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학자 잭 홀 박사는 남극에서 빙하 코어를 탐사하던 중 지구에 이상변화가 일어날 것을 감지합니다. 얼마 후 그는 탐사 연구 내용을 국제회의에서 발표하게 됩니다. 그가 발표한 내용의 핵심은 급격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해류의 흐름이 바뀌게 되어 결국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거대한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주장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 일로 인해 상사와의 갈등만 일으키게 됩니다. 그가 상사와의 논쟁하느라 퀴즈대회 참가를 위해 뉴욕으로 가는 아들 샘을 데려다 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얼마 후 아들이 탄 비행기는 이상난기류를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일본에서는 때 아닌 우박으로 인한 피해를 입게 되는 등 지구 곳곳에 이상기후 증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잭은 해양 온도가 13도나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이 예견했던 빙하시대가 곧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됩니다. 그는 서둘러 아들을 구하러 가던 중 백악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그는 정부의 중요 관료들에게 브리핑을 통해 현재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북부 사람들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너무 늦었으므로 포기하고, 우선 중부지역부터 최대한 사람들을 멕시코 국경 아래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으로 인하여 정부 관료들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는 아들이 있는 북쪽 뉴욕으로 향합니다. 이미 뉴욕은 물에 잠겼고 아들 샘은 물이 점점 차오르는 뉴욕도서관에 고립되었고 곧 이어 한랭한 폭풍의 눈에 들어간 뉴욕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합니다. 샘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도서관의 책들을 태우면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잭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것은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의 줄거리입니다.

2004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으로 흥미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대비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 영화 광고 그림에는 마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구호 같은 ‘깨어있어라, 그날이 다가온다!’라는 글귀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위기는, 원인은 지구온난화인데 결과는 마치 빙하기가 도래한 것과 같이 뉴욕천지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일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가능성을 확실한 과학처럼 믿게 한 것은 사이비 종말론처럼 과장이고 왜곡이며 나아가서는 거짓입니다.

앨 고어는 미국의 대통령 출마자였고 부통령까지 지낸 엘리트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떨어진 후 환경운동에 집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펴 낸 “불편한 진실”은 지구온난화를 확실하게 경고하는 책으로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 이후 지구온난화 문제를 대중적 관심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파차우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데이트가 상당 부분 거짓이거나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앨 고어나 파차우리는 자신들의 주장처럼 친환경적으로 살기는커녕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하고 비난했던 부자들처럼 초호화 저택에서 자가용 비행기 등 온갖 것들을 다 가진 자들로 반 친환경자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기의 이론이 잘못된 것임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배운 자들, 남보다 의식이 깨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학문과 이론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호도하는 것으로 인기와 이익을 구가했다면 그들의 행위는 반사회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앨 고어와 파차우리 같은 이들을 위기에 직면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이중적인 생활로 보아 자기들의 주장과 이론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기보다 고의적으로 대중을 속인 것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 화가 납니다.

아직도 나의 서재에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꽂혀 있습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지식인이라면 맬서스의 인구론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의 이론은 지구상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 결국 인구폭발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식량이 부족하여 수 억 명이 굶어죽게 된다는 비관론입니다. 인구 폭발과 함께 자원고갈과 식량고갈도 비관적 환경론처럼 왜곡되고 과장되고 결과적으로는 오해 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지금은 인구 폭발이 아니라 인구절벽이 오히려 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이 환경을 오염시키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난한 나라일수록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일수록 환경 문제를 극복하여 점점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 중에 아직도 4대강 개발이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4대 강 개발 이후에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던 홍수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못된 언론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여름 장마철만 되면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의 수재민 돕기 성금운동에 온 국민이 나서야 했던 일들을 언론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국민 전체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연례행사처럼 겪던 홍수와 가뭄 피해 극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쏟았던 일들을 잊었을 리가 없습니다. 선진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는 4대강보다 훨씬 더 많은 댐과 보들을 만들었고 그것이 사회 경제적 인프라가 되어 지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선동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이론과 정책을 제시하는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지금의 한국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무뢰한처럼 보입니다. 청년 일자리 창출과 성장을 지향한다는 정부의 정책들은 하나 같이 성장을 가로 막고 있으며, 청년 일자리 절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정부의 경제 정책들이 이런 결과를 불러 올 것이라는 것쯤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이라면 상식으로도 예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조합원들의 과도한 요구에만 귀 기울이는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현 정부가 그러한 정책들을 시행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부정적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은 환영할만한 정책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수입이 늘자 ‘우선 먹기 곶감이 달다.’라는 속담처럼 좋아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은 그 전에 받던 최저임금마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이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인상된 최저 임금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한 자영업자나 소기업들이 잇따라 폐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실업자는 더 늘어나고 최저임금마저 받을 수 없게 된 이들의 현실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반 대기업적인 현 정부는 대기업의 낙수 효과가 없다고 하는데, 한국의 근대 경제부흥을 몸으로 겪어온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절대 빈곤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은 정부나 개인 모두가 힘써야 할 일이지만, 시장 기능에 의해 형성된 최저 임금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시장 자체를 허무는 일입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남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절제되고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자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이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여 실패한 것입니다.

논리와 사회과학을 빙자한 거짓과 왜곡은 학문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뉴욕대학의 물리학자 Alan Sokal의‘지적 사기사건’은 강단 좌파들의 무지와 거짓과 왜곡을 고발한, 이를테면 학계의 내부고발로 세상을 경악케 한 사건이었습니다. 대학 강단까지 거짓과 무지와 왜곡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동양 속담에 ‘식자우환’이라 했는데, 소크라테스처럼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아는 지식 때문에 인간도 세상도 역사도 보편 가치도 잘 모르게 된 이들이 오늘 날 소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와 지식을 오늘날처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때가 역사상에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진지하고 성실하게 노력한다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폭넓은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이런 폐해를 피할 수 있을 텐데, 인간 지식이 상대적이라서 그럴까요? 지식과 미신이 통합되고 연동되는 개인과 정치와 사회현상을 지켜보노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세상을 탓할게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바알이 평화롭게 통합되는 것을 추구했던 것을 신탁을 받은 선지자들이 통렬하게 꾸짖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식한 민초들이 아니라 배웠다고 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자행된 왜곡과 거짓과 미신은 제 정신 가지고 사는 이들을 너무나 힘들게 합니다. 어떤 분이 친구에게 ‘요즘 텔레비전 보지 마라. 밥맛 잃고 마음에 병 얻는다.’고 하자, 그 친구 대답하기를 ‘그 단계는 지났고, 지금은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인격 수양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사회 일원으로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과 왜곡과 과장이 난무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며 대처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평정을 되찾아야 할 텐데 어떤 분의 충고처럼 입맛 잃고 마음에 병 얻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산주의, 유물주의, 상대주의, 전제주의 등은 명시적으로 거부해야하지만 총체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사상과 이론이 수없이 많아 더욱 어려움을 겪습니다. 만약 상대주의가 상대주의 자체까지 상대화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상대주의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절대자 하나님까지 상대화 하는 인류 재앙의 끝을 향해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하였습니다. 그가 배운 일체의 비결 가운데는 아덴에서의 경험도 포함됩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경험은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덴은 철학, 문학, 과학, 수사학의 도시였으며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도시이기도합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은 어느 정도 사그라진 뒤였지만 그 화려한 명성과 업적으로 인하여 그 도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아덴이 어떤 곳인가를 잘 아는 바울이니까 나름대로 각오를 가지고 아덴에 갔을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대로 아덴은 철학과 모든 지식의 본산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은 아덴이 우상의 소굴임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지식인들이 가장 미신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이를테면 Oxford, Cambridge, Harvard, Yale, Princeton 안에 우상이 득실거리고 그 대학인들이 우상과 미신에 빠져있다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바울은 최고의 고상한 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온갖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인간이 상식적으로 하면 안 되는 짓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회당이나 시장에서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에 에너지로 활용하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자신 있게 그들과 변론했는지 그들이 바울을 당할 수 없어서 바울을 ‘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아덴을 떠났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핍박이나 반대를 피해 도망치듯 사역 지를 빠져나왔지만 아덴에서는 스스로 철수하였습니다. 아덴을 나와 간 곳이 고린도입니다. 그가 아덴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고린도에 가서 하는 말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문과 이론적 논쟁, 상대를 가르치고 제압하려는 자신만만한 태도, 스스로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말도 안 되는 거짓과 우상과 미신을 목격하고 마음에 분노가 폭발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논쟁했던 아덴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뒤돌아보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덴에서는 의기양양했지만 고린도에서는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또 다시 자신의 지식과 논리로 상대를 깨우치고 가르치고 제압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거짓, 사기, 과장, 왜곡, 오해가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믿음과 인격에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바울의 경험과 결심은 좋은 교훈이 됩니다. 세상과 거짓에 대한 분노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교만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라고 했던 은혜가 절실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1-3)

황상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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