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4; 골로새서 3:21; 히브리서 12:4-11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는 사도행전 2장으로부터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가 되심을 입증하는 사건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르는 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무엇보다 먼저 아내는 주님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남편은 주님 때문에 자기 아내를 생명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자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부모를 경외하고 공경하며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오늘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의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에베소서 6장 4절과 골로새서 3장 21절에 중복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에 중복되는 것입니다. 그 중복된 내용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비들아”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녀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아버지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비는 부부의 대표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자녀 교육이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적어도 자녀 교육을 책임져야 할 제 1 순위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부분을 우습게 여기고 오직 어머니만이 자녀 교육에 관여하게 될 때 자녀들은 온전한 교훈과 양육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들어 자녀 양육에 반드시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합니다.  

또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중복된 내용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또한 어떤 상황이 자녀들을 노엽게 합니까? 

먼저 골로새서에서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할 때 원어는 (에레씨조)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골로새서는 “낙심할까 함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자녀들을 노엽게 하면 그 결과는 자녀들이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낙심하다”로 번역된 헬라 원어를 보면 (아쓰메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포기하다, 낙심하다, 용기와 동기 부여를 상실하다, 기가 죽다)라는 뜻입니다. 즉, 골로새서에 따르면 아버지의 그릇된 말이나 행동에 의해 자녀들의 마음에 노여움이 생기고 그로 인해 낙심한다는 뜻입니다. 삶 속에서 기가 죽고 용기와 동기를 상실한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에베소서 4장에서는 “노엽게 하지 말라”의 원어는 (파로르기조)입니다. 이 뜻은 분한 상태를 야기시킨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에베소서 4장 26-27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즉, 자녀로 하여금 분한 감정을 품게 만드는 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한 상태가 유지하게 되면 “마귀에게 틈을 주어” 마귀에게 걸려들면서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계속적인 죄를 범하며 비뚤어진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통해서 “자녀를 노엽게 할 때”의 위험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낙심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부모들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행위이며 심지어 죄의 상태로 몰아넣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나아가 평생 자녀들 때문에 고생하기 싫다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가 그들의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것을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그것은 억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인격모독, 사랑을 거절함, 무관심 및 과잉보호, 그리고 부모의 범죄 행위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자녀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부당하게 매를 때리거나 책망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양심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합당한 아버지의 책망과 매를 맞는 자녀들의 마음에는 ‘노여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성과 양심으로 평가할 때 부당한 매나 욕설이나 폭행은 그들 마음에 독과 노여움을 만듭니다. 특히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아버지나 어머니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매를 맞거나 욕설을 당하거나 잔소리를 듣게 되면 당연히 노여움이 생겨납니다. 특히 아버지가 혈기를 부리며 자녀에게 욕설과 폭력을 가할 때 그 자녀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와 함께 노여움과 독을 품게 됩니다. 그러한 독과 노여움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지 않는 한 평생 그 아이의 마음 속에 남아 그 아이를 비뚤어지게 하거나 무력한 낙심에 있게 만듭니다. 

둘째는, 인격모독을 당할 때입니다. 가령, 자녀들을 노예나 하인처럼 대하며 부려먹을 때, 또는 그들을 전혀 믿어주지 않을 때 그들은 인격 모독을 느낍니다. 물론 노골적인 인격 모독의 발언은 깊은 상처와 노여움을 남깁니다. 특히 어떤 실수를 할 때 못난 부모들은 함부로 막말을 합니다. 
“너 같은 놈은 전혀 믿을 수 없어. 저기 밖으로 꺼져 있든지 방에 처 박혀 있든지 내 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너 같은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왜 태어나서 이렇게 나를 속상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런 말을 하며 아이 눈을 째려보고 눈을 찌푸리면 아이들의 마음에 낙심과 함께 독이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이들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수가 많습니다. 그릇도 잘 깨뜨리고 물건을 들다가도 엎지르고 길에서 넘어지고 물건을 잃어 버리는 등,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실수는 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실수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앞으로 더 주의하라고 당부하며 안아주면 되는 것이지, 그러한 실수로 부모가 분을 내며 매질을 하고 끝없는 잔소리를 하면, 그 아이는 부모가 자기보다 물건이나 다른 것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믿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실수 하더라도 끝까지 참으며 믿어줍니다. 고의가 아닌 실수는 기질 및 행동의 차원이기 때문에 몇 번의 시행 착오와 훈련에 의해 쉽게 고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니라면 너무 화를 내며 자녀들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랍니다.  

또한 끝없는 비교 의식은 보이지 않는 인격 모독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기쁘게 해 주기를 원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 및 특히 가정에서 형이나 동생과 비교될 때는 연약한 자녀들이 늘 심적 부담을 갖게 되면서 낙심하거나 노여움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족 안에서 자녀들을 비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나는 잘 하는데 너는 왜 매일 말썽만 부리니.” 
“형은 공부를 잘하는데, 왜 너는 그 모양이니”
“동생은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 없는데 왜 너는 매일 물을 엎지르고 그릇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웃집 철수는 착하다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 돼 처먹고 말썽만 부리니? 꼭 아빠 닮아서, 또는 엄마의 못난 것만 닮아서 못난 짓만 하며 그 모양이구나?” 
이렇게 말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에게 기쁨이 되겠니 슬픔이 되겠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니 슬퍼하시겠니?”라고 말하기 바랍니다. 비교 발언은 곧바로 부모가 편애하는 것으로 비치게 되고, 따돌림을 당하는 자녀는 ‘나는 한심한 존재’라는 자괴감을 갖고 늘 기가 죽어 있거나 혹은 가정보다는 밖으로 떠돌기를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각각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특히 가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또한 아버지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철저하게 새겨져야 합니다.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24 …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0-25)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연약한 자녀일수록 더 돌보심 같이 부모 역시 가족 중에 더 연약한 지체를 더 돌보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셋째는, 부모가 자녀들의 사랑을 거절할 때 그들 마음에 노여움이 생깁니다. 어린 자녀일수록 부모에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귀찮게 여기면 그들은 마음 둘 곳을 잃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낙심과 고독이 깊어지고 오래되면 부모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들의 이야기 듣는 것을 거절하며 또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갖는 것을 귀찮게 여깁니다. 강아지는 안아주면서 자녀들을 안아주지 않습니다. 취미나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가지만 자녀들과 나가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습니다. 일은 부지런히 하지만 자녀들과 그들의 관심 거리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이처럼 부모들이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거나 싫어하면 아이들은 눈치를 보면서 점점 부모로부터 멀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 마음에는 숨은 노여움이 계속 쌓입니다. 그들은 훗날 경제적으로 독립하거나 가정을 꾸리게 되면 부모를 업신여기거나 부모를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언제든지 맞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시간이 참으로 부족하면 자녀들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 아이들이 이해를 하고 부모가 시간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만일 부모가 ‘이따가’, ‘다음에’라는 약속만 제대로 지킨다면 그러한 부모에게 자녀들이 낙심하거나 노여움을 품지 않습니다.  

넷째는, 무관심과 방치, 또는 과잉보호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부모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은 하면서도 공부에 반드시 필요한 책이나 물품을 구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빌려서 해, 네가 알아서 해’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정말로 너무 가난한 경우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돈이 아까워서 이렇게 대답하는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그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때 자녀들은 공부를 포기하게 되면서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쌓이면 자기 인생은 부모의 도움이 전혀 없어서 망쳤다는 피해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 후 낙심과 함께 노여움이 생겨납니다. 

자녀가 선한 목적으로 부탁을 했는데 만일 부모가 그 부탁을 들어줄 능력이 없다면 자녀와 함께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그 필요를 마련해 보려고 노력한다면 자녀들은 낙심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철이 들게 될 것입니다.  

한편, 그 반대로 지나친 과잉 보호 역시 자녀들을 망치며 심지어 그들 마음에 노여움을 품게 합니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 중에는 자신들의 야망을 자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너는 꼭 의사가 되어야 해, 너는 꼭 전교 1등이 되어야 해, 너는 꼭 대기업 사장 아들과 결혼해야 해. 그렇게 하려면 너는 이러저러한 준비를 하고 이러저러한 자격을 갖추어야 해. 엄마가 기도하며 도와줄게.” 

혹은 선한 마음으로 ‘이 아이가 지금 시절을 잘 보내어야 하니까 내가 철저하게 도와주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간섭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간섭은 부모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의무이지만 도를 지나칠 때 과잉보호와 간섭이 됩니다. 아무튼 도를 지나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녀들의 마음에 낙심과 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 중에는 계속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학교 성적 등을 가지고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30등 밖에 할 수 없는 아이에게 계속적으로 1등을 요구하며 압력을 넣으면 마침내 그 자녀는 부모를 싫어하게 되고 심지어 반항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들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또한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늘 노파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의 모든 행동과 시간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많은 규칙을 세우고는 한시라도 자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자녀가 몇 시 몇 분에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계속 전화로 확인하며 감시합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의견과 제안을 전혀 수용하지 않고 그저 부모 말만 따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과잉 보호를 받는 자녀들은 자신들의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는 부모를 속이기 시작합니다. 또한 부모의 감시로부터 탈출을 꿈꾸게 됩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부모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면 갑작스러운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고 심지어 끔찍스러운 반항적인 일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깊은 우울증에 빠지더니 자살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부모들은 자녀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어주며 그들 스스로 바른 길을 결정하며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바른 성품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자녀에 대해서는 책망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또한 음란물이나 게임 등, 그릇된 것에 중독된 자녀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기도와 관심과 통제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신뢰하며 자녀들은 어느덧 부모의 믿음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면서 온전한 길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다섯째는 부모의 죄악의 노출, 그리고 그로 인한 가정의 수치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부모를 향한 노여움과 독이 생겨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약속을 하고 상습적으로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은 부모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됩니다.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부부 싸움을 하며 서로에게 욕을 하며 죄를 지을 때, 혹은 부모 중 하나라도 사회적인 죄악에 연루되어 가족 전체가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될 때 자녀들은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게 됩니다. 이때 그들은 부모에 대해 분과 노여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서라도 그들 앞에서 죄를 범하거나 또는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다투려면 아이들이 볼 수 없는 공원이나 저 멀리 해변가 또는 깊은 산속의 별장에 가서 다투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킬 죄악을 절대로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망신 때문에 자녀들이 사방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자녀들을 노엽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한편,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갔을 때는 분명히 잘못을 지적하고 때로는 매를 대어서라도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주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 중에 지혜입니다. 

징계를 할 때는 지혜로운 부모라면 매를 댈 것이라는 경고를 미리 할 것입니다. 이 방법은 정확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입니다. 이때에도 자녀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다시 약속을 받아낸 후 용서해 주고 또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번에 또 용서할 테니 다음 번에는 그러지 말아라. 또 이런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매를, 또는 어떤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경고를 분명하게 한 상태인데도 도를 넘어서서 죄를 범한다면 그때는 그 자녀를 책망하거나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그들에게 노여움과 분, 또는 낙심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을 받을 때 시원해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모에게 와서 고마워하기도 합니다. 왜요? 자신들의 양심이 부모의 징계에 찬성하며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2:15)”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잠언 29장 17절)”

잘못된 길을 걷는 자녀를 그냥 방치하는 것은 결코 부모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잘못을 일깨워주고 바른 길을 걷게 하는 것이 부모의 참 사랑이며 올바른 양육입니다. 

이에 에베소서의 본문을 보면, 우리 자녀를 노하게 만들지 말고 그 대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로 말합니다. 특히 훈계는 양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훈계는 원어로 (파이데이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의로 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다, 가르치다, 반복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벌과 상, 그리고 꾸지람과 칭찬의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즉, 벌과 상을 통해, 그리고 책망과 칭찬을 통해 계속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을 훈계라고 합니다. 이에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경에 대해 말할 때 (파이데이라)를 “의로 교육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즉, 가장 유익한 자녀 양육은 성경으로 그들을 의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 5절, 7절, 8절, 11절 역시 (파이데이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 개정은 (파이데이아)를 ‘징계’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자녀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알려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은 죄로 인하여 망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부모들은 죄를 지은 자녀에게 합당한 벌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히브리서 12장에 언급된 것처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노여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 전 벌을 내리는 목적을 자녀에게 알려주고 그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즉, 징계의 목적은, 물건을 다시는 깨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자녀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이 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징계를 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욕심이나 착각이나 편견에 의한 징계입니다. 오직 십계명에 저촉되는 것에 대해 징계하기 바랍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것에 대해 징계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관용하기 바랍니다. 

또한 교훈과 훈계는 (누쎄시아)라는 원어를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라고 하면서 훈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교훈과 훈계는 자녀들로 하여금 주의 진리와 섭리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를 깨닫도록 교육하고 훈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자녀의 거룩함을 위해 징계할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18 묵시(계시의 말씀)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5, 17-18)

우리의 자녀 징계는 죄를 징계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잠 1:7-9)

그리고 부모는 말로만 교훈하거나 징계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자녀들에게 삶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주께서 맡기신 양 무리라고 여기고 지혜와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업은 믿음을 물려주는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돈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복음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새언약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쉬지 말고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하도록 격려하며 인도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평생토록 가장 위대한 영적인 도움과 도구가 될 것입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5, 17)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6-8)

인간들 중에 가장 지혜롭던 솔로몬이 인생의 쓴 맛을 본 후에야 뒤늦게 큰 깨달음 가운데 자녀들에게 교훈합니다.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 3:1-8)

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아버지의 교훈과 훈계입니까? 이러한 교훈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어찌 이 세상의 악과 어둠에 물들겠습니까? 참으로 우리 부모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 자녀들을 주의 말씀과 복음으로 교육하고 훈계하기를 바랍니다. 

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 앞에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가 어릴 때는 가능한 자주 가정 예배를 드리기 바랍니다. 가정 예배는 그들 평생에 큰 경건의 유익을 줄 것입니다. 

또한 어릴 때에 교리 문답을 많이 읽도록 하고, 장성하기 전에 성경을 여러 번 읽도록 도와주기 바랍니다. 제 생각으로는 20세가 되기 전에 10독 이상 성경을 읽은 자녀들은 성경과 신학, 그리고 교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 계속 바른 진리와 신앙을 찾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결혼도 주의 뜻대로 할 것이며, 직장도 주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서 더욱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쓰임 받는 일꾼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들이 권위 질서를 지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본으로 보여주기 바랍니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한 부모들의 섬김과 사랑을 자녀들이 볼 때 그들 역시 나중에 자신들의 부모가 늙게 되면 어릴 때 본 부모의 모습대로 그대로 따라서 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자 부모에 효자 자녀들이 나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나 목사님을 향한 공경하는 태도 역시 자녀들이 그대로 물려 받습니다. 반면, 교회나 사회에서 권위 질서를 무시하는 자녀들은 반드시 그 삶이 비참과 실패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패망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권위질서에 순복하는 겸손을 가르치기 바랍니다. 잘난 척을 할 때 잘한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또한 그가 잘 생기고 예쁘고 지혜가 많아 공부를 잘 하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연약한 자들을 돌볼 줄 알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재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은 끝이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일 성수하는 모습, 말씀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습, 복음을 알게 된 기쁨과 확신, 원만한 교우 관계 등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은 믿음 안에서 안정을 느끼면서 영적으로 쑥쑥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평안하고 실력 있는 복음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부모들의 이상적인 부모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자녀 교육의 이상형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온전한 부모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온전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나는지를 확인하고 싶으면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들을 칭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와 진리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바른 부모 아래에서 바르게 양육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을 받으며 귀중히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의 부모 된 그리스도인 여러분 모두가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