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샬롬! 저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는 조완호 집사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60여년의 세월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삶의 굴곡이 심해서 평범한 분들과 비교해 보면 삶의 길이가 서너 배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가족을 건져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서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1952년생, 충남 서산 출생,서울공업고등학교 졸업, 유원건설 자재부 근무, 천호텍스피아 수출업무 담당, (현) 상업용 건물 시설관리 업무

구치소 내부는 복도로 되어있고 그 복도를 따라서 한 평 남짓한 방들이 쭉 연결 되었으며 방마다 자물쇠가 항상 잠겨있다. 그리고 그 복도는 교도관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리고 교도관의 보조역할을 하는 소지라고 부르는 재소자들도 가끔씩 그 복도를 돌아다녔다. 소지들은 배식도 하고 물도 날라다 주고 영치물건도 배달해 주고 했다. 그런데 그 소지들이 모두 여호와의 증인 들이다. 그들은 병역을 거부해서 들어온 자 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후배가 한방에서 생활 한다고 들었다. 선배들 하고 함께 생활 하면서 신앙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거의 여호와의 증인들 사관학교나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구치소 내에서 질서를 잘 지키고 말썽을 안 일으키고 순종 하니까 교도관들도 그들을 믿고 소지 일을 시키며 선배는 그 후배들이 들어오면 소지로서 활동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재소자들이 방안에서 생활 하면서 이런 저런 요구를 했을 때  대부분 거절 되지만 종교서적을 넣어 주는 것은 허용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서적을 요구하면 모두 여호와의 증인 서적들 뿐 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반갑게 받았다가 즉시 던져버리고 읽지를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소한 다음 날 상표법 위반으로 들어온 사람이 하필이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서로가 인사를 하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신앙 이야기를 단호하게 거절 했더니 더 이상 신앙이야기는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 하는 일반적인 대화도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재소자들하고는 여호와의 증인은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서로가 인사하며 지냈다. 

출소 후에 교도소 내의 전도 집회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개신교 활동은 넓은 강당에 모여서 단체로 전도행사를 1회성 행사로 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여호와 증인들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은밀하고 일대일로 활동을 하면서 확실하게 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내 방에 함께 있던 한 사람은 아내 따라서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했는데 여호와의 증인하고 한나절을 대화 하고는 참 진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아내 따라 10년을 다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 했었다.  현재는 구치소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 곳에 있었던 그 시대 그 장소의 기독교 서적은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 서적뿐 이었다.   

( 출 소 )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보면 교도소를 나오면서 처음으로 하는 행동이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그 장면이 단순히 영화의 장면만은 아니었다. 나도 구치소 정문을 나서면서 하늘을 쳐다보았고 가슴을 쫙 펴고서 심호흡을 한번 했다.
12월 31일! 밖에서는 한 해를 넘기면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겠지만 구치소 감방 안에서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쓸 떼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석방될까 하면서 사건이 잘 해결 되어서 년 말 에는 풀려날 줄 알았는데 토요일의 오전 일과가 끝나고 오후가 되었을 때에 할 수 없이 감방에서 새해를 맞이하는구나 생각하고 출소를 포기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지금 까지 매년 송구영신 예배는 빠지지 않았는데 올 해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의 늦은 시간! “ 2호실 1525번 나갈 준비 하고 나오세요!”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내가 하면서 다시 확인 하고 싶었는데 옆에 있던 한 방의 식구들이 “와~~” 하면서 박수를 쳐 주면서 축하를 해 주었다. 모두가 똑 같은 마음으로 와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출소라는 소리만 나면 축하를 해 주고 있었다. 방문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가 열리고 사무실에서 세 번의 본인확인 절차가 끝난 다음에 나는 사복을 갈아입었다. 마지막 잠겼던 제일 큰 대문을 열고 완전한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운데 한 해를 마감하는 31일의 마지막 밤의 서울의 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휘황찬란했다. 
 와~~ 자유다! 
 마음속으로 외쳐 보았다. 그리고 아주 깊은 심호흡을 했다. 보통 때는 매연으로 인해서 서울의 거리가 공기가 나쁘다고 말했지만 구치소에서 재래식화장실을 사용 하든 나에게는 서울의 밤공기는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1.1평의 방 하나에 5-6 명이 생활 하는데 누구 한사람이 화장실을 다녀오면 방안에 그 냄새가 꽉 차서 한참동안 향긋했고 내 가 다녀 올 때는 옷에 냄새가 배어서 한참이 지나야 냄새가 없어졌다.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고는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집에서는 내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부를 사다가 찌개를 끓여 놓고 있었다. 식사와 목욕을 한 후에 다시 정장 옷으로 갈아입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로 갔다. 담임 목사님은 내 등짝이 아플 정도로 힘껏 내리치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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