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저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라

구원받은 백성은 두 나라 시민권자로 산다. 땅의 시민권자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이다.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 시민으로 사는 방법이 있다. 추월의 삶을 버리고 초월의 삶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 경쟁사회에서 추월이란 속도의 계기판에 너무 익숙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세워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누가복음 18장에 오늘날 누구나 인정할만한  청년이 나온다. 돈이 신이 되는 암몬사회에서 청년은 큰 부자이며, 안정된 일터인 공무원이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인생의 대로가 열린 다 갖춘 젊은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조건을 완벽하게 지닌 청년이 영생을 얻고자 주님을 찾아왔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등

교회에서 칭찬받는 멋진 청년이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며, 여성들과 어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한 종교인으로 성실하게 살았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청년은 다 갖추었지만,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갈등이 있었다. 청년은 추월적인 것으로만 내면의 공허감과 불안감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초월적인, 무엇인가 내 마음의 고향의 본질을 가득 채 울 수 있는, 그 너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영생이다.

영생이란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정도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영생이란 단어를 알 정도라면 그는 분명히 종교적인 깊이가 있는 청년이었을 것이고, 왜냐하면, 세상것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생이란 단어를 이해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관원이며 청년이 상당한 수준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던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된다.

주님은 청년에게 십계명중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다 지켰냐고 물었다. 그는 주님께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눅18:21).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어려서부터 다 지킨 빈틈이 없는 반듯한 청년이고, 성실한 청년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성품을 지닌 훌륭한 청년이다.

 

●초월적인 시민으로 사는 방식 제시: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생각에는 더 이상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신앙인으로 생각했는데, 주님은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을 내려놓으라고했다. 물질을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예비되었고, 그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주님은 왜 물질을 버리라고 강요하셨는가? 내면의 가치를 정리해주는 것이다. 가치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숨겨진 본질이다. 결국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은 가치로 정해지게 된다. 하늘의 보물인 영생을 선물로 얻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내 인생의 첫 번째 자리에 영원히 둘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주님은 청년에게 추월적인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덤으로 영생인 보물을 얻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생의 첫 번째에 누구를 주인으로 놓을 것인가? 내 인생의 주어를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이 청년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청년은 추월적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완벽하지만 하늘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자신의 내면의 가치와 제자의 정신과는 아주 큰 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청년은 돈이 많아 결국에는 천국의 보물을 포기하고 근심하고 돌아갔다. 추월적인 삶과 초월적인 삶 사이에는 백지 한 장의 진리로 가려져있다. 그러나 그 백지 한 장의 가치는 추월을 초월로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네게 부족한 '한'가지

주님을 사랑하는 무리들은 날마다 천국의 보물을 얻기 위해 “한” 가지 내려놓지 못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던져버려야 진정한 천국을 얻는다. 버리고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제자가 되고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 버리지 아니하면 반쪽자리 고민하는 제자로 전락한다.

지금까지 추월적인 삶을 선택했다면, 천국의 보물을 얻고 부요함을 누리기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초월적인 삶을 살라고 한다. 이것이 주님의 정신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영생을 얻는 길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아야한다. 주님은 이 훌륭한 젊은 공무원에게 완전한 헌신을 요구 하신다. 99%가 아니라 100%의 헌신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익숙한 신앙의 불순물이 있다면 적당주의이다. 적당하게라는 말을 신앙의 균형감각과 우아함으로 여기는 풍토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적당주의는 신앙을 타락으로 이끄는 요소이다. 적당하게 하는 헌신과 순종은 오히려 자신의 삶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적당주의는 곧 타락이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교만이며 불신앙이다. 이것이 주님의 관점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의 삶에 묻어있는 지적 우월감이 결국에는 신앙의 혼합주의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 오직 성경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인식이 더 많다. 성경은 온전한 통합적 생명관으로 이끄는 계시이며 진리의 말씀이다.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인도하는 충만의 역사가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보다 인간의 지적 산물인 개인의 저작물이 더 우월하게 포장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기는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날마다 나의 저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봐야 한다. 다른 분들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 낫다고 생각해서 나는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것에 만족하지 마라. 그러면 성장이 멈추어버린다. 비교해서 괜찮다고 하면, 어쩌면 이 안일함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기 쉽다. 항상 나의 저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아야 한다.

바벨론은 느브갓네살이 세운 나라이다. 느브갓네살의 아들이 벨사살 왕이다. 왕이 되자 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축하 즉위식이다. 그 만찬에서 귀인 일천명을 초대해놓고 술을 마실 때 예루살렘 성에서 예배 때 사용하던 성물을 가져다가 술잔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금은으로 만든 신을 찬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자기 아버지보다 자기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아버지 느브갓네살 왕이 무서워했던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 그때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썼다.“메데 메데 데겔 우바르신”(단5:26). 다니엘이 해석을 했다. ‘메데’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세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뵈었다. ‘우바르신’은 ‘우’는 접두사이고, ‘바르신’은 베레스의 복수형이다. 베레스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다. 그 밤에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고 메데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의 신앙을 달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스스로 높아지고, 스스로 잘난 체하며, 스스로 웅덩이에 빠지게 된다. 신앙의 적당주의와 지적 우월감과 비교는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신앙의 불순물이다. 이것은 곧 타락의 징조이다.

●청년은 영적 목마름으로 주님을 찾아왔지만 마지막 주인을 바꾸는 문제를 넘지 못했다. 주님이 청년을 보면서 말하기를, 재물이 있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전혀 불가능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비유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비유이다. 이런 비유를 만나면 절망감도 들고, 고민도 많이 된다. 하나님의 표준이 너무 높으니까? 이것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헌신자들에게 신앙의 더 높은 수준으로 성장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퀴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불가능한 말이다. 추월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불가능한 말이. 억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초월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쉬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삶을 훈련해야한다. 바른 신앙은 낮아지는 자리에서 겸손과 섬김으로 초월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초월의 삶을 가르쳐주셨다.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십자가의 사랑은 참된 초월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아주 좋은 예이다.

초월의 삶은 아주 간단하다. 나의 의지와 신뢰의 대상을, 왕을, 주인을 주님으로 교체하면 된다.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우상이며 불신앙이다. 불신앙의 대상들을 정리할 때 초월의 삶이 된다. 추월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앙관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넉넉한 평화로운 신앙인이되며, 사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고 순종하는 기쁨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은 완전한 초월의 삶을 보여주신 분이다. 주님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셨다(빌2:5-11).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자신의 전부를 헌신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은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그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세워주셨다. 그의 이름앞에 모든 만물들이 무릎을 끊게 하셨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모든 권리를 일임하셨다.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다. 나의 통치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일임하셨다. 이것이 추월에 익숙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초월의 삶을 살아가는 이중국적자들의 아름다운 권리이며 사명이며 거룩한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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