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요소는 자신의 전 인격과 진리에 대한 생명을 거는 것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 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본국제신학교학장, (재)본월드미션 이사, 저서: 주기도문연구, 제자세우기40일 영적순례, 충성된일꾼되기 등

[언어의 차이]

현실인식에 대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언어와 지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성인들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면서 불안과 위기와 절망의 단어들을 쏟아 놓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 쳐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 실패가 아니라 번영”(렘29:11; 수1:1-9)을 주고자 한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며 생각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시원하게 홍해를 가르시기 원한다. 견고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삶에 불안이 아니라 혼돈이 아니라 위기에서 기적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뜻이다. 주님이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떤 말을 쏟아놓으며 살고 있는가? 말이 나의 믿음과 영적 현주소가 될 수 있다.

[왜, 말이 중요한가]

성경이 제시해준 탁월한 해법이 있다. 위기가 기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의 변화가 중요하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을 주셨다.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권세가 있다. 말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기적을 파괴하기도 한다.

(2)말의 권세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요1:12).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의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의 길이다.

 (3)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를 걸었던 것처럼 나도 주님을 보며 기적을 행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기적이 필요하다. 누구나 크고 작은 위기의 삶을 살고 있다. 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에게는 그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누구로 부터 오는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온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걸을 수 있다. 이런 믿음 있으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샬롬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4)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7-28).

(5)말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말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통로가 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요1:1). 말씀은 성경의 원어를 보면 ‘logos, 로고스’이다. 영어 성경엔 ‘word'이다. 이것은 ‘말’, ‘단어’, ‘언어’로 번역한다. 말씀 대신에 말이란 단어를 집어 넣고 읽으면 그 의미가 좀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태초에 말씀(말)이 계시니라. 이 말씀(말)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말)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말에는 신의 권세가 있다.

[무화과 저주 사건]

주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향해서 저주하신 것이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나무가 뿌리째 말랐다(막11:20,21). 여기서 던져주는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말은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농작물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인간의 신체 조직까지도 지배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양한 말의 위력에 대한 연구들이 참으로 많다.

(1)신경의학계에서 뇌속의 언어중추신경이 모든 신경계를 지배한다는 학설을 발표했다.

(2)대체의학이 의학의 한 부류로 정착해가고 있다. 환자에게 하루에 2-3차례 10분 정도 언어치료법을 시행하면 놀랍게 치유가 일어난다고 한다.

(3)당뇨병 환자라면 ‘나의 혈당치는 정상이 되고 있다’라고 반복해서 10분 정도 말하면 혈당이 줄고 어떤 사람은 고침을 받았다고 한다.

(4)예수님도 한센병자와 앉은뱅이와 죽은아이도, 등 모든 병자를 말로 고치셨다.

말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비밀이 있고, 말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위대한 권세가 있다. 이 사실을 믿는가? 누구나 ‘말’을 통해 경험된 지혜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분들은 긍정적인 말을 통해서 질병을 치료받고, 좋은 말과 노래를 통해 식물을 재배하고, 젖소를 키우는 목장에서는 젖을 짜고 먹이를 줄 때 노래를 틀어준다. 그러면 좋은 우유를 평상시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통계를 가지고 있기에 농가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다(막11:13). 무화과 저주 사건은 제자들에게 열매맺는 사역을 요구하신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는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사건을 만들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주목해야할 단어들이 있다.

(1)“하나님을 믿으라”(22절). 당신은 하나님의 말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은혜중에 가장 큰 은혜요 선물이다. 이것처럼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절대적인 경전이라는 사실을 믿어지는 것이 큰 복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성경도 중요한데 이것말고 다른 부가적인 것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막11:23). 진실이란 단어는 강조형이다. 또한 중요한 단어는 ‘누구든지’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3)“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의심은 기적의 불씨를 꺼뜨리는 주범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믿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일하신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가?

(4)무화과 저주 사건의 결론이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무화과 저주 사건을 만드신 주님의 의도는 오직 하나였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대로 되리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을 가르쳐주었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단순해서 무식해보이기에 오늘날 배부른 성도들은 잘 믿지 않는다. 머리에 현대지식으로 가득채워진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말처럼 들린다.

성경은 간결하고 절대적인 말의 풍성한 잔치이다. 말이 곧 기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베드로가 성전앞에서 말씀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나온다. 베드로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그대로 선포했더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찬미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 하나님은 하루에 한번씩 6주일 동안 성을 돌도록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7일에는 7바퀴를 돌고 외치라고 하셨다. 7일간 성을 돌면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하셨다(수6:10).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불신이다. 어떤 한 사람이 거대한 성을 돈다고 무너집니까? 지도자 여호수아와 하나님을 향해서 한 마디 하게되면 순식간에 불신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게 된다. 그러면 공동체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큰 내홍에 휩싸이게 된다. 불신의 말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꺾어버리는 요인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또 있다. 원망 불평이다. 원망과 불평은 말의 권세를 꺾어 버리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민14:1-3).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40년간 돌아야 했는가?(민14:11-12, 27). 그 이유는 하늘을 찌르는 불평과 불만이 공동체를 병들게 했고, 한순간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와해시켰다.

불신과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나를 원망하는 자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였고, 그들을 쳐서 멸하겠다고 말씀 하셨다. 불신과 원망과 불평의 말은 기적을 꺾어버리고, 말의 권세를 꺾어버리는 주범이다. 언어를 잘 관리하라.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임을 명심하라.

우리는 한국교회를 걱정한다. 그런데 그 걱정이 오히려 “초가삼간”을 태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교각살우(矯角殺牛)란 말이 있다. “소의 뿔 모양을 바로 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큰 걱정거리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니다. 사회도 교회도 잘못된 것들은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비판은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독교 언론의 각성이 필요하다. 대안 없이 무심코 집어 던지는 글 하나가 한국교회를 파괴할 수 도 있다. 또한 인터넷에서 떠도는 흔한 기독교 폄하 소리를 무분별하게 거르지 않고 퍼 나르는 행위도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검증도 안된 이야기들, 기사의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을 마치 기독교의 전부인것처럼 한국 기독교를 매도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들이 퍼 나르는 수많은 비판들이 결국에는 교회 무용론으로, 목사 무용론으로, 직분 무용론으로, 선교무용론으로, 전도 무용론으로 독버섯 처럼 자라게 된다.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글이 있고, 공동체를 오히려 파괴하고 병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시대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경에는 우리가 사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믿음이란 요소는 자신의 전 인격과 진리에 대한 생명을 거는 것이다. 단순하게 믿음이란 복 받는 도구만을 생각한다면 믿음이란 단어를 너무 실용적으로 천박하게 잘못 이해 한 것이다. 믿음이란 단어는 통전적인 단어이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이 더욱 필요한 시대임을 우리는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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