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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 교회 안의 장사치들 (3)아론처럼 산 밑에서 금송아지 만드는 목사들
한명철 목사┃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 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한명철 목사의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두란노), 《살아난다 성경암송》 (두란노), 《성경통달에 이르게 하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인봉된 책》 (쿰란출판사), 《개봉된 책》 (쿰란출판사),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 (본출판사) 등 약 30여권이 있다.

모니즘에 물든 교회를 향한 독침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의 손봉호 교수가 쏘는 조국교회에 대한 일침은 늘 아프다. 독성 때문이다. 독성에 긴장하면서도 두렵지 않은 것은 독성이 지닌 극약 처방으로서의 효능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만큼 부패한 교회가 없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수년 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서 던진 말이다. 맘모니즘에 물든 교회로서는 항변할 말이 없다. 5만 원 권 지폐가 나오면서 애정의 대상도 배춧잎에서 감잎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왕이 지고 신사임당이 떴다. 여권의 신장을 보는 듯해 뿌듯한 느낌도 있다.

돈에 냉소적이지 못한 조국교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맘몬의 종이 되어 허겁지겁 살아가는 신자들을 나무라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자본주의를 대체할 기독교적 경제 가치관이 없는 마당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신자들은 안팎으로 시달린다. 나는 조국교회에 기인의 출현을 은근히 기대한다. 스스로 가난 속으로 들어가 가난을 익히며 평생을 그렇게 살려는 수도사적 정신의 소유자들을 기다린다. 언젠가 벌침을 맞아보았다. 따끔했다. 벌은 죽으며 마지막 침을 쏜다. 일침도 일침 나름이다. 스스로를 죽음에 내놓으며 쏘는 벌침이 아니라면 효능은 일시적이다. 죽으면서 쏘는 벌침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쏘는 외침이 아니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벼랑 끝에 매달려 부러지기 직전의 한국교회

맘모니즘의 경계는 이미 시효가 지났다. 경고음을 무시한 조국교회는 맘모니즘의 수렁에서 빠져 이미 허우적대고 있다. 위기를 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안을 내놓은 이는 많지 않았다. 그 대안이라는 것도 실천을 보이면서 제시한 대안이 아니었기에 파도가 한 번 휩쓸려왔다 포말만 남긴 채 사라지듯 그렇게 왔다가 속절없이 사라졌다. 조국교회의 위기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이 제일이요, 위기 상황이 웬만큼 급해서가 아니라 벼랑 끝에 매달린 나무뿌리가 뿌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있는 절박 상황에 있다는 현실이다.

성직 매매는 전혀 새로운 이슈가 아니고 일상이 되어버려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오가는 액수의 단위에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다. 6만 개를 상회하는 교회의 숫자와 천만을 육박하는 교인의 숫자는 단시간에 거둔 수확치고 대단하지만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피아노의 건반 “미”만 쳐댔는지 미미하다. 교회의 원위치 확보와 신앙의 회복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끊임없지만 왜곡된 영성이 그 길을 가로막고 기득권층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으로 실효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훼방꾼을 제거하라!

아론처럼 산 밑에서 금송아지 만드는 목사들

1998년 한국에 불어 닥쳤던 금모으기 열풍은 IMF자체보다 더 뜨거웠다. 세계가 놀라고 한국인 자신들도 놀랐다. 국민적 연대감과 살신성인의 실천적 행위가 악명 높은 IMF 감옥에서 이 나라를 합법적으로 탈출시켰다. 아이의 돌반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금덩이들이 모여 어디로 갔을까? 강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가듯이 이전의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의 금붙이와 금덩이들은 흐르고 흘러 유대인들의 손으로 흘러갔다. 화폐란 일단 유사시에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한화의 가치도 기축통화인 달러 대비 폭등도 할 수 있고 폭락도 할 수 있다. 재앙의 날이 될수록 종이나 신용카드보다 환영받는 것은 금이다. 지금은 가상화폐의 등락에 가슴 조리며 꿈 잃은 젊은이들이 투자와 투기의 경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금권(金權)이란 말 그대로 금이 권력이란 말이다. 수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오래 전에 금시계인줄 모르고 선물로 받았던 시계를 처분했다. 넉넉히 값을 쳐준 덕분에 유익하게 썼다. 그때 금의 위력을 보고 놀랐다. 맘몬에게는 돈이 임이고 임이 금이다. 그래서 그는 사탄의 대리자로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한다. 목회자도 맘몬의 노예가 된 군중들을 휘어잡지 못하면 동역자가 말씀을 받기 위해 산에 오를 때 아론처럼 산 밑에서 황금송아지 만들기에 바쁘다.

교회의 크기는 목회자의 영력인가?

교회에서 자정 능력이 사라졌다는 푸념을 듣는다. 더 큰 문제는 자정의 의지를 스스로 접은 듯한 태도다. 교회는 세상의 목소리를 악마의 고함 정도로 취급하고 들은 체도 안한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자세다. 어떤 교회는 경상비의 50%를, 어떤 교회는 90%까지 선교에 쏟아 붓다시피 한다. 허나 전체 평균으로 따지면 10%를 넘길까 말까이다. 자체 유지비와 인건비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선교비 지출도 선호하는 지역이나 관계 중심으로 집행되기에 선교 현장에서까지 양극화 현상이 생겨난다.

영양실조로 얼굴에 버짐이 생긴 선교사의 자녀가 있는가 하면 외국인 학교에서 여유 있는 학창 시절을 보내는 선교사의 자녀도 있다. 그것을 선교사의 개인 능력이라 섣불리 진단하지 말라! 대형교회 목사보다 은혜로운 설교를 더 잘하는 작은 교회 목사들은 많다. 그러면 설교 외의 다른 중요한 요인들 때문에 대형교회 목회자나 작은 교회를 목회한다고 결과론적으로 말하는 부류들도 있다. 경멸 받아 마땅한 유형의 사람이다. 아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고자 대형교회 목회자로 세우셨다면 어쩔 텐가? 작은 교회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머무르게 하려고 그랬다면 무어라 답변할 것인가?

통일의 시대, 북한 선교도 금권의 힘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장 먼저 들어갈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자들일 것이다. 수려하고 경관이 뛰어난 종교 부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가장 빠른 시기에 북한곳곳에 교회와 기도원들이 무수히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을 늦추시는 이유도 그 꼴사나운 모습을 되풀이해서 보기 싫어서일지 모른다. 맘몬의 우상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해서다. 통일감사 연합예배를 비롯해서 구국기도회, 7천만민족복음화협의회, 통일한국부흥사협의회, 합동, 통합, 한기총과 한교련도 합해서 중복되는 첫 자를 떼고 기교련으로 탈바꿈할지도 모른다.

통일이 되면 예수교와 기독교로 나뉘었던 교단 명칭도 예수기독교로 바뀔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현상 이면에는 돈 잔치가 벌어진다. 흥청망청 쓸 것이다.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지던 평양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능가하는 최첨단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수조 원이 소요되어도 강행할 것이다. 분단국가로서 맘몬의 단맛에 취했던 조국교회가 통일국가로서 차려진 밥상에서 여유롭게 꿀맛을 음미할 것이다. 안개처럼 희미한 내일에 대해선 눈을 감고 밝은 오늘의 삶에 맘몬과의 통정을 즐기며 기운을 쓸 것이다.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은 삶을 기대하며

대형교회 목회자의 자녀들은 재벌 자식 부럽지 않다. 이는 예수 이름 팔아 치부한 흔적이 아닌가? 교회가 대우할 만해서 대우한다 해도 헌금이나 구제와 선행 때문에 쌓이는 재물이 없어야 한다. 목회자가 부요한 것이 흉은 아닐지라도 자랑도 아니다. 반대로 목회자가 가난한 것이 자랑은 아닐지라도 흉도 아니다. 물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가톨릭의 신부들이나 구세군의 사역자들이 훨씬 성경적이다. 아굴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직자는 기본적으로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상태의 삶이 은혜롭고 편하다.

성직자는 가난해도 불편하고 부요해도 불편하다. 가난하면 삶이 불편하고 부요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경제적으로 부요한 목회자들과 가난한 목회자들을 균등화시키는 운동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교회 크기에 상관없이 성직자의 생활비는 일괄적으로 통일시키고 목회 활동비만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시스템도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살 텐데 교회가 죽어야 세상이 산다고들 한다.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살 텐데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들 한다. 교회가 너무 부요해졌고 그 중심에 목사가 있다는 지적이 아니겠는가? 정말 목회자의 꼴이 말이 아니다.

윤홍식 기자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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