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81) - 시편(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44:22).

시편은 인생의 질곡과 고통 속에서 간구를 통해 가깝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이며 시이다. 다른 성경은 초월적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으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계시이지만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기도와 찬양이 만나는 하브루타(친구, 벗, 만남)대화의 책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탄식(탄원) 시편은 인간의 실존에서 대적자(원수)의 압제로부터 부르짖는 간구를 보여준다.

탄식이 커져서,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고 화(분노)가 치밀어서 나오는 대적자에 대한 저주로 나타나는데, 이 시편이 저주 시편으로서 탄식시편의 별종(別種)이라고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137:7-9).

탄식이 저주로 바뀌는 경우와 탄식이 구원과 감사, 찬양으로 바뀌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은 감사와 찬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저주시편(Imprecatory Psalm, 시15, 시19:14; 시62; 시109)으로 남는 것을 본다.

저주는 기독교 신앙에서 보면 용서와 관용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시편 기자의 신경증으로 나타나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 고통이 심한 결과 분노로 표출되는 정신 현상으로 보여진다. 저주가 죄악의 악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부부 싸움하다 보면 극한 상태의 말다툼을 하다보면 화가 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서 시편 기자는 대적자의 문제로 인해 극한 마음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다. 그 표현은 하나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강한 항변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이 심하고 어려움이 크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저주와 축복이 어느 누구에게 한 가지 임해야 한다면, 축복자와 저주자가 신앙자에게 축복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반된 상황에서 축복으로 역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저주시편은 축복으로 바뀌게 해달라는 억지 기도의 다른 형태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는 강한 호소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찌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시109:17, 28). 따라서 저주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원수 사랑으로 나가는 중간 과정의 심리적 현상이며,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의 시편 고백이 예수 십자가 사랑을 이해하게 하는 중간 단계이다.

시편의 탄식시는 바빌론 탄식시와 유사한 구조로 나타난다. 이는 가나안을 통해 이스라엘에 알려졌을 것이다. 고대 근동의 기도문학과 연관되었고, 구약 시편의 두드러진 특징은 공동체와 개인에게 고통과 질병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그 전환점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 계명을 적용하려는 관점이 있다. 하나님은 치료자이시며 생명을 거두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분이시다(출15:26; 삼상2:6).

탄식시의 원래 맥락은 찬양시와 같이 의식(liturgy)이다. 공동체 탄식은 공동으로 애곡하는 공동의 애도식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원래 백성들은 군사적인 압제의 상황에서는 금식하며 나갔고, 자연 재난과 성전 파괴의 이후에는 정기적인 금식일을 가졌다(슥7:3이하). 대부분 공동체 탄식시가 포로시대나 포로이후 시대에 기원하며, 그 탄식시가 어떻게 오늘날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 설명된다(시44; 74; 79편; 시83, 85편).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렵혀 땅에 엎었나이다”(시74:6-7).

탄식시가 인간의 실존과 고통 속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라고 하면 감사시와 찬양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기도의 응답을 통한 멀리 계신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시편으로서 통합적 하나님(Integration)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왕시(왕즉위 시편)은 그리스도(메시아) 예수의 왕직과 구속주 하나님의 언약 신학을 보여주는 시로써 구약 신학의 완성으로서 대표적 제왕시편으로 나타난다(시2; 18; 20편). 결국 토라 시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형상(본질)을 추구하는 개혁의 기준을 제시한다(시19; 119편). 그래서 탄식시편이 인간 고뇌의 상태와 질병, 핍박, 감옥 투옥의 상황에서 나온다.

개인 탄식시는 예배의 상황에서 대부분 나온 것이다(시3; 5-7; 13; 22편). 어떤 단일한 상황에서 이 탄식시가 나왔다고 볼 수 없다. 시편 7편, 26편은 고소를 당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고, 시편기자가 병든 상황에서 탄식한다(시38; 41편). 아픈 사람이 공동체에 다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탄식시편이라고 보기도 한다(베이어린, 세이볼드). 결국 시편은 하나님과 함께 공동체의 회복을 간구한다(쉬미트).

탄식의 상황이 어떠하다 할찌라도 공동체 탄식이나 개인 탄식시는 하나님 앞에서 일반적인 인간의 상황이 탄식하는 상황이고 이것을 벗어나려고 한다. 시편 90편은 인간의 순간성(일시성)을 보이며(시103:14; 104:29이하), 속죄 시편(시51; 130편)은 질곡에 대한 탄식 대신에 죄의 고백과 용서의 탄원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탄식시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과정에서 고난을 통한 하나님 체험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사유(용서)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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