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남 목사는 김제예본교회 담임,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모세시대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와 가나안 중간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비록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말해 줍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죽은 자들에게 안식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 가나안에 들어온 자신들에게는 안식이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할 날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이 누려야할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아주 소중한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00 여 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그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기 위해 간 곳이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이 땅은 그들의 조상들이 묻혀 있었던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제는 평안과 행복의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즐거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거룩한 땅으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이방의 땅을 밟고 다녔던 사람이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오려면 깨끗하게 씻어야 했습니다. 먼지 하나라도 묻어서 올 까봐 신과 옷을 털어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며 죄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안식을 누린다고 여겼지만 진정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위대한 교사인 칼빈은 우리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은 신실한 자들이 갈망하는 안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은 그 땅보다 더 귀한 것을 찾고 있었음에 틀림없었고 가나안 땅은 우리의 영적인 기업의 모형과 상징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중하게 여겨졌을 뿐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땅은 우리에게 영적인 기업의 모형과 상징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맛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은 평안을 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 주변 사방에 적들이 둘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안식의 책이 아닙니다. 바로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승리하였고 불순종했을 때는 패배하였다고 하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평화와 번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죽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이란 더 큰 구원을 맛보기 위해 주는 안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사는 자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온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고 주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으로 믿고 더 이상 다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견을 깨기 위해 구약의 말씀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다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참된 안식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고 배반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은 아니지만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 예수를 믿는데 그것 때문에 죽음 앞에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참된 안식을 주실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이 땅에서 더 나은 기업과 영생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9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한 구절을 통해 아주 중요한 진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안에 안식일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에 대한 날은 더 이상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래서 바르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십계명 가운데 하나만 폐지되고 아홉 계명만이 유효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안식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실 안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를 통해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까? 이제는 가나안 땅이 아닌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모형과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모형과 상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안식일에 주시는 안식은 여전히 남아 있고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은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날을 지정해서 그날만 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모든 날이 다 안식의 날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가 지난주에 하나님의 통치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날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히4장 12절의 말씀을 거의 다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안식과 연결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11절에서 안식에 들어갈 날이 날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7절에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아들의 말에 순종해야 안식을 누리며 안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 바로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하는 것은 아들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기록하는 이유는 분명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는다면 상당히 많은 구약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말씀이 상당히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이유는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기록되었고 이제는 아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 “안식할 때”라고 하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안식일 안식”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안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분문의 말씀에는 없지만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아주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분위기를 우리는 사도들이 기록한 글들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또한 주일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점차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느 한 날을 다른 날 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의 안식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렇게 믿고 따라왔습니다. 언약과 율법과 약속의 땅 가나안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께 누구하나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유대인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천사들을 존경하고 급기야는 섬기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뵙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보다 탁월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비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천사도 모세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완전한 안식할 때가 남아 있지만 이제 구약의 안식일이라고 하는 날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가능한 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주신 것 때문입니다. 누가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오직 대제사장만 가능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성소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 되지 않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죄 없는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담대히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죄인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 자신의 의와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자신의 의와 공로를 가지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의와 공로는 썩어 냄새만 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주일 오전과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도 드리면서, 매일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많이 내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신앙적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가까이 한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세리처럼 멀리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성령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은사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듣는다고 하는 자들은 더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들은 기도를 아주 긴 시간 동안 합니다. 날을 새면서 기도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데 결국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기도하였으니 결과를 얻었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우리 자신을 보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얻을 수 있습니까? 빵조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현실의 삶이 시간적 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다양한 모든 삶이 때에 해당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이때에 해당 됩니다. 직장에 나가고, 학교에 가며, 자신이 계획하는 일들, 병으로 고생하고, 고난과 힘든 삶을 사는 지금, 아니면 나름대로 일들이 잘 이루어지는 지금, 그리고 삶에 필요한 도움이 요구되어질 때 등등.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순간이 바로 때를 따라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시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께 나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여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구원의 안식도 주시고 날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이러한 축복의 모든 복을 주시는 분이 저와 여러분들의 주님이십니다.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중보자로 대제사장의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위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축복의 약속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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