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19 강) 다니엘 4:17-24 

1.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제시했다(17절). 그리고 느부갓네살에게 세움과 무너짐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꿈임을 알렸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순찰자들의 명령’은 ‘천사의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며, 천사들이 전한 명령의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영예를 갖는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복하는 기능인데 반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인격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 전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과 의도가 손상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고 왜곡하는 것이 되었고, 선한 천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받아 인격적으로 수용해서 전달해서 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

2. 다니엘은 하나님의 순찰자의 명령을 왕이 거약하지 못하도록 권면한다(17절). 느부갓네살이 강퍅해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럼에도 신성모독이 일상인 반역자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지되면 더욱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한 모습은 출애굽 당시에 바로가 그랬다. 모든 핑개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반역했다.

3. 다니엘은 천사의 포고를 느부갓네살에게 전달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17절)이다. 모슬렘이 즐겨 외는 인샬라(Inshallah)와 같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인샬라를 외치는 모슬렘보다 더 평안과 자유가 있어야 한다. 모슬렘의 인샬라는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를 아는 것을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신비이다(he will and sets over it the lowliest of men, ESV).

4. 하나님은 자기를 아는 지식을 지극히 낮은 자에게도 주신다(17절). 하나님의 공의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 주심에는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시간과 기회는 동일하다.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는 물질과 기능이 불공평한 것에 대해서 불평이 없다. 그래서 낮은 자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다(고전 1:26-31).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직접 굴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의 자유와 기쁨으로 교만을 꺾으신다. 느부갓네살은 정복자로서 포로에게 자기 운명 여탈을 문의하고 있다. 가산(家産)을 모두 잃은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했다. 지극히 낮은 사람을 기쁘게 여기시며 자기를 알리시는 주 하나님의 능력은 연약한 자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5. 느부갓네살은 벨드사살(다니엘)에게 꿈을 해석하도록 명령했다(18절). 바벨론의 박사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했고, 다니엘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고 현상과 원인을 설명했다. 바벨론의 박사들이 풀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섭리 때문이다. 다니엘은 이미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해석할 능력을 보여준 경험이 있다. 다니엘의 학문은 세상에서 습득한 지식이 아니라, 신들에게 비롯된 지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안에 신들(gods)이 있다고 제시했다. 다니엘의 하나님을 유일하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참고 단 4:8).

6.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정신 상태를 그대로 표현했다(19절). 전혀 왕 같지 않은 태도이다.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언급한 것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세계 제일의 강자도 한 밤에 꾼 꿈으로 어안이 벙벙하고 마음이 번민한 상태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상황을 이끌어 가는 힘이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당황한 상태의 마음을 다니엘의 해석으로 평안을 주셨다. 원수의 마음에 번민이 있으면 좋을 것인데, 이웃의 아픔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7. 느부갓네살은 벨드사살(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정확하게 드러내길 촉구했다. 다니엘은 꿈의 내용이 느부갓네살의 신변에 일어날 위기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강력한 독재자라도 막을 수 없다. 그 일을 느부갓네살에게 보여주었고, 그 일을 다니엘이 알도록 했다. 느부갓네살은 정중하게 다니엘에게 요구했고, 다니엘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8. 칼빈은 여기에서 다니엘이 중용의 길(middle course, via media)을 유지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칼빈의 신학을 중도적 자세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다. 복음의 사역자가 중도의 길을 취해야 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에서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느부갓네살에게도 충성했다(엡 6:5-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공의와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이 공존했고,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느부갓네살의 심판과 자기 왕에 대한 충성이 교차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왕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무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시대에는 성도들의 평안을 위해서 어떤 분야에 설교가 들어가지 못하는 금기 영역이 생기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 제시가 혐오적 표현이라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세상)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셨다(마 6:24). 이 표현이 일방적인 태도가 아니라 중용의 길인 것이다.

9.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했다(20-22절).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나무는 느부갓네살 자신이었다(22절). 느부갓네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무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했을 것이다.

10. 다니엘은 그 나무가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를 제시했다(23절). 그리고 일곱때를 지날 것이다(23절). 일곱 때는 7년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7은 7년보다는 완전한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11.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선언하셨나이다. 우리가 주님의 인내를 무시하지 않고 게으름에서 주의 진노의 자리에 서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자중하며 주의 뜻을 받들며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믿음의 주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20 강) 다니엘 4:25-27

1.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왕좌에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들에서 일곱 때를 지낼 것으로 해석했다(25절). 반역을 보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꿈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꿈의 해석으로 반역에 대해서 고지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충신인데, 왕의 특성 상 충신을 좋아하는 왕은 없다. 왕은 간신(奸臣)을 좋아하고 옆에 둔다. 그러나 충신은 충직을 보고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충성된 보고가 관철될 수 있기까지 의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해석하는 것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우선한다. 중도의 길에서 취하는 기본 자세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이단 세력이 개입된 정황이 발각되면, 모든 논쟁을 종식하고 이단을 먼저 정리한 뒤에 갈등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단과 야합하거나 이용하는 행동은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있겠지만 가장 악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 반대한 세력이 있었는데, 첫째 정치적 반대 세력이고 둘째 리베르틴파들(Libertines, 자유파, 방종파)이었고 셋째 칼빈의 신학을 거부하는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1553년 세르베투스가 칼빈을 대적할 때 칼빈의 반대파들은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서 화형되었고 칼빈의 대적자들은 모두 침묵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1541년에 아미 페렝(Ami Perrin)과 그의 장인 프랑소와 파브르(Francois Favre)이 주도하면서 칼빈을 청빙했는데, 1546년부터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반대했다. 방종파는 율법폐기론자이고 아나키스트적(anarchism, 무정부주의자, anarchist)인 경향이 있었다.

2.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권면했다(25절). 이 땅에서 지극히 높은 느부갓네살이 하늘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땅에서 낮고 천한 사람의 교만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산다. 죄를 범한 이후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특별한 영역이 되었다. 낮고 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높고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믿음을 갖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에서 믿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길 뿐이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결국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전달에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눅 16:19-31).

3. 다니엘은 그루터기가 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깨달으면 왕으로 다시 회복될 것을 제시했다(26절).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것은 27절에서 제시한다. 천하의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느부갓네살은 교만의 상징의 정복자이다. 그 정복자에게 하나님께서 공의, 긍휼을 원하셨다(27절). 정복자의 말이 법이고 공의일 것이다. 그러나 만유의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공의의 하나님은 법에 종속되는 겸손의 표현이다. 그런데 공의를 행함에서 죄를 징벌이 아니라 죄를 속하라고 제시하고 있다(27절). 칼빈은 속함을 죄에서 분리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영역(英譯)은 죄를 돌이킴, 중지, 깨뜨림 등으로 번역했다.

4.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자기 간(諫, advice, counsel)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요구했다(27절). let my counsel be acceptable unto thee(Geneva) ※ 개역개정에서 ‘간(諫)’을 ‘아뢰는 것’으로 바꾸었다. 국어사전에 ‘간하다’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한글로 맛을 보다, 간(奸), 간(諫)이다. ‘간하다’는 부당한 어휘는 아니고 사용이 빈번하지 않은 표현이다. 필자는 고어(古語) 보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경 어휘에 많은 고어들이 있는데, 그것이 현대화되는 것도 좋지만 고어 자체로 보존되는 것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청(懇請), 간구(懇求), 간신(奸臣), 간부(奸婦), 간부(幹部) 명료한 어휘 습득을 위해서 한자 공부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의사소통에 한글이 매우 적절하지만 학문(사상) 정립을 위해서는 한자 어휘를 빼고 진행하기 어렵다. 어휘가 많을수록 좋은 학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칼빈은 이 부분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신하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이 때는 신하의 위치가 아닌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어야 할 느부갓네살에게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예루살렘에서 예레미야의 권면을 유다와 시드기야가 듣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의 정복자 느부갓네살은 포로된 다니엘의 묵시를 경청하며 순종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유대인들의 반역이 심각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의 묵시에 순종하는데, 포로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고집을 끝까지 꺽지 않았다. 포로에서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체류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탈무드(위대한 연구)를 제작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왜곡했다. “탈무드(히브리어: תלמוד, 영어: Talmud)는 모세가 전하였다는 또 다른 율법. 구전하는 율법을 담은 문서집인 미슈나(Mishnah)와 게마라(Gemara)을 병칭하는 용어로서 전 육부 육십삼 편으로 구성되었다.”(위키백과) 탈무드는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 두 종류가 있는데, 예루살렘 탈무드는 팔레스타인에 살던 학자들이 200여년에 걸쳐 연구한 것을 집대성하여 AD 400년경에 발간한 책을 말한다. 그리고 바벨론 탈무드는 바벨론에 살던 학자들이 AD 470년경에 발간한 책을 말한다. 예루살렘 탈무드가 바벨론 탈무드 보다 100년 정도 앞서 발간되었으나 바벨론 탈무드가 더 권위있는 이유는 바벨론에 더 유능한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벨론 탈무드는 6부 63편 525장에 5,894쪽의 분량이다. 6부는 씨앗(Zeraim), 절기(Moed), 여성(Nashim), 손해(Nezikin), 성물 (Kodashim), 정결(Teharoth)으로 구성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 전권을 모두 암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탈무드에서 카발라(Kabbala)의 경전 조하르(Zohar, 빛을 뿜음), 미아모니데스의 <미슈네 토라> 등이 유래했다.

6. 칼빈 당시에 신비주의는 방종파들이 있었는데, 21세기에 신비주의는 일상이고 삶의 체계가 되었다. 신비주의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기 때문에 깨뜨릴 수가 없다. 신비를 왜곡한 신비 운동이다.

7. 칼빈은 회개를 인간이 개종하고, 멀리했던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이다(Coram Deo). 개종은 단지 손과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 and mind)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참회(懺悔)는 마음에서 시작해서 손과 발과 혀로 나온다. 죄에서 떠나는 것이 현명한 것인데, 이것은 자기 합리화가 된 어리석은 확신에서 떠나야 한다(self-denied). If inquiry is made concerning the nature of repentance, it is the conversion of man towards God, from whom he had been alienated. Is this conversion then only in the hands, and feet, and tongue. Does it not rather begin in the mind and the heart, and then pass on to outward works? Hence true penitence has its source in the mind of men, so that he who wished to be wise must set aside his own prudence, and put away his foolish confidence in his own reason.

8, 죄를 속함이 공의를 행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은혜나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선지자의 말을 곡해하는 것이다. 칼빈은 느부갓네살에게 변화를 촉구했던 것을 당시로 제시했다. 그리고 교황주의자들이 겉으로는 성스러운 종교 생활을 하지만 성상세움, 금식, 말씀에 없는 것을 강조함 등이 진정한 변화가 아님을 제시했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상상으로 제작해서 인간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공의가 아닌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거부했다. 느부갓네살이 비록 정복자이지만 공의를 행하면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대하며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속이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다. 정복자의 교범은 16세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속임의 당위성도 제시했다.

9. 의란 무엇일까? 칼빈은 의를 믿음과 성실성을 장려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칼빈은 생활을 둘째 돌판으로, 예배를 첫째 돌판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공의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더 귀하다고 제시했다. 위선자들은 예배를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이웃에게 율법의 명목으로 잔인하게 약탈하고 비행을 저질렀다. 인류의 잘못을 치료할 약은 지금의 비참함을 정복자가 인지해야 한다. 정복자나 피정복자나 잘못을 치료할 생각은 없고 오직 세상의 평안과 즐거움을 위해서 협력하고 있다.

10.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이 본문을 왜곡한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서임권 논쟁, 주재권 논쟁일 것이다. 선지자가 느부갓네살을 권면하고 통제하는 모습이 통쾌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속죄의 권한을 가졌다고 성경적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 오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나중에서는 성경해석 근거는 사라지고 전통으로 정착시켜 수정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학문의 근본은 원천을 탐구해서 바른 가르침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1.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간(諫)을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을 준비했고 7년의 때를 훈련(訓練)했다. 마침내 왕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고, 이미 약속된 용서를 받을 정도로 적합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면 선지자의 사역이 성취된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과 느부갓네살의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파괴한 것에 대한 징벌(?)을 받으며, 또한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보존하는 섭리를 보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물며 거룩한 성을 파괴한 느부갓네살에게도 회개를 요구하며 의를 요구하신다.

12.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힘든 세상 속에서도 주의 심판이 수행되고 있음을 보나이다. 누구도 주의 진노의 법정을 피할 수 없으며, 그 진노에서 긍휼을 베푸심을 바라보나이다. 우리가 진노 중에 주의 독생자의 중보의 은혜로 반역을 포기하고 주께로 나가나이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육의 욕망이 있어 동시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를 구하나이다. 참된 회개에 참된 열매가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한 주의 피의 효력을 믿나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산제물로 예배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형설청람(螢雪靑藍), ex fide in fi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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