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고려한 문화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종교 간 싸움, 분쟁, 다툼, 분열, 전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게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불교 용어를 사용해서 “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한 것에 대해 구원론, 신론 따지는 사람은, 이건 신학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불자님, 무신론자도 크리스마스 날 “성탄 축하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하는데 뭐가 어때서, 이런 식의 반응을 하는 사람은 문화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 해석이 사회에 유익할까? 문화를 고려한 문화적 해석이 사회에 유익할까? 필자는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는 신학적 해석을 하지만 그 공동체 밖에서는 문화를 고려한 문화적 해석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해석은 자신이 믿는 종교 공동체 안에서는 문제가 크게 되지 않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 공동체를 벗어나서 자신의 종교 교리만 강조하면 그 사회는 종교 때문에 싸움과 분쟁, 더 나아가 종교 전쟁으로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문화를 고려한 문화적 해석은 종교 간 싸움, 분쟁, 다툼, 분열, 전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필자가 빠른 이해를 위해 그림으로 만들어 봤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은 거대한 문화란 울타리 속에 살고 있다. 이 문화란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문화는 종교, 정치, 과학, 기술, 미신, 풍습, 철학, 경제, 교육, 언어 등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울타리 속에 작은 종교 공동체가 존재한다. 각 종교인은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라고 말할 때 그 종교 내에서 신학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종교인들이 각자 문화라는 큰 공간으로 나왔을 때는 내가 믿는 신이 최고라고만 우겨 대면 결국 충돌, 싸움, 분쟁,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문화는 상생하며 협력하며 살 수밖에 없는 공동체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의료, 전자제품, 교통수단, 철학, 과학, 기술, 의식주, 건물, 교육, 언어 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대부분 다른 종교인, 무신론자들이 만들거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사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를 떠나서는 절대 살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언어를 사용해서 보는 것 대부분이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수고해서 만든 것으로 읽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도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 큰 문화란 공간으로 나왔을 때는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교리나 신학이나 규칙을 함부로 적용하면 분쟁과 분열, 싸움으로 번질 수 있게 된다.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큰 문화란 공간에 개신교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 불교 공동체 등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각 종교 공동체도 그 큰 문화란 공간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 작은 공동체가 자기들이 믿는 경전 교리만 강조하면 결국 그 사회는 분쟁, 싸움, 분열, 종교전쟁만 있게 된다. 종교가 이런 분쟁, 싸움, 분열, 종교전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지, 오히려 분열과 다툼으로 가는 것은 성숙한 종교라 할 수 없다. 고등 종교일수록 분쟁, 싸움, 분열의 사회를 평화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 종교가 건강한 종교이고, 그런 종교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아이가 우리 아빠가 최고야 하면, 그 아이 집안에서는 매우 사랑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신이 유일신이고, 최고의 신이라고 강조해도 그 종교 공동체 내에서는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문제는 공동체 밖에서 어떻게 주장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슬0 교리 중, “너희는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을 쳐라……” (코0 8:12)라는 구절이 있다. 전쟁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런 교리를 그들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면, 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들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들의 공동체에서 만든 교리와 신학을 다양한 공동체가 사는 문화에 나왔을 때는 그들의 교리나 그들의 신학 논리를 함부로 적용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개신교가 믿는 성경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20: 3, 신 6: 14)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구절을 당시에 쓰일 때의 상황을 파악해서 오늘날 잘 적용해서 맞게 해석해야 함에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개신교라는 공동체를 떠나서 다양한 공동체가 있는 큰 문화라는 공간에서까지 문자적 해석을 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인들이 다른 종교의 상을 우상으로 판단해서 다른 종교의 불상이나 단군상을 파괴하는 일이 있었다. 잘못된 문자적 해석으로 다른 종교를 방화, 훼손, 파괴하는데 때론 이런 구절을 오용해서 사용하곤 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종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분열과 분쟁, 싸움, 전쟁을 줄여주기 위해 유익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을 문자적, 신학적 해석을 개신교 공동체 밖에까지 적용하게 된다면 그 문화는 분열과 다툼, 싸움, 종교전쟁으로 얼룩지고 말 것이다.

목사가 불교 용어를 사용해서 “성불하십시오”라고 마음껏 말해도 아무렇지 않은 신앙공동체가 성숙한 공동체다. 대부분 선진국이 그렇다. 성숙한 종교 단체는 자기가 믿는 종교 단체에서 다양한 공동체로 있을 때는 그 문화 속에 사는 모든 공동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차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 공동체에서는 신학적 해석으로 학문적 발전을 계속해 나가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 용어를 사용해서 인사하고 대화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고 보면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본 성경 100%는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히브리어 구약 본문(일부만 아람어)과 코이네 헬라어 본문 (신약)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 자체가 모두 한국 문화의 영향인 것이다. 유불선이 1500년 이상 뿌리내리고 있던 한국 땅에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되었다 해서 한순간에 유불선이란 문화의 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기독교를 100%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기존에 입고 있던 유불선이란 종교문화의 옷을 입은 채로 조금씩 외래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용어의 출처가 유교, 불교, 도교의 용어를 빌려 사용한 것이다.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가 100% 한국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니버 (H. R. Niebuhr) 라는 학자는 “문화의 최첨단은 언어이다”라고 했다. 문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언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대부분 유불선, 무교, 중국 불교 용어, 한자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글이란 문자 자체가 한국 문화의 영향인 것이다. 또 한국어 성경의 모든 언어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모든 새로운 언어도 모두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목사가 불교 용어를 마음껏 사용하며 인사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교리에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문화를 고려한 해석이 필수적이다. 성경을 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싸움, 분열, 종교 전쟁을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문화적 공간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학적 차원에서만 강조하게 되면 싸움, 분열, 종교 전쟁만 일어날 소지가 많다고 본다. 그래서 종교 간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을 뛰어넘어 문화적 해석까지 도달해야 성숙한 종교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해석을 한다고 해서 신학적 해석이 훼손되는 게 전혀 아니다. 문화적 접근은 내 아빠가 중요하면 이웃 친구 아빠도 존중해주는 상식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은 문화를 고려한 문화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분열과 싸움, 다툼과 전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떤 종교 공동체는 그 종교 내에서는 그 종교가 만든 교리를 적용해도 될지 모르지만, 문화라는 큰 공동체로 나왔을 때는 큰 문제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적 해석 속에서 신학적 해석을 하면 좋다고 본다. 그래야 종교 간 분쟁과 싸움이 줄어들고, 건강한 사회, 성숙한 사회, 평화로운 사회, 성숙한 종교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100%가 문화란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종교 밖에서는 문화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김동규 목사, 본헤럴드 호주 특파원, The University of Sydney. Ph.D. (종교학) 저서 - 한국 기독교와 문화 : 한국 교회의 하느님. 하나님 이해 (신성출판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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