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농담이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남한을 쳐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중딩들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세대가 중학생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인 듯합니다. 중딩이 가장 무서운 세대라는 것을 중국은 이미 65여 년 전에 홍위병들을 통해 경험하였습니다. 남한의 중딩이 무서워 남침을 못한 김정은이 이 번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는 서울에 무혈입성하게 생겼습니다. 남한의 청소년들 사이에 김정은 하트 인증샷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은이 남한 청소년들에게 호감을 갖게 할 만한 남한에서의 활동을 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남한의 어떤 사람들 때문일 것입니다.

북한 언론보도와 지금의 정치 현실을 볼 때 김정은은 독재자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북한의 아이들은 밥 한 그릇 연필 한 자루도 지도자 동지께서 주신 것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에게 초코파이 하나 얻어먹은 적이 없는 남한의 청소년들이 어째서 김정은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잘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잘 배웠고 이 번 남북 정상회담 때 남한의 대통령과 고위 층 인사들이 김정은을 위인 대하듯 하는 것을 보고 받은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게다가 언론들까지 김정은을 스타로 만들어 놓았으니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이 김정은신드롬에 홀딱 빠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나는 주일과 예배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일이나 예배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예배나 주일의 의미가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주일, 어머니 주일, 선교주일 등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그냥 주일이고 예배는 그냥 예배입니다. 어떤 말로도 수식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수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극단적으로 수식어를 붙이면 절대로 안 된다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주일이나 예배의 본 뜻을 덜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붙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강조합니다.

5월은 어린이 달이기도 하고 성경에서 어린이에 대해 가르치니까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어린이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옛날 같으면 어린이의 인권을 강조해야겠지만 요즘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위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린이와 관련하여, 딱히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린이를 포함하여 청소년들의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은 인격적으로 아직 미성숙하다는 면에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성숙하다는 것이 지식의 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고 감성적인 면에서는 감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문제이듯이 청소년 역시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하여 몇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천국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입니다(마 18:4, 17, 막 10:14, 눅 18:17). 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 어른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고전 3:1, 고전 13:11, 엡 4:14, 히 5:13). 그리고 어린아이는 약자로 상징되는 존재입니다(마 18:5, 눅 9:48, 10:21). 어린아이를 바르게 잘 지도해야 할 책임은 당연히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고대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학대하였습니다. 옛 로마 시대가 그랬고,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에도 어린아이들의 인권은 무참하게 유린되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성세대는 어린아이들의 선생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못 배우고 무식한 부모라도 자기 어린 자식을 잘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가르치는 일을 잘 못하여 책망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롬 2:17-24). 성경은 어린아이를 잘 가르치지 않는 이들을 어린아이 같다고 책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육체적 어린아이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를 또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고전 3:1).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비로소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났습니다(고전 13:11). 바울은 영적 어린아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고전 14:20, 엡 4:14, 히 5:13).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12장이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가르치면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는데 각 지체의 역할을 은사라고 한 것입니다. 지체들 중에는 더 중요한 지체가 있고 덜 중요한 지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각 지체들은 더 중요하다고 해서 덜 중요한 지체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중요하고 요긴합니다. 몸의 각 지체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경쟁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지체들인데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싸웁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지체끼리 싸우는 것은 비정상적인 경우이거나 미숙한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리지 않는데 싸우면 비정상적인 상태이고 나이가 어려서 싸우면 미성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교훈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은사에 대해 교훈하다가 마지막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더욱 큰 은사가 13장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은사의 동기이고 목적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은사나 능력이라도 사랑에 기여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더 큰 은사로서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다른 모든 은사가 은사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11절은 바로 그 사랑을 강조하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바울은 어린아이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른의 지식의 특징은 합리적이고 또는 통시적이며 역사적입니다. 통시적이란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핵심을 파악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고, 통시적이지 못하고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어린아이의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몸만 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와 판단에 있어서 합리적 능력과 통시적 능력을 갖게 되어야 어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몸은 어른인데 생각과 이해와 판단이 어린아이인 경우가 있습니다. 고전 13:11절은 바로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한 교훈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과 이해와 판단이 어린아이 같아서 자꾸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싸웁니다. 시기, 질투, 경쟁, 싸움 같은 것은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그러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신앙생활도 철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단히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다 부분적인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다 버렸다고 합니다. 부분적인 지식과 이해와 경험과 능력을 잘 활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버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은 불완전하고 왜곡되고 거짓되고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나 청소년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지식은 부분적이고 판단은 감정적이라서 매우 위험합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어떤 중대한 것을 판단해야 할 때는 전적으로 어른들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이나 청소년의 미숙하고 부분적이고 감정적인 약점을 이용하는 나쁜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엡 4:14절은 그러한 형편에 대한 교훈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이나 청소년만을 위한 교훈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교훈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교인을 유혹하여 이단을 퍼뜨리거나 그릇된 교훈을 하는 거짓 교사나 이단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안에 극성을 부렸습니다. 교회 안에는 어린아이인 어른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 중에도 지식이 부분적인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의 어떤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미숙한 경우입니다. 제자훈련, 선교, 교육, 구제, 봉사, 사회운동, 건강, 환경운동, 민주화 운동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부분적이 됩니다. 성경은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원리적이고, 포괄적이고, 전체적이고, 역사적입니다. 포괄적이고 전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가르쳐야 할 목사가 어떤 한 부분만 강조하면 그것이 곧 왜곡입니다.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구체적이기도 하지만 포괄적이고 역사적이고 전체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났던 소년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가 나쁜 어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쁜 어른들은 어린이나 청소년을 유혹하고 속여서 자기의 이익을 챙깁니다. 못된 어른들이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악용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모택동과 히틀러입니다. 독일의 청소년들은 히틀러에게 속아서 그를 평화의 수호자라고 열렬히 환영하였고, 중국의 홍위병들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살육과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못된 독재자는 무서운 중딩들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 한 번 필이 꽂히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격한 감정의 어린아이나 청소년은 못된 어른들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은 경우입니다. 김정은 하트 인증샷 열풍이라니, 모택동에게 열광했던 홍위병과 히틀러에게 열광했던 독일 청소년들이 생각나는 섬뜩한 느낌의 잔인한 4월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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