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21 강) 다니엘 4:28-33

1. 느부갓네살의 꿈이 현실화되었다(28절).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징계하시고 일곱 때를 경과하고 깨달았을 때 다시 회복될 것이다(25절). 제국을 세우는 것도 어렵지만, 잃어버린 제국을 다시 세우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경륜은 그러한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신다.

2. 28절의 인칭(3인칭)인데, 한글 번역에서 일인칭 “나 느부갓네살”로 번역했다. 그것은 4장 전체가 느부갓네살 일인칭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8절에서 삼인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이 편집설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기원전 4세기 바벨론의 문학 기법을 천년이 지난 뒤에 단정하는 것은 오류가 발생할 확률이 자명하다. 칼빈은 그러한 표현을 히브리인과 갈대인이 즐겨 쓰는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화법의 전환에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은 의미전달에 아무런 장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제시했다. 꿈은 느부갓네살이 꾸었고, 해석은 다니엘이 한 것이다. 느부갓네살에게 준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꿈이 느부갓네살에게 실현된 것이다.

3. 칼빈은 이 시점에서 느부갓네살의 회개에 대해서 제시했다. 이전까지 느부갓네살이 외친 하나님 찬양은 불완전한 지식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징계로 교만을 꺾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칼빈은 아합 왕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 제시했다(왕상 21:29). 왕은 교만의 상징이다. 권력의지가 없는 왕은 왕좌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왕좌에 앉은 왕에게 겸손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만, 사람이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순종 없이 경건에 이를 수 없다.

4. 그런데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해석한지 열두 달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칼빈은 느부갓네살이 12달 동안 생각하는 기간을 가졌고, 12달 후에 궁궐에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30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해석에 큰 충격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의 해석을 옳다고 보려고 하는데,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12달 동안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해석을 회의했다. 독재자에게 어좌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선언한 다니엘이 온전한 것이 오히려 큰 겸손일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점점 꺾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그것을 수납할 수 없어 결국 자기 고백을 한 것이다(30절).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신비 그 자체이다.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5. 느부갓네살이 걸었던 왕궁은 공중 정원(Hanging Gardens)이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건축은 반신반인의 여신인 세미라미스(Semiramis)를 위해 건설했다고 한다. 느부갓네살의 도성과 궁궐은 세계의 미스테리 건축 중 하나이다. 그 웅장한 건축물을 만든 정복자가 자기의 위업을 거닐면서 교만을 만끽해야 하는데 회의(懷疑) 속에서 혼란을 겼었다(29-30절).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는 느부갓네살의 진술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위업을 강탈당함에 조용히 순복하는 것은 자기 종교에 대한 부정이고 자기 업적에 대한 부정이다. 칼빈은 정복자가 스스로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제시했다. 모든 도성 건설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두신다면 결코 소유하거나 누릴 수 없다. 신성모독과 교만은 동의어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쫓아내신다(시 18:27).

6. 칼빈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제시했다(31절). 느부갓네살은 꿈으로 보던 계시를 직접 자기의 귀로 들었다. 꿈의 실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어 이해한 수준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자인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회복자가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70년 뒤에 등장할 고레스는 성경에서 갑자기 등장해서 포로 귀한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성전을 회복할 수 있도록 물자를 지원하기도 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결단이 아니라 계시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는 주께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사 45:1-3). 에스라 선지자는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게 되었다고 선포했다(스 1:1-4).

7. 느부갓네살이 12달을 의심 속에서 지냈고 결국 심판은 실현되었다(31절). 하늘에서 난 소리는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라는 선언이다. 느부갓네살이 일 년여를 다니엘의 하나님을 탐구했지만 심판에 들어갔다. 심판은 징계가 아니라 느부갓네살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다. 회개는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힘이었고, 심판의 기간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심판을 피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마땅한 징벌을 받고 더 회복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징계가 나쁜 것이 아니고 징계가 없는 것이 나쁘다(잠 13:24, 19:18, 22:15, 29:17, 히 12:7-8).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도 주시지만 징계도 주신다.

8. 느부갓네살은 그 화려한 자기 궁궐을 피해서 광야에서 소처럼 풀을 먹었다(32절). 칼빈 당시 느부갓네살이 실제로 짐승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었는가 보다. 칼빈은 그런 해석을 배격하고 짐승과 다름없는 비참한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제시했다. 왕이 먹는 것과 용모를 단장하지 못해서 짐승처럼 먹었고, 용모도 짐승처럼 되었다(33절). 7년 동안 광야에서 거주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았지만, 1년 동안 회개하며 겸손히 주의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반드시 궁궐로 돌아갈 것을 믿었다(32절).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비참하게 짐승처럼 거닐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일년여의 회개 기간과 7년여의 방랑기간에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 거대한 제국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형성할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대적하는 세상의 도성이다. 바벨론-파사-헬레니즘-로마로 이어지는 느부갓네살이 꿈꾼 상(像)이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대적하고 성과 성전을 파괴했지만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바벨론의 정복자를 굴복시키셨다. 여전히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박해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박해자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회개하고 전능자를 알며 경배하게 될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며 구원하셨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는 복음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을 전도해서 구원하신다. 다른 방편은 없다. 반드시 복음 전도가가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믿기로 작정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역사는 지금은 없다. 1세기 오순절 이후에도 전도자로를 인도해서 복음을 듣도록 하셨지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다(사도행전에서 고넬료,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 등).

9.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정복자도 아닌 일반인데도 교만합니다. 약한데 거주하게 하셔서 빠르게 교만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겸손에서는 정복자나 일반인이나 동일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주 예수를 증언합니다. 주께서 믿기로 작정한 자들을 만나게 하여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되는 역사를 주옵소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겠나이다. 주의 복음의 지식을 주옵시고, 주의 성령의 감화로 구원의 역사가 풍성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22 강) 다니엘 4:34-37 

1. 다니엘 21강에서 어느 정도 단절된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4절부터 시작했다. 칼빈은 느부갓네살의 7년을 미친 사람처럼 비참한 상태로 제시했다. 어떤 사람은 진짜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짐승처럼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이다. 칠년동안 징벌의 고통을 충분히 받았다. 그리고 징벌에서 깨달음도 성령의 내적 사역이 있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영적 유익은 모두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사역 없이 어떤 영적 유익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부인을 하면서 주를 고백하고 의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그 고통의 기간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모했다. 느부갓네살이 회개하기 전에 공중정원을 거닐면서 하늘을 볼 때 그 하늘까지 소유한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면서 모든 공간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상태로 변화되었다.

2. 느부갓네살은 7년이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확실한 지식을 이루었다(34절). 개혁신학은 확실한 지식(explicit faith)을 추구한다. 맹목적인 지식(implicit faith)은 구원의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지식으로 분류한다. 느부갓네살이 1년 동안 회개하면서도 확실한 지식에 이르지 못했고, 7년의 환난 후에 ‘총명(reason, understanding)’을 얻었다. 여기를 근거로 7년 동안 미쳤다고 해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총명이 돌아왔다는 표현에서 더욱 그렇다. “총명이 돌아왔다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모든 감정이 해소된 회복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진정한 샬롬을 얻은 상태로 제시하고 싶다. 느부갓네살은 참 평안을 공중정원이 아닌 7년의 광야 짐승과 같은 생활에서 얻은 것이다. 그 평안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했다(34절). 우리는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들을 오히려 신성모독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7년 환난 뒤에서 외치는 찬양은 진정한 찬양으로 인정한다. 지극히 높음과 영생과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기독교 유일 지식이다. 세속의 신들은 민원을 해결할 능력과 거래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필요한 것으로 오직 영광뿐이다. 그 영광을 보며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의무이고 특권이고 복이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없는 것처럼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나 땅의 사람을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35절).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 자존자(自存者)이시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고백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싶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독립성(Independence), 불변성(Unchangableness), 영원성(Eternity), 편재성(Omnipresence), 유일성(Unity)으로 제시했다. 벌코프는 자존성(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유일성으로 제시했다. 스스로 완전하신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필요없고, 어떤 사람의 영광에도 영광이 증가하지 않고 훼손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성적 피조물의 찬양을 즐거워하시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은 진리이고 합당하다.

3.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인간과 천사를 행하실 수 있다. 그 행하심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는 높이 드시고 어떤 자는 내리 누르실 때(시 113:7)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현상도 이해할 수 없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운명의 장난 혹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불공정한 것이 아니고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지와 경륜을 따라서 사람과 천사들 사이에서 활동 하신다. 인간이 그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적 교사(inward teacher, Holy Spirit)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적 교사는 단독으로 역사하지 않고 외적 교사(outward teacher, speak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와 함께 역사하신다(cum verbo).

4. 느부갓네살은 총명이 돌아오자 7년의 징벌 기간에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했다(36절). 느부갓네살은 7년의 기간이 자기 죄과에 대한 징벌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다고 고백하며 찬양한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동일하다. 성경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동일하고, 그 결과는 사랑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행동(사랑)은 동일체이다.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주장하는데, 믿음에 사랑을 가진 행동으로 가야 한다.

5. 느부갓네살의 왕권은 회복되었다(36절).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설명은 없다. 어떻게 왕좌에서 떠났는지도 설명이 없다. 그 과정에 대한 이해보다 하나님의 계시가 실현된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과정을 생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인간은 과정에 더 관심을 갖는다. 사람은 설명(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분류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회의로 체계를 구성했고, 현대철학에서는 결정금지를 미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제한된 인간은 반드시 제한된 지식 수준에서 결정하고 진행해야 보다 나은 지식에 이를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식이고,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인내와 지식 그리고 지혜 그리고 동역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루었지만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빌 4:4-20).

6.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고 고백했다(37절).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낮추심을 의롭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낮아질 때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은 징벌일 수도 있고 훈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낮춘 것은 하나님이시니, 자기를 낮춘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는 것이 회복을 위한 지식이다. 맹목적이고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아담의 죄가 있는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은 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역의 습성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몸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의 주권을 기쁘게 인정하게 하옵소서. 현재 상태가 만족하지 못하게 느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불만족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와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든지 주의 이름이 선전되기를 고대합니다. 독생자의 피의 은혜가 가득한 것이 저의 유일한 만족입니다. 이 땅 무엇도 저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만족하며 평안을 얻습니다. 믿음을 주셔서 은혜를 사모하게 하옵시고, 복음을 전하며 겸손과 인내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 ex fide in fidem, sola et tota Scriptura, 螢雪靑藍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