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1:2-4, 2016년 9월 25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야고보서가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시험입니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는 짧은 문안을 끝내고 나서 야고보는 곧바로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시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가장 먼저 시험을 말할까요? 그것은 시험이 우리의 삶에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고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내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흩어진 열두 지파는 예수님을 주로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일까요? 왜 모든 것을 걸고 예수를 믿었는데 고난이 있고 이런 시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룰 수밖에 없었고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답으로 그의 편지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시험이라는 말은 ‘페이라스모스’라는 단어인데 고난을 동반하는 시련의 의미도 있고 유혹의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실제적인 문제가 바로 이 시험입니다. 시련과 유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늘 동반되는 현실이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는지는 성도의 사활이 달려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주에 바울서신들이 신앙의 기초에 해당되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라는 내용들을 주로 담고 있다면 야고보서를 비롯한 공동서신은 신앙의 벽과 지붕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더 많이 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신앙의 벽과 지붕에 해당되는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시련과 유혹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혹은 복음 때문이든, 자기 자신의 죄 성 때문이든 늘 여러 가지 시험, 즉 시련과 유혹을 당합니다. 예수 믿는데도 고통스러운 시련이 있고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갑자기 예기치 않게 많은 곤경에 휩싸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전혀 예상치 않은 때에 시련과 유혹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고 원하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고난과 유혹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신앙의 벽과 지붕을 잘 쌓을 수 있고 없고가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늘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이 고난과 유혹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고보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교회의 스승들은 오랫동안 고난과 시련을 피해야 할 악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인내와 성숙을 만들어가기 위해 허락하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고, 베드로사도도 벧전1:6절에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페이라스모이)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시험이 또 다른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수 믿어 고통 없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속화의 결과임을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고생과 고통은 적게 받고 즐겁고 편한 것이 많아야 한다고 부추기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성도들에게는 기쁘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시련이 우리 속에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보고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얻지 못하면 온전하고 구비되기는커녕 부족함과 결함투성이의 인생으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고난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인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야고보의 말처럼 시련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시련 속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오는 결과를 깊이 생각하고 이런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야고보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 형제들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련을 만났는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유혹을 당하는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시험 속에서 우리는 종종 무너집니다. 시험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황당하게 하고 경황이 없고 두렵게 합니다. 시험은 그동안 내가 의지하던 많은 것을 부셔버리고 기대고 있던 담벼락을 넘어지게 하고 우리 자신을 깨트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그것도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뻐할 수 있습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파산 카란’으로 오로지 기뻐할 이유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데 기뻐할 이유밖에 없다고 합니까? 시험 자체는 기쁨이 아니라 아프고 괴롭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온전히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의 시련이 무엇을 가져다주죠? 인내입니다. 이상하죠? 시련을 당하여 고통 속에서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데 인내가 만들어집니다. 인내는 어떤 주어진 일이나 상황을 견뎌내고 유지해나가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이상한 일이 이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여러 가지 시험, 곧 온갖 종류의 시험이 옵니다. 믿음으로 인한 핍박과 어려움만 아니라 스스로 욕심에 빠져 자초한 어려움도 있고, 환경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당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는 무너집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상합니다. 그런데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깨어진 그 자리에 부서진 그 자리에 그동안 잘 몰랐던 믿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 시련이라는 말은 ‘도키미온’, 연단, 혹은 검증의 의미입니다. 평소 잘 드러나지 않던 어떤 본질이 무엇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그 진정성이 드러나 보다 온전한 모양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 흔들리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무너지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비로소 그의 속에 있는 믿음의 진가를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모든 잡동사니가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험이 오면 분과 노와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과 절망만 내어놓습니다. 신자도 처음에는 비슷합니다. 어려움을 겪으면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한숨, 원망, 불평과 의심, 두려움, 억울함, 좌절들이 튀어나오죠. 그러나 놀랍게도 어느 순간 이 어려움이 지금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사슬을 끊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픈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알게 되지만 반대로 이런 자기 안에 자기가 만들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결단하지 못하던 것들을 결단하고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이고 견디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 혹은 믿음의 검증을 통해 인내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검증하고 확인시켜서 인내라는 놀라운 열매를 만들어내면서 더 높은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중요한 것들은 오래 참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인내하고 오래 참아야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중요한 인내를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4절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회용 반창고처럼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온전하고 구비된 그릇으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시험은 이것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은혜의 통로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번역은 조금 아쉽습니다. 우리 말 번역은 우리가 인내를 이루어가는 것이 강조되어 있지만 원문은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하여 만들어내시는 인내 자체의 역사가 훨씬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을 안다면 “인내로 하여금 그 일을 끝내도록 하라”의 의미이죠.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구비됨과 온전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인내가 발동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 역사하는 인내가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견디게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의도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그렇게 허락되는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기면서 인내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를 때 신앙의 집에 벽이 생기고 지붕이 얹어집니다. 가난하지만 부요한 사람이 될 것이고 애통하지만 하늘의 기쁨과 위로를 아는 사람이 될 것이고 날마다 무너지지만 날마다 세워지는 온전한 사람으로 구비되어 갈 것입니다. 

본문의 순서에 따라 다음에 또 보겠지만 약1:12절을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디어 내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 안에서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었는데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인색하던 사람이 긍휼이 넘치는 사람이 되며, 급하고 사나운 성질이 죽어가고 거짓을 말하던 입술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진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들보다 잘 먹고 잘살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 생명과 거룩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바라보게 되고 그에 속한 성품들을 열매로 맺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놀라운 결과들입니다. 아직 여전히 부족하지만 내일이면 싹이 틀 것이고 줄기가 돋을 것이며 봉우리가 달리고 꽃이 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기대되지 않습니까? 흥분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아는 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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