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17 강) 다니엘 4:1-9

1. 다니엘 4장은 3장 끝과 연결된 시간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1-3절과 4절 연결에 대해서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칼빈은 4장으로 분류한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2. 다니엘 2장부터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이 난맥이다. 칼빈은 느부갓네살이 발언한 모든 하나님 찬양을 임시적인 상태로 규정한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미신(superstitions)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순간적인(momentary) 하나님의 지식은 믿음으로 정착하지 못한다. 악인이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 순간의 지식이 악을 치료하지 못한다. 순간의 빛으로 눈이 멀어서 더 사악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다스리는 독특한 방식이다. 느부갓네살은 수 없이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회개로 나가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이 회개하지 않음은 결코 징계에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받을 심판은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모든 유기된 자들에게 해당한다. 느부갓네살처럼 기적과 선지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는 항상 옆에 있다(눅 16장).

3.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의 언어로 조서를 내렸다(1절). 바벨론은 나라와 다른 언어가 함께하는 제국이었다. 다른 언어, 다른 민족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정복자의 탐욕에 의한 것이다. 제국은 바벨론에서 시작해서 완성은 로마에서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의 조서에는 바벨론의 웅장함과 강력을 뽐내는 정복자의 교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2절). 정복자의 교만과 높으신 하나님의 찬양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교만한 정복자가 조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2-3절).

4. 칼빈은 느부갓네살의 조서에 성령의 증거를 제시했다. 성령의 증거라면 개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진정한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관한다. 칼빈은 도나투스파나 카스텔리옹은 이 부분에서 개종했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도나투스파는 불경건한 행동으로 순수 교리를 파괴하고 부패시켰고 제시했다. 카스텔리옹은 도나투스파와 유사하게 외식적인 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방향을 빗나가게 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의 조서를 성령의 증표로 칭송했다. 성령의 사역을 왜곡하여 주장하는 사람은 전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자기 자신만 망할 뿐 아니라 교회의 예배를 훼손하고 믿음의 일치를 파괴하며 평화를 파괴한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두 번, 세 번 기회를 주셨지만 개종하지 않은 것처럼, 이단 교설을 퍼뜨리는 자들은 두 번, 세 번의 기회 속에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과 이단자들의 공통점은 교만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빛은 교만을 더욱 촉진시키는 징벌일 수도 있다.

5. 그럼에도 느부갓네살의 조서의 내용은 감동이 있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절). 느부갓네살이 언급한 “크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참 지식에 대해서 의견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도 그런 칭송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최고신을 인정하는 것이 참 하나님 지식은 아니다. 필자는 만물에서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그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했다는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높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예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부족한 지식이다.

6. 느부갓네살은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절)고 고백했다. 그의 영원한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느부갓네살은 부지중에 고백한 것이지만 그렇다. 당나귀가 발람에게 말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민 21장). 발람이 예언한 것이 진심이 아니지만 발람의 축복이 유효한 것처럼, 느부갓네살의 조서(詔書)는 영적으로 임시적인 효력이지만, 세속적인 법(法)으로는 유효하다.

7. 느부갓네살은 큰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설명한다(4-6절). 바벨론의 유일자인 느부갓네살이 인식한 큰 하나님은 자기가 정복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자기를 느부갓네살에 보이셨고, 모든 바벨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조서를 반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바벨론은 하나님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8. 느부갓네살은 꿈을 만나기 전에는 평안했다고 술회했다(4절). 느부갓네살은 꿈을 만나기 전에는 평안했다고 인지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평안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믿음에 들어갈 때에는 번민과 갈등이 심하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으로 번민했지만 교만과 불신을 유지했고, 그리스도인은 번민과 갈등에서 믿음이 성장한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잊어버린 꿈까지 찾아내고 꿈을 해석한 다니엘의 하나님을 만났으면서도 개종하지 않았다. 이 일은 세계 제일의 바벨론에서 해결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학자는 구주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죽은 스티븐 킹도 우주의 신비를 탐구했지만 빅뱅(big bang)에 빠져서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은 끊임없이 박사와 술객들을 의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다니엘 외에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다. 오순절 이후에 복음은 모든 비밀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신자는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을 받아 구원의 도리를 명확하게 안다. 그렇기 때문에 힘있게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해야 한다. 지금도 세상에서 탁월한 박사들은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곤란한 처지를 만나면 느부갓네살과 동일한 패턴을 반복할 뿐이다. 진정한 평안은 오직 주의 말씀, 복음에 있다. 진정한 평안을 선물한 그리스도인이 예수 이름을 전도해야 한다.

9. 느부갓네살이 세상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미천한 포로인 벨드사살에게 의뢰해야 했다. 벨드사살은 자기들이 정복의 상징으로 이름을 바꾼 노예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징계하신 것이지 버리시지 않은 것이며, 예레미야에게 주신 70년 뒤에 회복하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요구에 다니엘, 벨드사살은 왕에게 모략을 펼쳤다. 위대한 정복자가 포로 중 한 사람에게 간청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한 사람의 포로에게 간청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 알 수 있다.

10.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놀라운 모습을 볼 때 찬양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불경건한 자의 입을 열어 찬양케하셨나이다. 그의 무지한 패역한 입술에서 나온 영원한 주의 나라를 고백함을 믿나이다. 서기관이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한다며 주를 반대한 진술도 믿나이다. 주의 진리의 심오함은 원수의 훼방으로 진리를 이루심이니이다. 오직 주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시니,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를 하나님을 담대하게 믿나이다. 또한 주의 나라가 영원함을 믿나이다.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주께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함께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주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18 강) 다니엘 4:9-18

1.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박수장 벧드사살”이라고 불렀다(9절). 벨드사살은 바벨론에서 사용할 공식 이름이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게 억압받는 상태였지만, 박수에서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느부갓네살은 수장이 아닌 하급들에게 물었고, 최후 수단으로 다니엘을 불렀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어쩔 수 없이 최고 자리를 주었지만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다니엘을 벨드사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시련이고 모욕으로 선지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 제시했다. 하나님의 종들은 십자가를 지는 일을 피할 수 없다.

2.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안에 신들이 있다고 말했다(9절). 불신자들은 신(神)이 많을수록 강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 신은 많은 신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개종했다고 보기 어렵다. 혹자는 신들을 단수로 번역하면서 개종했다고 억측하기도 한다. 느부갓네살은 참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보다, 오직 자기의 번민을 해결함에 중점하고 있다. 하나님은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종이나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은 신을 만들거나 소유해서 자기의 목적대로 운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신들을 두어서 더 용이하게 운용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이지, 자녀의 민원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과 같다(마6:31-32). 이방인은 오랜 시간을 구해야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하며 중언부언한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자기 요구를 해결하는 방편이다.

3.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을 제시한다(10-16절). 느부갓네살은 본 환상은 높은 나무를 보았다(10절). 느부갓네살은 높은 나무를 본 것이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높고 풍성한 나무가 자기의 상태와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부분에서 무정부상태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시했다(Hence I have said, tyranny is better than anarchy, and more easily borne, because where there is no supreme governor there is none to preside and keep the rest in check). 칼빈의 제네바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인 재세례파들이 활동했다. 칼빈은 1536년 7월부터 개혁운동을 시작하면서, 제네바에 거주하며 활동한 후터파의 예루살렘 원교회 재산 공유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야 했다. 칼빈은 재세례파가 주장한 재산 공유제도를 거부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집사를 파견해서 살피며 돕도록 구도화했다. 독재가인 느부갓네살의 독단 정치는 다니엘 등 포로들을 억압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왕을 제거하는 무정부 상태로 돌입시키는 것은 더 위험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합리적인 통치 기구를 두어 인간을 다스리신다. 독재자는 이 땅에서 없어야 유익하지만, 독재자를 만났을 때에는 부역하지 말고 자기 영역에서 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제언한다. 하나님의 은밀한 통치는 독재자 손길에서 생명을 보존할 종들이 필요하다. 다니엘은 독재자의 손길에서 효과적으로 포로된 유다 백성들을 지켰다.

4. 느부갓네살은 하늘에 닿은 나무를 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당시 랍비들이 예루살렘을 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평가했다. 제롬, 오리겐 등도 땅의 중심을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했다. ‘옴파로스(Ompharos․그리스어로 배꼽)’를 탐구하는 것이 지성의 기본이다. 견유학파들은 땅의 중심을 자기가 선 곳으로 주장했다. 땅의 중심에 선 사람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서야 한다. 그런데 땅의 중심에 설 때 일반 사람은 교만하게 된다. 지금 땅의 중심은 도시인데, 도시의 특징은 교만이다. 땅의 중심을 논하거나 규정하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5. 느부갓네살은 나무에 새와 깃들이고 짐승들이 모여드는 것을 왕의 통치로 생각했다(13절). 그런데 그 나무가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13절)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다(14절). 그리고 짐승과 새들이 흩어지고, 그루터기만 남겨두게 되었다(15절).

느부갓네살은 땅에서 나온 정복자가 나무를 벤다면 코웃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가 나무를 베어버리자 당황했고,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움에 쌓였다. 그래서 바벨론의 박사들을 소환해서 꿈을 알려주며 해석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이 해석하지 못했다. 앞에서 알려주면 해석하겠다고 장담했는데, 정작 꿈을 알려주어도 해석하지 못했다. 느부갓네살처럼 어렴풋이 파악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어전에서 명료하지 않은 지식을 발언할 수 없었다. 느부갓네살도 큰 나무는 자기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는데, 그 나무가 베어짐과 일곱 때의 기간(16절)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6.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주신 것은 마지막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기한이 찬 뒤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며 자기 낮추심을 찬양했다(단 4:34-37).

7.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악인의 형통함과 압제자가 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예정은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의 지식은 이해가 되지 않을수록 믿음을 더하나이다. 깊은 믿음에 지혜를 더하셔서 담대히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 땅의 강포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시고, 믿는 자들이 오직 주 하나님을 믿고 정진함으로 하나님의 전능과 엄위를 보일 수 있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형설청람(螢雪靑藍), ex fide in fi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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