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델포이 아폴로 신전 앞마당 프로나오스에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경구가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킬론, 피타고라스, 솔론, 탈레스 중 누군가 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이 격언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 하는 시인 페모노에의 저작으로 간주 하기도 합니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절제와 자각에 대한 논의인 그의 저작 “천국으로부터”에서 그리스에 전해지는 다른 경구들과 함께 이 격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는 말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앎이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 심각한 무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면 사실과 진리를 왜곡하게 됩니다. 악하거나 나쁜 의도가 없지만 사실과 진리를 왜곡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경우를 통해 얼마든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는 면에서는 한 없이 고귀하지만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는 면에서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거짓된 존재라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나 행동은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르고 한 거짓말은 고의적으로 속이는 거짓말보다는 덜 나쁘지만, 이 경우 우리는 성경이 무지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사려 깊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그 집단 안에서의 사회적 약속이나 공공의 질서와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 무지와 무의식 가운데 거짓을 행하게 되고 그것은 곧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단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이유는 개혁주의가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에 속한 목사들은 누구나 개혁주의 신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칩니다. 개혁주의 교단 안에 자신이 표방하는 신학과 교리를 폄하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개혁주의를 폄하하는 이유는 효용성, 이를테면 개혁주의는 목회와 교회 부흥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효용성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개혁주의를 평가하려면 개혁주의 신학의 이해 토대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개혁주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개혁주의를 평가하는 것은 그릇된 평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과 교리와 신학 그리고 민주주의적 질서와 회의 법 등에 대한 이해도 단순한 문자적 또한 규범적 이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율법의 구체적 규정을 지키는 것을 넘어 그 율법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그 율법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구체적 율법의 명령 너머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그 언약 너머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행위 너머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와 사소한 행동까지도 언약과 구원 사건과 하나님 존재와의 인격적 관계와 역사적 이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렇게 신랄한 책망을 받은 것은 이러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무지는 거짓을 생산합니다. 무지에서 발생하는 거짓은 그 거짓을 발생시키는 자신이 거짓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책망했을 때 책망을 받은 백성들 중에는 고의적으로 거짓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무지 가운데서 거짓을 행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무지에서 행하는 언행은 거짓된 확신에 근거하기 때문에 쉽게 깨닫지도 못하고 고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를 위해 교리와 신학이 필요합니다. 나의 깨달음이나 체험이나 감정보다 객관적 고백인 교리와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왜곡되거나 오도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합니다. 인간의 주관성은 자기중심적 또는 이기적으로 흐를 경향이 농후합니다. 주관적으로 기울거나 이기적으로 기울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취하게 됩니다.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고 대접 받기 위해 대접하고 인기를 얻기 위해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모두 경건을 이익의 재로로 취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모든 것이 거짓에 해당됩니다.

성경은 내가 선한 사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타인을 위해 선행을 하려면 절제를 해야 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봉사나 무엇이라도 남을 위해 하려면 절제를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충족을 목적으로 합니다. 모든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되 쾌락이 충족될 때까지 추구합니다. 절제는 그 쾌락을 줄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제는 희생입니다. 내가 희생해야 타인이 덕을 봅니다. 내가 절제하고 희생해야 사회가 덕을 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가르침을 딱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모든 성경을 의미합니다.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은 모두가 절제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간음하지 말라는 것도,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도, 이웃의 집이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것도 절제 없이는 지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황상하 목사

동물은 참거나 절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가 ‘나는 절제하고 신중해야지’하고 결심해야 훌륭한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는 그냥 본능을 따라 살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절제하지 않고 본능을 따라 살면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식욕 명예욕 권력욕 등 모든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절제와 신중은 동물에게나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은 덕목입니다. 절제는 인간에게만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벧후 3: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고, 롬 9:22절에는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하였으며, 벧전 3:20절에는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하였고, 벧후 3: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으며 벧후 3:15절은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래 참으심의 본을 보이였습니다(딤전 1:16).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지 않으시고도 구원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으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은 참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참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처럼 그분의 본을 따르고 베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과장 허풍 교만 갑질 이런 것을 줄여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하고 전도 열심히 해야 하고 구제와 봉사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절제하고 언행을 신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너무 화를 쉽게 냅니다. 너무 편파적입니다.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좋아하는 것도 쉽게 좋아합니다. 희로애락이 너무 심하게 요동칩니다. 남북 정상회담도 보니까 국가의 운명을 걸고 진지하고 냉정하게 해야 할 회담인데 잔치판을 벌렸습니다.

한국인들은 신앙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한국인들이 교회 올 때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뇌를 안 가지고 가니까 눈을 스르르 감고 감동시켜 주기만을 기대합니다. 교회 갈 때는 가슴만 가지고 갑니다. 깨닫고 이해하고 배우려고 정신 차린 마음과 냉정한 이성과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가지 않고 가슴으로 감동 받을 준비만 하고 갑니다. 가슴 찡한 이야기를 듣거나 눈물이라도 흘릴 만큼 되면 은혜 충만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감동 받고 울고불고 야단을 치는 것은 교회가아니라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화를 냅니다. 감히 나를 무시해! 무시하지 말라는 것은 강제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은 강제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 장려 법, 무시 금지 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서는 안 됩니다. 업신여기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이나 존경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나의 문제이지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시당하지 않게, 업신여기지 못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나의문제입니다. 무시당하지 않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신중하고 절제하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주위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어떤 사람이 받는 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똑똑하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은 일단 80%는 크레디트를 얻고 들어갑니다. 게다가 화가 나도 잘 참으면 그 사람은 선인반열(?)에 오릅니다. 아주 급하거나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을 일이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절제하고 참으면 무시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부분적 지식과 감정이 버려야 할 어린아이의 일이라면 절제와 신중과 오래 참는 것은 성인이 취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일입니다. 무슨 인기와 칭찬과 명예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절제와 신중은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어떤 업적보다 절제와 신중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고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참고 절제를 하되 나에게 해가 되는 일도 절제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절제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총체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에피머네데스나 안창호가 동족을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에 조금도 기뿐 나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거짓말쟁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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