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영원한 삶인가? 돌고 도는 굴레인가?

【편집자 주】 우리는 흔히 ‘전생에 내가 무엇이었을까?’ ‘전생에 우리는 부부였나?’ ‘다음 생에 만나자’는 등의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독교인들은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활과 그 후의 영원한 생명을 말하지만, 불교는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굴레를 말한다. 불교는 그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말한다. 이에 대해 임헌준 목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임헌준 목사 / 대전고 졸업,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호서대학교 신학과 석사 과정 졸업(Th.M),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회위탁과정 수료, 호서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사과정 졸업(Ph.D),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에서 목사 임직, 2001년부터 현재까지 예은교회 (충남 아산) 담임 / 호서대학교, KC대학교, 나사렛대학교 등 출강 / 저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크리스챤 신문사, 2001), 『아는 만큼 보인다-기독교와 불교 비교하며 살펴보기』(쿰란출판사, 2005), 『기독교의 핵심 주제』(크리스챤 신문사, 2008),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크리스챤 신문사, 2008), 『기독교와 불교』(더나은 생각,2016)

성경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 부활(復活)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불의한 자는 심판 날에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정점에 부활 영생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불경에서는 이 세계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자신의 업(행위)에 따라 지옥(地獄)에서부터 천(天)까지 여섯 세계를 윤회(輪迴)한다고 가르친다. 윤회 사상은 업보사상과 결부되어 불교 사회윤리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으며, 불교 신자들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하고 있다. 김균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김균진, 191-97.)

(1) 부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속에 숨어 있는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증명을 뜻한다. (2) 부활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하신 일이 사건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서 효력을 발생함을 뜻한다. (3)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뜻한다.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를 깨뜨렸음을 뜻한다. (4)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 곧 ‘죽음’(고전 15:26)이 극복되었다면, 죽은 자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5) 부활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실현되기 시작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실현되기 시작하며, 이리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그의 백성이 되는 현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의 대한 보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부활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성도의 부활체에 대해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활한 몸은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지만(눅 24:39), 썩어 없어지는 몸이 아니며(고전 15:42), 다시는 죽지 않는(눅 20:36) 완전히 변화된(고전 15:52) “신령한 몸”(고전 15:44)이다. 그 몸은 .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은”(고전 15:49) “영광스러운 것”(고전 15:43)이며, “강한 것”(고전 15:43)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 22:30).

그러면 성도가 언제 부활하는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부활의 때이다. 성경에서는 그 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날과 때는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6). 주의 날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벧전 3:10).

 

불교 경전에서는 업(業)과 보(報)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도 동일성을 띤다고 말한다. 즉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과보(善報)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괴로운 과보(惡報)가 따른다는 것이다.

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유 없는 행복도 없고, 이유 없는 고난도 없다. 행복한 삶은 선업(善業)의 과보이고, 고통스러운 삶은 악업(惡業)의 과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율은 현실세계의 실상에 부합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인간의 현실을 보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악한 사람이 편안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불교 경전에서는 생명있는 존재가 전세(傳世), 현세(現世), 내세(來世)의 삼세에 걸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人), 천(天)의 여섯 세계를 돌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한다는 삼세육도윤회설(三世六道輪廻說)로 풀어간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사후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도 떨어지고, 혹은 동물이나 혹은 사람으로도 태어나며,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며 끝없이 여러 세계를 돌고 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 사랑은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고 고대 인도 사상에 있던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생명의 무한성의 상징으로 파악하며, 궁극적으로는 윤회를 초월하는 열반의 세계를 목표로 한다.(마스다니 후미오, 사사끼 겐쥰, 48)

기독교의 부활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은 현생의 삶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상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부활은 일회적이며 영원한 세계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윤회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과 영생을 추구하고, 불교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해탈)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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