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

‘일탈(逸脫)’에 대한 정의 사전 의미는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거나 빗나간 상태를 말한다. 사회 일탈은 사회의 일반 규범에서 벗어난 행위이다. 일반 규범체계에서 벗어난 사람은 일탈행위자로 범죄자로 낙인할 수 있다. 일탈행위가 법이나 규범을 어겼을 경우 그는 범죄자로 규정하여 규정된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일탈을 규정하는 사회 기준이 시대에 따라서 계속 변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회의 합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더 빠르게 유동하며 상대화시켰다. 그럼에도 거대 담론이 일탈을 규정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갖고 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한다. 사회 가치가 변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데, 기독교 근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일반화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사회에서 일탈된 존재가 되고, 범법자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이 기독교가 사회 일탈의 존재로 규정될 위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종교다원주의, 동성애 등 가치가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사회의 일상으로 정착하면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일탈을 가르치고 주장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은 꾸준하게 증가하는 실정이기도 하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유럽에서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모슬렘이 증가하는 것은 일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유럽에서는 더 다른 일탈들 즉 예를들면 수간(獸姦) 같은 것이 정상으로 오르려고 한다. 성소수자도 LGBT에서 더 다양한 유형인 LGBTAIQ 추가되고 있다. 성소수자가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가 되면 우리 사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

기독교가 사회의 부정적인 일탈 집단으로 규정되려는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성경의 가르침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필자는 좋은 예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를 말하고 싶다. 사회는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경건한 삶과 학문 실력을 키워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인들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진출했다. 비록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외면되는 상황일지라도 크리스천들이 경건한 삶과 학문 실력을 키워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직업을 주셨다고 믿는 크리스천이다.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음과 좋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노동과 다산(多産)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그런데 노동과 다산을 거부하는 것이 사회의 일상이다. 노동과 다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일탈된 기독교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포비아(phobia)가 아니라 삶에서 적극적으로 전력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지향한다. 기독교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교회를 세운다. 그럼에도 율법을 사랑하고 세운다. 세상을 부인하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세움에 전력한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이단들이 기존 교회를 비판학고 자기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드어낸 용어이다. 그래서 우선 이런 상황에서는 성도들이나 신학생들부터 용어선택을 올바로 해야할 것이다. 빛은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아도 그 존재자체가 빛이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소금 자체가 짜다. 기독교인은 스스로의 신앙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가치들에게 유린당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세상이 일탈로 간다고 해서 염려할 것이 없다. 주님의 길은 본디 고난의 길이요 좁은 길이다. 다만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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