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구원받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신비이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구분한다. 구원이 신비이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도 신비이다. 구원의 시작과 과정 종결이 신비이다. 필자는 칭의되는 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칭의를 인식하는 것은 곧 칭의된 후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칭의 시작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구원파적 방종주의가 있다고 비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칭의 시작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구원파로 분류하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 교회는 칭의 교리가 약하고, 교회주의가 강하다. 교회에 입교하면 교회를 충성되게 붙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구원파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구교적인 작태이다. 교권만 흔들지 않으면 방종이든 율법이든 불법이든 상관하지 않은 것이 교권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칭의가 있는가 없는가”가 신학에서 논란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칭의 시점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로마 교회는 칭의 주체를 교회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고해성사 유지). 그러나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는 칭의 주체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칼 바르트는 칭의 주체인 구속주를 ‘성령’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후예들은 칭의를 '미래'로 변경했다. 그래서 칭의 시점은 다양하다. 교회 입교를 시작으로 보는 견해는 로마 교회이고, 김세윤은 성화의 시작으로 본다. 칭의와 성화에서 "성화를 앞에 두고 칭의가 뒤에 있는 구조"가 있다. 칭의와 성화에서 “성화 뒤에 오는 칭의” 구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칭의 뒤에 오는 성화”에 대해서 제시하려고 한다. 앞에 언급한 것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칭의와 성화 토의는 무의미하다.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화를 진행하는데, 어떻게 진행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칭의 뒤에 오는 성화”가 “성화 뒤에 오는 칭의”에서 말하는 “성화”와 동일한 내용이라면 순서가 바뀐 의미가 없을 것이다. 먼저 “성화 뒤에 칭의가 오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해야 한다.

천주교는 “인간의 노력과 신의 인도로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한다. 이것을 “능동적인 수동성”이라고 정립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수덕신앙’이라도 한다. 이 구도에서도 ‘은혜’는 등장한다(천주교는 ‘은총’을 사용한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의 노력이 충만한 전적 은혜일 것이다. 그 깊을 어떻게 인간이 파악할 수 있겠는가?

개혁교회는 구원의 진행에서 인간의 공로를 부정한다. 전적 은혜(sola gratia)는 이중은혜(duplex gratia)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공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구원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믿음의 선진들은 그 일을 했고,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성화에서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라는 견해를 주장했다. 칭의 후에 바로 성화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칭의된 후에 성화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칭의와 성화를 ‘자동(automatic)’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 자동은 기계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격을 기본으로 하며, 기계적이나 결정론의 견해를 부정한다. 그래서 자동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신학은 인간 이성을 충족시킬 것을 목표하지 않는다. 신학은 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만 그 영광을 표현하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상과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영광을 위한 신학(Soli Deo gloria)이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이 이해를 충족하려거나 설득하려고 할 때 신학도는 스스로 겸손과 부정을 감지하고 정지하며, 주 하나님을 고백하며 찬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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