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한국에서 신학하기
다니엘서 강해(14) 벨사살의 교만, 바벨론 멸망의 불가피성

(칼빈 다니엘 주석 25 강) 다니엘 5:12-20

1. 벨사살이 손가락으로 쓰여진 글자를 보고 놀랐고 해독하지 못해 공포에 사로 잡혔다. 태후의 도움이 없었다면 벨사살은 공황(恐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칼빈은 그러한 벨사살의 태도를 배은망덕(ingratitude)으로 규정했다. 이미 선대 느부갓네살이 꿈에 받은 계시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다니엘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다. 칼빈은 태후를 벨사살의 아내가 아닌 조모(祖母)로 제언했다. 그것은 왕의 잔치에 왕비와 후궁들이 참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그것에 대해서는 왈가불가를 하지 않기로 한다. 칼빈은 헤로도토스(Herodotos, 484–425 B.C)의 제언을 따라서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Labynetus)의 왕비 니코트리스(Nitocris)라고 했고, 그녀의 탁월한 명석이 있었다고 제시했다. 칼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Historiai>를 잘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태후는 다니엘을 강력하게 추천했다(12절). 태후는 다니엘에게 세 가지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11절에서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 12절에서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는 자”로 제시했다. 태후이 다니엘을 격찬하지만 느부갓네살이 회개하기 전 다니엘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단 4:18에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고 제시했다. 다니엘에게 ‘신의 영’이 있는 것이지 ‘신들의 영(the spirit of the holy gods {is} in thee)’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이후로 다니엘(벨드사살)은 바벨론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벨사살은 심각한 국정 위기에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구하지도 않았다. 바벨론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정복자로서 위치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3.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포로된 사실을 주지시켰다(13절). 그리고 “신들의 영”(14절)이 있음에 대해서 꾸준히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호기심은 믿음으로 가지 않음을 훈련하고 있고, 믿음은 겸손과 순종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벨사살은 다니엘을 선지자로 격상시키는 것은 자기의 불경건을 인정하는 것이다. 죄인의 비참은 자기 최선을 다할 때 자기의 죄와 부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경건한자들이 스스로 자기 부패를 드러내도록 징벌하시기도 한다.

4. 칼빈은 15절에서 벨사살이 술객과 박사들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 사실 고백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벨사살의 고백이 순수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은밀한 본성(the secret instinct of God)에 의해서 횡설수설로 이해했다. 사도들도 변화산에서 횡설수설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났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발생하지 않았다. 특별계시 시대에 특별계시를 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지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하나님의 현현은 지식의 전달보다 심판의 실현일 때가 많았다.

5.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자주옷, 금사슬을 목에 드리게 하고, 셋째 치리자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16절). 이러한 호의(好意)도 멸망 직전에 있는 왕의 호기(豪氣)에 불과하다.

6. 다니엘은 왕의 사례를 거절했다(17절). 칼빈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이 준 명예는 수용했는데, 벨사살의 명예는 거절한 것으로 제시했다. 칼빈은 벨사살의 불경건에 대한 냉철한 대처이고 바벨론의 멸망을 예견했기 때문으로 제시했다. 선지자의 위엄은 최고권력자의 호의를 조용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재자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선지자의 위엄은 독재자가 감히 엄습하지 못할 권세를 갖고 있다. 다니엘은 벨사살에게 왕국의 멸망을 해설할 것인데, 그 나라에서 자기가 상을 받는 다는 것은 논리에 모순이 있다. 마치 기우제(祈雨祭)를 하러 가면서 우산을 갖고 가지 않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유대인 선지자로서 위용(威容)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태에 세상의 권력이 감히 범접(犯接)할 수 없다. 주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셨다(마 10:28).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다(막5:35-43).

7. 다니엘은 18-20절에서 벽에 쓰여진 글자를 제시하기 전에 전제 지식을 제시한다. 칼빈은 벨사살이 당황할 것에 대한 배려로 제시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접할 때에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인간은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에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죽음보다 더 강력한 권세가 돈이 되었다. 왕에게 가장 큰 충격은 왕좌와 왕국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이 신(神)으로 삼는 것(우상)이 사라지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충격이다. 복음은 주의 자녀들에게 뜻과 생명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복음의 사람은 생명을 다해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위탁한다.

8. 다니엘은 벨사살에게 존귀를 발언한다(18-19절). 우리시대에 이러한 표현을 정무(政務) 감각이라고 한다. 정무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실 발언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차원의 발언이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전부를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한 부분 사실을 발언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겸손을 인도한 선지자이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하고 겸손해졌다(19절).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높이기도 하고 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20-21절).

9.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에서 만족하며 교만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곧 교만과 허영이 엄습하나이다. 주의 십자가를 고백하며 붙들어서 겸손과 온유의 주와 동행하게 하옵소서. 생명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섬김으로 세상권세와 물질의 유혹을 담대하게 이기며, 주의 사랑으로 형제와 함께하며 돌볼 수 있도록 지혜와 결단을 주옵소서. 우리시대에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26 강) 다니엘 5:21-29

1. 교만은 인간을 강퍅하게 만든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강퍅한 태도를 갖게 한다. 교만은 모든 인간의 기본 성품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신적 위용을 갖기 때문에 교만할수록 존경을 받는 왕좌를 소유한다. 독재자가 교만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독재자를 하나님께서 낮추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

2. 교만한 독재자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 들짐승처럼 지내면서 인간 나라에 왕을 세우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았다(21절). 느부갓네살은 왕좌에서 쫓겨나서 광야 방랑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계시에 대한 질문 속에서 7년을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높이고 낮추는 이가 유다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운영을 누가 막거나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혹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다면서 게으름을 정당화시키지는 말라. 인간의 최선과 하나님의 경륜이 조화를 이룬다. 인간의 게으름은 하나님의 경륜을 반역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7년의 광야 방황에서 그 답을 찾았다. 7년은 긴 세월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답을 찾은 것은 인생에서 가장 복되기 때문이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고, 40년 광야에서 백성들과 함께하면서 1번 분노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3. 다니엘은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단정하며 교만한 상태를 지적했다(22절). 왕의 역대기는 보존하기 때문에 후대 왕들은 선대의 왕의 기록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그런데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역대기를 알면서도 유다의 하나님께 혹은 스스로 겸손한 성품을 갖추지 않았다. 그것은 벨사살의 교만에 핑계할 것이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벨사살의 교만은 더 엄중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했다(약 3:1). 많이 받은 자는 더 엄중한 심판 규정을 적용한다.

4. 다니엘은 벨사살의 교만한 모습을 나열했다(23절). 절대자 왕의 과오를 지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벨사살은 자기 여탈권을 다니엘에게 의탁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먼저 왕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러나 왕의 교만과 과오에 대해서 명확하게 제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의 직무이다. 종교개혁가 스코틀랜드 사람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스코틀랜드의 통치자 피의 여왕 메리(Bloody Mary, 1516-1558)에게 엄중한 하나님의 법을 선포해서 국왕이 존 낙스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여왕 메리가 로마 교회 회귀를 위해서 수 많은 피를 흘리기 때문에 그 정책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한 피 위에 장로교회는 설립되었다.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에서 장로교회 질서를 체계를 잡았다. 멜빌을 장로교회의 아버지(the father of Presbyterianism)로 이해한다. 앤드류 멜빌의 주도로 작성된 <제 2 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가 1578년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 총회에서 채택함으로 스코틀랜드에 장로 교회가 형성되었다. 낙스와 멜빌의 가르침을 잇는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은 장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벨론 왕조에서 교만이 허용될 수 없듯이, 바른 교회 질서 확립을 위해서 순교하며 구축한 장로교인들에게도 교만은 허용될 수 없다.

5. 벨사살의 교만에 대해서 손가락이 기록하게 되었다(24절). 다니엘은 벨사살이 심판을 당할 것이며 불만이 없도록 제시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조롱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필자는 이러한 것에 근거해서 “호의를 악용하지 말자”라고 교육한다. 그러나 호의에 대한 무지는 악용을 낳는다.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권리로 착각한다. 인간은 분수를 알아야 하고(자족), 과분한 것을 요구하는 탐욕은 죄를 낳는다. 벨사살은 패색이 있는 왕국에서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교만한 행동을 했다. 결과 왕국이 멸망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다.

6. 다니엘은 벽에 쓰여진 글자를 제시한다. 그것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다. 벽에 쓰여진 글자가 아람어, 히브리어였을까? 필자는 벽에 글자는 신비한 문자였지만 성경에 기록할 때는 아람어로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글자가 아람어였는데 정신이 혼비해서 읽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7. ‘메네’는 두 번 반복했다. 메네는 계산하다, 계량하다는 뜻이다. 메네가 두 번 등장하는 것은 벨사살, 바벨론에 대한 평가가 완전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종말을 확정하셨다는 의미이다. ‘데겔’은 ‘저울’, 또는 ‘저울을 재는 행위’를 의미한다. ‘우바르신’은 ‘쪼개다’라는 의미이다. 쪼개진다는 의미는 바벨론이 나뉜다는 뜻이 아니라, 메대와 바사(다리오와 고레스)가 정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8. 불편한 다니엘의 해석에 대해서 벨사살은 왕의 위용을 갖고서 자주옷, 금사슬, 셋째 치리자로 삼았다(29절). 다니엘의 높아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벨사살의 교만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쉽게 교만을 꺾을 수 없다. 출애굽 시절 애굽의 바로는 10가지 재앙에도 교만을 꺾지 않았다. 한 번 기적에 교만을 꺾을 수 있다는 상상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9.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성경을 통해서 익힙니다. 우리의 굳은 마음을 연단하여 겸손과 온유를 갖게 하옵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고백함으로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하옵소서.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온유를 주옵소서. 그럼에도 원수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의 보호를 간구하나이다. 믿음이 연약해서 간구하오니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나이다. 원수에 목전에서 상을 받을 때 잘먹고 소화도 잘하고 잠도 잘자며 튼튼한 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함께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 ex fide in fidem, sola et tota Scriptura, 螢雪靑藍

고경태  ktyhbg@hanmail.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고경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