록 우리 속의 육신(죄성)의 욕구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죄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욕구는 신자가 패배하면 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몸의 지체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없이 살아온 육신에 의해 물들어 왔기 때문에 새로 거듭난 내 마음을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령, 술에 중독된 사람은 마음으로 술이 안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술의 맛을 본 지체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고 도리어 육신을 따라감으로 마음과 정반대의 행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혀도 그 맛을 알고, 우리 뇌도 그 맛을 알고, 우리의 온 몸의 감각도 그 맛을 압니다. 

간음 또는 간통을 하는 경우, 육신에 의해 몸의 지체들이 맛보는 쾌락은 대단합니다. 야고보서는 이를 “톤 헤도논”이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은 이 단어를 오역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톤 헤도논)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에크 톤 헤도논 휴몬 톤 스트라튜오메논 엔 토이스 멜레신 휴몬)을 직역하면 “다툼은, 너희 (몸의) 지체 안에서 다투는 너희의 (톤 헤도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정욕’이라고 번역해 놓은 (톤 헤도논)의 정확한 뜻은 죄와 연결되어 있는 사악한 기쁨을 말합니다. 악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쾌락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향락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죄를 지음으로 인한 더러운 쾌락을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죄를 지으면서 맛보는 더러운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향락은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음란과 우쭐함 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원어로 “에피쑤미아”라는 죄성을 채워줄 때 오는 더럽고 악독한 쾌락이나 추잡한 기쁨이 “헤도네이”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에피쑤미아)과 행락(헤이도네이)에 종 노릇 한 자요”(딛 3:3).
 
베드로후서 2장 13절은 “헤이도네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쾌락주의를 말할 때 영어로 ‘히도니즘’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 역시 헬라어 “헤이도네이”에서 온 것입니다. 이 헤이도네이는 신자의 몸의 지체 속에서 다툽니다. 즉, 몸의 지체가 죄의 쾌락의 맛을 알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죄악을 범하며 그 더러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 7장은 어떤 마약이나 담배, 또는 술과 게임 등의 중독 현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죄의 원칙과 우리의 몸의 지체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몸의 지체가 육신 또는 옛 사람에게 이용당하면 당할수록 우리 몸의 지체는 죄악의 쾌락을 맛보았기에 죄악을 범하는데 익숙해 진다는 것입니다. 눈과 뇌, 발, 손, 귀 등은 죄악을 맛본 후에 계속 그 죄악을 그리워합니다. 그것이 죄의 법입니다. 

사람의 몸의 지체와 관련한 것은 여러분의 눈과 귀가 가장 크고, 또한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의 시간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술에 돈을 쓰는 사람은 술에 돈을 안 쓰기기 쉽지 않습니다. 게임에 시간을 버리는 사람은 게임에 시간을 안 쓰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법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오래 물든 사람일수록, 그의 몸의 지체가 죄의 법으로 인해 새 사람의 통치를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부자연스럽고 어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몸의 지체, 곧 눈과 귀, 그리고 그와 관련한 돈과 시간을 의를 위해 쓰던 사람은 그것이 나중에 습관이 되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는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넉넉히 죄를 이기며 자유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로마서 7장에서의 마음은 거듭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듭난 마음도 ‘나’라고 불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도다”(롬 7:19-22). 

이처럼 거듭난 사람은 그의 마음으로 율법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부패한 놈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동시에 죄성이라는 부패한 그 놈이 율법의 계명을 악용하여 도리어 거듭난 마음을 방해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 이에 거듭난 마음은 죄라는 것과 옛 사람의 악랄함과 간교함과 질김과 더러움과 강퍅함과 완고함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계명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옛 사람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더더욱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율법은 거듭난 마음에게 인간이 얼마나 무섭고 악한 완고한 죄인인지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에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 이는 거듭난 마음을 위해 죄가 죄로 드러나도록 선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 및 거듭났더라도 자신 안의 육신에게 날마다 져서 육신에 속한 영적 갓난 아이들은 도리어 죄의 쾌락을 맛본 경험 때문에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게 죄악으로 달려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사건들을 볼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행위들을 보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계명을 앎으로 그들 안의 육신이 더욱 강력하게 그 세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율법과 계명을 잘 알게 되면 회개는커녕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처럼 철저한 바리새인들 및 독사의 자식들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자리에 서서 늘 거룩한 척하는 가장 위선적이고 가장 더럽고 죄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거듭난 사람은 완고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서 계명과 함께 내 속에 있는, 하나님과 계명을 대항하는 죄의 세력을 알게 되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자는 자신 속의 죄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들이거나, 또는 계명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안일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으로서 자기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 안에서의 내적 갈등을 말합니다. 바로 ‘나’는 두 세력 가운데 있음을 말합니다. 거듭난 생명과 “과거의 나”와의 갈등이 내 안에서 심한 것을 고백합니다. 
거듭난 생명과 “원래 나”와의 세력 다툼을 느낍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이 다툼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다툼이기도 합니다. 이때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그 최종 결정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을지 아니면 옛사람을 입을지의 결정은 내가 합니다. 새사람도 나고, 옛사람도 ‘나’인데 그 둘 중 선택을 해야 하는 거듭난 나는 내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인격(Person)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기까지만 말씀 드리고 멈춘다면 오늘 결론은 “우리 다 같이 선을 택하고 죄를 택하지 맙시다. 내 속에 있는 새생명을 택하고 옛생명을 따르지 맙시다”라고 외친 후 예배를 마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네, 계속적인 패배와 비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수년간 씨름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두 세력 사이의 갈등 속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바른 선택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두 세력 사이에서 대체로 완고할 정도로 불순종을 행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불순종을 행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의 지체가 심각하게 죄로 인하여 부패하였음을 말해줍니다. 즉, 이미 몸의 지체가 죄의 맛을 알고 있어서 죄에게 무너지는 것은 더욱 쉬웠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제가 얼마나 완고한지, 심지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달콤한 사탕 하나 때문에 천국을 포기할 정도로 어리석은 것도 보았습니다. 지적으로는 잘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나의 자아는 육신과 거듭난 마음 사이에서 참으로 심각한 갈등 가운데 오랫동안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가끔 순종함으로써 거듭난 존재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잠깐 베드로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 진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담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어느새 그의 죄성은 갑자기 닥친 상황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그 중 한번은 저주를 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죄성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은 거듭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죄의 욕구가 끓어오르는 것도 ‘나’이고 동시에 그 죄를 원치 않는 자아도 ‘나’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7장 19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바울은 악을 행하는 근원을 ‘죄’라고 부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그러나 육신을 택한 나이기에 죄에 대한 책임 역시 내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마치 만유인력의 법이 있는 것처럼 죄의 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법을 모르면 절대로 죄에게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게 돌을 던져도 만유인력의 법칙 때문에 반드시 그 돌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수도승처럼 도를 닦아도 죄의 법을 모르면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의 법을 모르면서 거룩을 논하는 자들에 대해 가장 위선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 이미 다룬 것처럼, 율법주의나 금욕주의, 신비주의 계통의 마귀의 가르침에 속은 자들은 결코 복음이 말하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러한 죄의 법칙을 깨닫고 있습니다. 여기에 약 10톤이 되는 바위가 있다고 합시다. 그 누구도 사람의 힘으로는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힘센 사람이던 힘이 약한 사람이던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무게일 때 결국 아무도 그 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지렛대의 원칙을 알면, 도르래를 만들어서 그 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해 자유로운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새들은 원하는 대로 날 수 있습니다. 또한 비행기의 경우 부력의 법을 이용해서 만유인력의 법을 거슬러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죄의 법을 이기는 또 다른 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깨달은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만 우리의 몸의 지체 가운데 역사하는 죄의 법을 이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입니까? 10톤의 바위를 움직이기 위해 도르래를 사용할 때, 내가 하는 일과 돌을 옮기는 일은 간접적으로 연결되면서 어떤 자연 법칙을 사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법을 이기려면 ‘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즉, 내가 직접 죄와 싸우지 않고, 생명의 성령께서 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사용하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살도록 주께 내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나를 통해 죄를 이기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다르게 묘사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골로새서 3장 5-6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땅에 있는 지체란 바로 우리 속의 육신에 노예 된 지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효력 있게 나타나려면 ‘내’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굶어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속의 육신이라는 놈을 죽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그 놈을 굶어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 내 속의 새 생명을 ‘먹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너희 생명을 성령으로 채우라. 새 사람을 입으라.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비결은 내 몸의 지체를 주관하는 육신, 곧 죄성을 굶기고 내 안의 거듭난 마음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성령을 통해 먹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성령 충만으로 이어집니다. 즉, 생명의 성령의 법을 사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령 충만의 길로서 그것은 죄를 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끝없이 나오는 생명의 성령께서 내 속사람을 강권하게 하셔서 나는 그 힘으로 나의 죄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죄를 이기겠다는 나의 결단에 의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고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내 마음, 곧 나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8장 3-4절을 읽어 봅시다. 이제 와 닿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바울이 로마서 7장 25절에서 심한 내적인 갈등 중에 성령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왜 로마서 8장은 성령에 대해서만 말씀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시는지 이해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4).
 
즉,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법칙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행사하는 내 마음에 거룩한 성령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에 ‘나’는 거룩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뿌리는 내가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이 없이 저절로 그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동원하여 죄성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멈추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며 더욱 주께 내 돈과 시간을 포함한 내 몸의 지체를 온전히 헌신하여 바침으로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몸의 지체를 주관하는 죄의 법에서 나오는 비결은 내 속의 육신을 굶어 죽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지만, 죄의 법에 충분하게 승리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몸의 지체는 각 사람마다 죄의 다스림에 익숙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 신자가 넉넉히 죄를 이기는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는 데는 각자 많은 기간과 훈련과 징계와 연구와 교제와 예배와 고독과 시련과 사랑과 위로 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비결은 오직 믿음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없이 바라보며 사랑할 때 어느새 나의 죄로 인한 연약함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생명나무를 먹기 바랍니다. 계속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던 더러운 것들이 씻겨 나갈 것이고, 또한 돌 덩어리 같이 오랫동안 굳어있던 죄 덩어리도 처음에는 꿈쩍도 없이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여도 계속 생수를 마시면 어느덧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나가더니 갑자기 생수에 확 쓸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온 마음과 영혼이 성령의 생수로 뻥 뚫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는 교만 가운데 잠들지 않는 한, 넉넉히 죄의 법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귀하고 힘있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죄와 싸우기 바랍니다.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면서 철저하게 내 속의 육신에게 아무 것도 먹이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나 죽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성령을 구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침내 죄성을 크게 이긴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끝없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끝없는 진심 어린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그 결단은 죄를 굶어 죽이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결단을 보시고 나를 주장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시면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이끄실 때 가장 확실한 현상은 평강과 거룩이며, 마침내 죄가 싫어지는 현상입니다. 죄의 쾌락은 주님과의 사랑의 기쁨에 비하면 너무나 시시하고 더럽기에 결국 구역질이 나게 됩니다.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믿음의 순종에 있습니다. 그 순종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다른 그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않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시키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순결한 동기로 가지면 그분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시사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부터의 구원은 영원한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룩함과 의로움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