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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회의<알미니우스 논쟁>

‘칼빈주의’는 루터파가 칼빈파를 규정한 개념이다. 그리고 도르트 회의의 결과를 칼빈주의 5대 교리 혹은 5대 강령(Five-point Calvinism, TULIP)이라 일컫는다. 2018년은 도르트 회의 400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17세기 초 도르트 회의의 배경을 살피는 것은 우리 시대의 신앙 이해에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는 40여년 간의 독립 전쟁(1568-1609)을 진행해서 독립권을 확보했다. 공식적인 독립은 ‘30년 전쟁’이 끝난 이후 1648년에 채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서 국제적인 효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칼빈의 개혁파 신학으로 국가를 형성했다. 레이던 대학은 오렌지 공이 1575년 스페인에서 첫 지역을 획득한 지역에 대학을 세운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레이던 대학이 개혁파가 얼마나 학문을 사랑하는 것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1610년 독립적 지위를 찾은 뒤에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제자들인 알미니안(Arminian)이 항론(抗論派, Remonstrants)을 일으켜 항의서(Remonstrance)를 제출했다. 개혁파 진영은 개혁파 범 종교회의를 개최했는데 1618년에 개최된 도르트 회의이다.

도르트 공회의에서 논의한 알미니안 논쟁의 이야기에 전에 알미니우스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알미니우스(Arminius) 라틴식 이름은 Hermanszoon이다. James는 영어이고, 라틴어로는 Jakob이다. 알미니우스는 마르부르크(1575)와 레이든(1576-1581), 바젤(1582), 제네바(1582, 1584-1586)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제네바에서 칼뱅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Théodore de Bèze, 1519-1605)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1588년부터 1603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개혁파 목사로 사역했으며, 1603년부터 레이던 대학(Leiden University)의 신학 교수로 재임했다. 그는 예정과 자유 의지, 은혜, 속죄, 성도의 견인에 관해, 벨직 신앙 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표현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가르침을 계승한 베자의 견해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알미니안 논쟁을 불러온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칼빈주의자로 일생을 살았던 덕망 있는 사상가였다. 단지 예정론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직도 ‘4 point 튤립(Four-point Calvinism, TUIP)’을 주장하는 경향을 가진 부류가 있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항론을 하면서 도르트 공회의가 개최되어 배격되면서 알미니안은 개혁파에서 빠진 집단으로 섰다.

디릭 코른헤르트(Dirck Coornhert, 1522-1590)라는 위인이 있었다. 그는 법률가였고 합리주의적 인물로 이중예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개혁파 사람들은 신학적 견해에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반박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네바에서 돌아온 젊은 신학자 알미니우스가 적합해 보였는지 그에게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생한 것이다. 코른헤르트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의 주장을 검토하는데 그 주장에서 오히려 설득을 당한 것이다. 코른헤르트의 주장처럼 칼빈주의 예정론에도 비판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그 사상을 공표하면 문제가 야기될 것임을 알고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과정에 1603년 알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에 대한 불신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같은 대학 신학부 교수였던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와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알미니안 논쟁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문제시 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무조건적인가 하는 문제였다. 알미니우스는 타락전예정설(supralapsarianism)을 반대하고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전에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가를 예지하셨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기회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반대한 것이다.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루스의 격렬한 신학 논쟁(예정론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알미니안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1609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그의 제자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s, 1583-1643)가 교수직을 계승했고 스승을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논쟁을 계속했다.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알미니안 지지자들을 축출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신학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알미니안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했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알미니안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항론(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당시 총독은 빌헬름 오렌지(Willem Ⅰ, 1533-1584) 공의 아들 마우리츠(1567-1625)가 암살된 아버지를 이어 지도했다. 국정을 관장할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통치는 빌헬름의 충신이었던 올덴바네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 1547-1619)의 수중에 있었다. 올덴바네펠트는 관용론자였고 교회가 국가 휘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자였다. 알미니안 또한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올덴바네펠트를 포함한 정부지도자들은 알미니안을 후원했다.

이들은 아르미니우스가 가르친 것을 기초로 ‘항론 5개조’를 작성하여 네덜란드 교회의 교리적 입장에 대한 공식표현인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와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Heidelberg Catechism, 1563)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미니안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예지예정 :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를 예지된 믿음으로 선택하거나 불신앙을 근거로 유기하신다. 2. 구속 : 그리스도는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3. 죄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고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4. 은혜 :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편에서 받아드릴 수도 있고 거절할 수 도 있으며,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5. 성도의 견인 : 한번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종국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른다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은 성경적 근거가 모호하다. 후에는 중생한 신자라도 신앙을 저버리고 구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알미니안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5세기 펠라기우스(Pelagius)의 주장과 거의 동일하다. 알미니안은 5가지 항목 이외에도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국가가 어떤 교리가 바른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안 논쟁이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자 1615년 일부 목사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고 분리를 선언했다. 그런데 마우리치는 알미니안과 에라스트주의와 대립했다. 관용파의 대표자인 올덴바네펠트와 크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를 체포했다. 그리고 1617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회의 소집을 지시하고 1681년에 도르트에서 공회의를 개최했다.

<도르트 회의>

도르트 회의(The Synod of Dort)라고 말하는데, 도르트레히트(Dordrecht)의 축약어이다.

회의를 위해서 네덜란드 정부는 유럽의 여러 나라 교회에 대표 파송을 요청했다. 잉글랜드,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프랑스 교회는 당시 로마 가톨릭적인 정부 때문에 대표단을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회의는 라틴어로 진행했다. 1618년 4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7개월 동안 진행했다. 7개월 동안 154회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알미니안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했고, 항론 5개조 속에 있는 내용과 성경의 증거들을 비교, 검토했다.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안의 5개조의 항론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도르트 회의가 끝난 후 관용파의 지도자인 올덴바네펠트는 1619년 5월 참수형에 처해졌고, 도르트 신경에 서명을 거부한 100여명의 목사들은 알미니안으로 간주되어 국외로 추방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안에게 종교적 관용이 주어진 때는 1625년 이후였다.

회의에 알미니안 항론파는 기소가 아닌 피고의 자격으로 참석해서 자기 신학 입장을 진술했다. 항론자를 대표하여 시몬 에피스코피우스(알미니우스 제자)가 항의서로 제출한 5개 항에 대해 설명했으나 거부되었다. 참가자들은 알미니안의 주장에 대한 단순한 거부는 충분치 않다고 보고 칼빈주의적 입장을 작성했다. 그것이 도르트 신조이고 이 문서의 내용을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하고, 네덜란드에서 가득한 ‘튤립(TULIP) 신앙’이라고 한다.

출처: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고신대학교 출판부. <개혁신학 용어사전>, 알맹e.

고 건(광신대 3년, 광신형람)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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