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명함'으로 다시 사명의 장에 서리라 다짐하다- 공춘택선교사

공춘택선교사- 카작 아메리카 대학 앞에서

●공춘택 선교사 사역 소개

(1)서울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성결교 목사로서 한국에서 7년을 목회하고 1987년에 미국 유학을 가서 7년 공부하는 중에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2)문이 열린 카작스탄에 1992년도에 도착해서 1993년 3월에 중앙 아시아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해서 10 년간 일하다가

(3)2002년도에 중국 신장성 우루무치, 재경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해서 중국의 3 개 대학에서 14년간 영문과 교수로 일했다.

(4)2016년도 가을학기에 다시 카작스탄으로 들어와서 (1) 카작 아메리카 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로 일하면서 동시에 (2) 기도와 컨퍼런스 사역을 지휘하고 있다.

 

● 본죽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

무릎경영

최근에 ‘본죽’ 최복이 대표의 ‘무릎경영’을 우리말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영광을 가졌다. 저자의 기도 영성이 영어 번역을 통해서도 전달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240 페이지 되는 그 책의 번역을 끝낼 때까지 40 일간 매일 저녁식사를 금식했다. 작은 체구의 여인이 2002년도에 남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구 이화동 사거리 뒷골목에서 죽 가게를 열어서 20년이 되기 전에 국내외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식점 프랜차이즈로 성장 시킨 이야기다. 최복이 권사님은 비즈니스 성공을 주님과 매일같이 치열하게 씨름하는 영적 ‘워룸 (war room)’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숙대 앞에서 호떡 장사를 하다가 리어카를 밀며 단속반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에도 남편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호떡을 팔아서 이미 유명해진 분이었다.  그 남편(김철호 회장)이 어느 날, ‘당신 죽 집 해 볼래?’ 해서 구역예배 식구들을 상대로 죽 메뉴를 개발 했단다. 2002년 초에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개발한 15개의 메뉴가 지금도 전체 매상의 70 % 를 차지할 정도로 본죽은 하나님께서 주신 메뉴라고 고백한다.

새벽기도 중에 ‘본죽’이란 이름을 받았고 싼 값에 나온 종로구 뒷골목 2 층집을 계약해서 3 개국어로 간판을 걸었다. (한글, 영문, 일문)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미 계약금을 주었는데 상권 전문가가 와서 보더니 ‘여기는 뭘 해도 안되는 자리니까 당장 무르세요.’ 했단다. 이미 가진 돈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게 열 준비를 하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들어와서 여기서 장사하다 망한 게 벌써 세번째인데 으슥하니까 호프집이나 하면 될 거라고 조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돌직구를 날렸다고 한다. ‘새댁이 죽을 할거라고? 아픈 사람이나 먹지, 누가 돈 주고 죽을 사먹어? 여기 주변 식당에서도 다 죽을 파는데…’

무릎경경-영문판

●용감한 하나님

저자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무릎경영 60 페이지) ‘맞는 말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에 차려도 될까 말까 한 죽집을 최악의 장소에 오픈했었다. 식당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눈이 없었다. 어쩌면 잠깐 눈을 멀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관심 두지 않고, 찾지 않는 구석진 2층을 본죽의 거점으로 택하신 분은 용감한 하나님이셨다.’

후에 성공비결을 묻는 많은 인터뷰에서 당시 가졌던 마음에 대해 저자는 ‘간절함’을 꼽았고, 저자의 남편은 ‘절박함’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때의 손님 한 분은 정말 하나님 같았다고 한다. 한 시간에 한 명씩 오는 셈이었으니까 손님이 오면 마치 주님이 찾아오시는 듯했다고 한다. 맨발로 뛰어나가서 손님을 맞이하고 옆에 바짝 붙어서는 ‘누가 드실 거예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소금을 넣어드릴까요?’ 손님의 필요와 요구대로 꼼꼼히 챙기고 준비한 것이 성공의 비법이었다고 한다. 

(무릎 경영은 ‘Prayerful Management’ 란 이름으로 Amazon.com 에서 영어책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보약은 안 먹어요

김경자목사, 최복이 이사장, 공춘택선교사-본월드선교센터에서

번역을 마치고 저자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Kazakh American University 에서 내가 가르치던 영문과 학생들에게는 한 주간 휴강을 선언하고 본죽 대표인 최복이 권사님이 회장으로 섬기는 서울의 본월드미션에 찾아갔다.

한국에만 해도 1500개가 넘는 본죽 프랜차이즈를 가지고 있는 회사의 대표 답지 않게 최복이 권사님은 작은 체구에 조용한 목소리를 소유한 외유내강의 기도 용사였다.

그가 ‘번역하느라 수고하셨어요. 공진단을 지어 드릴께요.’하는데 나는 즉석에서 사양했다. ‘저는 보약은 안 먹어요.’ 옆에 있던 본월드미션의 사무총장인 김경자 목사님께서  ‘카작스탄에 있는 선교센터 리모델링 문제 때문에 다른 경황이 없을 겁니다.’

식사 대접도 사양하고 카작스탄으로 돌아왔더니 내 계좌에 번역비로 천만원을 입금시켜 주셨다. 그 돈으로 곧바로 카작스탄 선교 센터의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누가 화장실에 헌금하겠는가?

선교센터 화장실 모습

이 선교 센터 건물은 옛날에 유치원으로 쓰던 건물을 경매로 구입해서 신학교 사역을 위해서 사용해왔다. 2000년도에 재건축해서 그동안 아무런 수리도 하지 않고 사용하다가 내가 이곳을 떠난지 14년 만인, 2016년 8월에 카작스탄에 돌아와서 보니 샤워실과 화장실이 낡아서 급히 수리가 필요했다. 아래층 천정으로 물이 새서 더 지체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개척교회 건물을 짓는다면 몰라도 어느 누가 선교 센터의 화장실과 샤워실 수리를 위해서 헌금을 내겠는가?

선교센터 화장실리모델링 공사 완공모습

친구들에게는 헌금하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지만, 나 자신은 이 사역과 이 건물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그래서 9명의 직원들과 함께 거의 2년이나 기도했는데도 아무에게도 헌금하라고 요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돈 천만원이 생긴 것이다.

 

●부자(?) 선교사의 헌금

중국대학에서 처음 사역시작할때 모습-공춘택선교사와 사모님

원래는 물새는 것만 찾아서 막고 현지인식으로 소박하게 공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20년간 손 안 대도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점점 계획이 커졌다. 그래서 우리 은행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을 송금했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아서 한달만 있으면 이자와 함께 원금을 찾는 내 개인 적금통장을 해약하고 천만원을 송금해서 받았다. 원래는 이 돈을 찾아서 25년 선교사 생활 처음으로 선교지에서 내 차를 살 생각을 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한국으로부터 송금 받은 2600 만원 중에서 클레어먼트 대학원 동문인 베다니 감리교회의 곽주환 목사님이 300만원 헌금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내가 헌금한 셈이다.

한국 교회 중에 1년 예산이 1,000억원인 교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나는 직원들 앞에 이 돈을 내 놓았다. 그리고 내가 만든 서류에 서명하도록 했다. 현지인 직원들은 내가 헌금하면서 무슨 조건을 내 놓을지 궁금해 했다. 두가지 조건을 내 놓았다.

 

내 헌금의 조건

첫째는, 이 선교 센터에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요구했다. 적자 살림이라도 수입이 들어오면 먼저 십일조를 떼어서, 두 명 직원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입금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매년 3 월과 9 월 첫째 주에 모든 직원이 모여서 지역 사회를 위해서 이 헌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자고 했다.

둘째는, 옆 나라인 우즈베키스탄의 한 지역에 살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앉고 살아가는 카라칼팍 사람들이 우리 센터에서 마음껏 예배 드리도록 허락하고 그 목사가 사용할 사무실을 주자는 것이었다.

첫번째 조건에 다들 어려워했다. 지금까지 9명의 직원들이 최소한의 월급을 받으며 가까스로 운영해 왔는데 어떻게 이 수입에서 십일조를 뗄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내가 모금을 하든지 아니면 내가 계속 한영 번역이라도 해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개방하는 어린이 놀이터, 산책로, 풋살장, 카작 전통 천막 가옥 등의 시설들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앞으로 이 컨퍼런스 센터는 더욱 유명해지고 수입도 자연히 많아질 거라고 확증해 주었다.

두번째 조건은 첫번째 보다 더욱 힘들어했다. 카라칼팍 사람들은 카작 사람들과 용모가 비슷하면서도 자기 나라가 없기 때문에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고 있고 이곳 카작스탄에도 일자리를 찾아서 많이 와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은 사회의 멸시 받는 맨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백인들에 비해서 흑인들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동안 설교할 기회 있을 때마다 ‘선교는 낮은 곳으로 가고,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삶’이라고 강조했었다.

카라칼팍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나 친교 할 때마다 우리 직원들이 자주 트집을 잡았었다. 이유는 카라칼팍 사람들 때문에 경찰이 찾아오고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이들을 선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4월 3일에는 ‘쿠앗’이라는 카라칼팍 목사에게 사무실을 주기로 서명했다.

 

●교회 건물 필요 없어요!

건물에 관해서라면 아스카르벡 목사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다. 충북 대명교회 (담임: 오세현 목사님)의 후원으로 거의 20년 전에 2천 2백만원으로 교회 건물을 짓다가 사기를 당해서 건물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교회 건물이 없이 각 가정을 돌아가면서 목회하는데 아스카르벡 목사 자신은 물론이고 온 교인들이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성실한 목회의 모습을 확인하고 오세현 목사님이 작년 10월에 컨퍼런스 강사로 온 김에 제안했다. ‘아스카르벡 목사님, 저희 교회에서 다시 헌금할 테니까 교회 건물을 지으시지요.’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횡재가 없었다. 요청도 안했는데 교회 건축을 후원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아스카르벡 목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양했다. ‘오랫동안 교회 건물 없이 돌아다니며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좋은 교회 건물이 없어서도 아니고 점점 기독교인들을 옥죄어오고 있는 종교법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살아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건물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래서 대명교회 오세현 목사님은 건축 헌금할 기회는 못 가졌지만 그것보다 훨씬 행복해하면서 귀국했다.

 

●이상한 문자 메시지

영문과 클래스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 속의 전화기에 문자가 도착했다. 쉬는 시간에 열어보니 러시아인 알렉산더 멜랴코프 목사였다. 내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도해주고 있는 현지인 목사인데 그날 문자는 이상해 보였다. ‘패스터 콩, 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곧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겁니다.’

‘무슨 인사가 이러지?’ 시간이 지나갈 수록 이 문자가 나를 괴롭혔다. 수업 끝나고 알렉산더 목사에게 전화하니까 전화를 안 받는다. 아니 전화기를 아예 꺼버렸다. ‘이 사람이 오랫동안 목회하다가 번 아웃 된건가? 목회를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인가?’

며칠간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다가 토요일 아침에 통화가 되어서 너무 반가웠다.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다행히도 목회를 그만 둘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주일 지나고 다음날 저녁 식사 약속을 해서 그 이상한 문자의 사연을 들었다.

 

●미혹하는 구원파

알렉산더 멜랴코프 목사는 지난 주간에 구원파의 집회에 초대받아서 한주간 동안 전화도 빼앗기고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한국과 구 소련의 전 지역에서 온 90여명의 한인들이 이 도시의 특급호텔에 모여서 박옥수 목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90여명의 구원파 한국인들이 모여서 그 많은 돈을 사용한 이유가 그곳에 초청한, 자기를 포함한 7명의 현지인 목사들을 구원파로 회유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요즘 알마타에서 구원파가 큰 세력을 얻고 있다. 예수 믿으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교리 때문에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혹 당하고 있다. 이 구원파 전도 활동 때문에 좋은 건물에서 150명이나 모이던 순복음 교회가 대부분 흩어졌고 역시 좋은 건물을 가지고 200명씩이나 모이던 ‘새 세대’ 교회가 거의 빈 교회가 되었다. 두 교회 모두 좋은 자체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교회 이름만 남았다고 한다.

알렉산더 목사는 구원파 컨퍼런스의 첫 집회에서 박옥수 목사의 강의를 듣고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단이라고 판단하고 나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참석한 다른 6 명의 현지인 목사들을 설득해서, 아무도 구원파로 넘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침 수업 시작하면서 조는 학생

밤새 일하는 학생

내가 가르치는 영문과 학생들 중에서 러시아 학생들 80% 는 편모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모두 아버지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힘들게 생활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내 추측인데, 러시아인 커플들이 젊었을 때는 서로의 외모에 끌려서 결혼했다가 연애 감정이 사라지고 결혼 10 년이 넘어가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그 약속을 지킬 능력도 상실한 후에는 모성만 남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부모님 사랑을 이야기하자면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영문과 Social Communication 시간에, 아침 8 시 30 분에 수업 시작하면서부터 졸기 시작하는 여학생이 있다. 밤샘 파티 하는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다가 학교로 오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어 보인다.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엄마는 수입도 얼마 안되는 세탁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자기가 공부만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된다고 했다. 웨이트레스일이 없는 날에는 19살 대학교 1학년 학생의 싱그러운 모습이 나타난다.

며칠 전에, 수업을 끝냈는데 이 학생이 나한테 오더니 어쩌면 2주 후부터는 수업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다. 학기가 다 끝나가는데도 900달러 정도 되는 이번 학기 등록금을 못 내서 학교에서 퇴학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문화권에서 대학교 교수는 월급이 작아서 경제력이 없는 사람으로 모두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선생 이전에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닌가? 이런 사정에도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가난한 분이신가? 이렇게 분개하고 있는데 바로 그날 기도하는 동역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계획하고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같이 일하는 편이 효율적이고 낫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할 도움의 손길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찾은 미소

내가 이 지역에서 가장 존경하는 교역자는 이 소식지에서 조금 전에 언급한 아스카르벡 목사다. 교회 건물이 필요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형식적으로는 내가 훈련시킨 제자이지만 성령께서 직접 키워주신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서는 이런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카작 문화권에서 유일하게 ‘아가’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사람이다. 아스카르벡 ‘아가’ 목사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결혼도 안 한 큰 아들이 몇 년 전에 33 세의 나이로 교통 사고로 죽었다. 파란 불에 건너가는데 옆에서 달려오던 차에 치여서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의인’ 아스카르벡 아가 목사를 봐서라도 이런 사고는 안 일어나게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르벡 아가 목사는 슬픔을 잘 극복하고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목회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모님은 사고가 났던 2013년 4월에 세상이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 미소는 커녕,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으로 시멘트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시카고 지역에 살면서 이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기도 사역을 하는 75세 된 송태길 목사님이 계시다. 이 분의 특징은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면, 그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환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은사가 있다. 송 목사님이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내가 우리 직원들 주변의 여러 병자들을 초청했는데 아스카르벡 아가 목사의 부인도 초청했다. 25 명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한 사람씩 불러서 한 두시간 씩 기도해 주는데 이 사모님 순서가 되었을 때, 어느 순간에 울면서 자기 아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텔레겐, 텔레겐!’ 아들을 천국에서 만나서 안아주고 손을 잡고 대화하기를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아스카르벡 아가 목사도 뒤에 앉아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자정 까지 계속된 집회에서 키모 테라피를 받던, 알튼 아파이의 결혼한 딸의 자궁암이 완전히 치유 받았다. (치료된 것을 후에 병원에서 수치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번 집회에서 가장 감사했던 것은 아들을 천국에서 만난 이후에 얼굴이 완전히 펴져서 감사, 소망, 기쁨 가운데 살기 시작한 그 사모님의 얼굴이다. 아들이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는 설치지 않으련다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 Vine University라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세 명의 한인 교수님들이 이 지역에 와서 세미나를 인도했다. 3일간의 세미나 중에서 나는 내 강의 때문에 참석을 못하다가 둘째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인사 드리러 찾아갔다. 마침 그 식탁에 20여 명의 한인 선교사님들이 둘러 앉았다가 서로 경쟁적으로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 이곳에서 10년 신학교 사역을 성공적으로 했고… 중국에 도착하자 마자 영어 교수로 일을 시작해서 14 년간 일하면서 제자 훈련했고 … 다시 이곳에 와서 대학에서 영어 교수와 먼저 하던 영적 사역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소개가 되고 있었는데 서울의 ‘연예인 교회’에서 오래전에 파송된 이곳의 또 다른 터줏대감 김택주 목사가 한마디 했다.

’이제까지 10 분이 지나도록 공 목사님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직까지 한마디도 말을 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특별한 이력으로 이 지역에서 ‘패스터 콩’과 ‘프로페서 콩’이라는 두가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명함은 나의 수많은 죄와 그 죄보다 더 컸던 나의 교만의 죄를 철저히 응징하고 초토화 시킨 후에야 주신 ‘깨끗한 명함’이다. 다시는 설치지 않고 주어진 이 사명을 조용히 기도로 감당하고 싶다.

 

●공춘택 선교사 선교행전 사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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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작스탄 신학교 졸업생 컨퍼런스
사천성 대학 영문과 클래스
카작 아메리카 대학 강의실
사천성대학 영문과 클래스
영문과 클래스
카작 아메리카 대학
카작스탄 신학교 사역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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