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74) - 에스더 (4)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 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9:22).

 

에스더서가 정경에 들어가는 배경이 무얼까? 에스더서에서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중요인물로서 베냐민의 후손들이며, 사울의 전통이 들어간다. 이는 주후 90년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 공동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회당을 중심으로 생존을 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와 다윗 왕조,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이냐는 심각한 질문을 하며, 다윗(유다지파)과 사울 전통의 통합, 이스라엘 지파의 연합을 꾀하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민족주의와 국수(國粹)주의를 강조하고 있어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빠져 있고, 여성 에스더의 이방적인 요소가 많고 외래적인 것의 타협성과 페르시아 제국의 이질적 문화는 정경에 들어가기에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이스라엘 전통의 통합과 일치를 위해 에스더서가 생존의 신학에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필요성으로 인해 정경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두루마리 성경, 에스더서

에스더서는 축제를 설명하는 기적적 이야기로서 부림절 축제에서 이미 실제 이야기가 되었고 아마도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에게 온 이야기이거나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일종의 신년 축제의의 기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에스더서는 에스더의 이름이 페르시아 말로 ‘별’(이쉬타르)로 설명되고, 모르드개는 ‘마르둑(바빌론의 주신)의 경배자’라는 뜻이 있지 않는가? 신년 축일의 운명을 읽는 것으로 제비뽑기(lots)의 의미가 있고, 부림이라는 말은 “나누기”(sharing)의 의미로서 설명되고 선물을 서로 나누어 주는 것(G. Gerleman)을 언급된다.

어떠하든 축제는 분명히 세속적인 성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친구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다.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십삼 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그러므로 촌촌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 고을에 거하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 일로 경절을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에 9:18-19). 오늘날 추수감사절, 성탄절, 망년회, 신년 맞이로 이어지는 서양 연휴(Holliday) 풍습과 시기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

이 부림절은 유다민족이 금식하므로 일이 잘 된 것을 기념한다.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의 명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을 인하여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에9:31). 구약 성경의 추수 축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레23:42)와 관련해서 절기를 지키듯이 부림절은 에스더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동기가 주어진다. 부림절이 후기에 유대교의 축제로 지켜지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민족적 생존 의지가 강조되고 중요시되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에스더는 유대교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전통의 파괴, 구약 정경의 신학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신학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신약 성경과 연계되어 고대 이스라엘 종교와 유대교, 신구약 중간시대의 유대교로의 변천과 신약 성경의 복음을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시기적 연결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부림절의 하만의 나무와 빅단과 데레스의 나무에 달린 사건은 예수 십자가의 전조를 보이며 유다 민족의 대적자로서,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대적자(모반 발견을 통한 왕의 공로자)로서 처형되는 희생자로 나타난다. 구약의 원수 보복 사상에 의하면 그들은 진멸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구원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진다(요3:16). 앞서서 언급했던 부림절과 부활절의 연계성은 신약의 구속사로 이어지는 놀라운 섭리인 것이다.

초기 유대교나 특히 기독교에서는 이 에스더서가 정경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이 많이 제기 되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정말로 그들의 유대교에 매달려서 모범적 신앙을 보이며 위험할 때도 굳게 믿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에스더서가 유대교의 우월성을 너무나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을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고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 아내 세레스가 가로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이다”(에6:13). 유대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의 우수성을 하만의 부인이 언급하며 하만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유다 민족이 멸망당하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 이 구원이 적으로부터 승리를 가짐으로서 가능해진다. 죽임을 당하려는 상황이 역전이 되어 자신들의 손으로 보복하는 것은 분명히 핍박받아오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견지에서 그러한 복수는 잘못된 것이며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나서에서 앗시리아 니느웨가 구원 받는 기사와 어떻게 이렇게 다른가!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 사용을 피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은밀히 움직이는 것이 추정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하지 않으면 구원이 다른 데에서 일어난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십계명의 제 일 계명,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절하지 않는(프로스퀴네시스, 에3:2;5:9) 거절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때(단3장)조차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경우가 아닌가? 이 근본적 신앙의 문제를 에스더서는 가르쳐 준다. 하나님 절대 신앙을 강조하며, 우상 숭배 금지 명령을 지키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종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에3:2).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 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계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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