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스와 야긴을 부르는 시대에서

한명철 목사┃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 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한목사의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한명철 목사의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다.  한목사님의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늦둥이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타락한 민족이 어디 한둘이며 변질된 교회가 어디 한국교회뿐이랴?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총애가 남달랐다. 이스라엘을 향했던 하나님의 첫사랑처럼 한국민족과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가 달랐다. 히브리민족보다 종교성이 탁월한 것도 아니요, 헬라민족보다 문화적 역량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며, 게르만민족보다 혈통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반도라는 어정쩡한 지형에서 강대국들의 싸움판으로 난장을 이루었던 역사의 격랑은 한민족의 DNA에 바퀴벌레와 같은 생존 의지를 심어놓기에 충분했다.

하나님의 심장에 한민족을 향한 사랑의 필이 꽂히셨는지 모른다. 편애라 할 만큼 늦둥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하셨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반도에 이상 기류가 형성되는 중이다. 빈곤의 사막을 행군하며 익혔던 의지를 풍요의 언덕을 몇 개 오르면서 잃어버렸다. 고난 속에서 형성되었던 불굴의 기상이 평화의 때에 풀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려 이스라엘을 얻으셨다. 돌이키면 보슬비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면 불비가 내린다. 심판의 서곡은 벌써 연주되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 우리의 “하티크바”(Hatikvah, “희망”을 뜻하는 이스라엘의 애국가)가 있다.

2013년 베네수엘라의 챠베스가 죽었을 때 찬사와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유난히 반미의 선봉장이 되어 아메리카로부터는 미움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그에겐 카리스마가 있었다. 카리스마가 “선물”을 뜻하는 ‘카리스마타’에서 유래되었다면 그는 천부적으로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부여받았다. 그의 죽음으로 권력이 갑작스런 공백을 이루자 후계자 마두로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2015년 우익 야당의 승리로 볼리바르 혁명을 수행하려던 차베스의 추종 세력들과 베네수엘라를 차베스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반대 세력들로 인해 이 나라는 여전히 혁명 과정에 있다. 막스 웨버는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로 이런 현상을 정의했지만 강력한 지도자의 유고는 당분간 이 나라의 전진을 더디게 만들 것이다.

 

혼돈기에 영웅 나서며 혼란기에 깃발 날린다

한국의 반세기는 강력한 지도자가 얼마나 요긴한지를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한국은 제도적으로 민주국가를 표방하지만 민도(民度)는 아직 그 수준에 못 미친다. 평화의 때에 민주적 지도자는 물을 만난 고기다. 지금은 민주 역량이 축적되어가는 과도기다. 강국을 향한 성장통이 유독 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자는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이 지도자를 만든다. 조국의 지도자가 카리스마타의 주인공이길 빈다.

혼돈의 시대는 영웅을 부르고 혼란기일수록 대중은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본다. 미소 강대국이 세계사의 두 축이 되어 있을 때 세계는 긴장의 연속이었으나 어떤 안정감이 있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에게 일종의 패권이 주어졌지만 국익우선주의와 자국민보호에 곁들여 오만한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미국은 3세계 국가들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 반유대, 반기독교라는 종교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이슬람이 과격한 정치세력과 결탁하면서 광기로 빛나는 힘이 결집되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예측 불가의 트럼프가 등장한 이후 세계는 살얼음 위를 내딛는 형국이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활로를 찾는 민족

2001년 9월 11일, 세계 정치력의 심장인 백악관, 세계 경제력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세계 군사력의 심벌인 펜타곤 중에서 두 곳이 테러의 공격을 받았다. 이 상징적 사건으로 인해 미국의 패권주의는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중국의 급작스런 부상은 미중이라는 G2의 세력 균형을 이룬 듯 했으나 예전의 미소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국은 기예단의 가면바꾸기처럼 상황 대처의 달인이다. 세계인들은 늘 중국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친미/반미와 친중/반중의 미끼는 강대국들의 마찰이 잦은 틈새에서 생존을 이어온 한민족에겐 언제나 유혹이다. 단언컨대 이 민족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활로를 찾는다.

칠천 만 겨레가 모두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국가가 만능의 키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는 각 시대의 기독교국가가 어떤 실패를 보였는지를 잘 기억한다. 금세기에도 기독교 색채가 강한 강국들이 세계경영에 실패했음을 눈으로 보아 알고 있다.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말은 한국의 기독교화를 주장함이 결코 아니다.

70년대 교회의 구호는 민족복음화였다. 민족복음화가 기독교화라면 교회는 또 한 번 십자군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꼴이 된다. 결코 아니다. 천만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천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자는 말이다. 파레토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천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면 단언컨대 칠천 만 겨레의 미래는 확고하다.

세상은 오만 명으로 능히 바뀐다(역대상 12:33). 칠천 명으로도 족하다(왕상 19:18). 아니 300명만으로 충분하다(삿 7:7).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120명이 천지를 진동시킨다. 한 국가나 도성의 파괴를 막는 데는 단 열 명의 의인으로도 가능하다(창 18:32). 진정으로 기도의 능력을 아는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마 18:19-20) 내 조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이룬다.

폭풍 전야와 같은 조국교회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끝에 닿으면 심판의 불비가 쏟아진다. 솔로몬의 죄악으로부터 유다의 역대 왕들과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이 마지막 눈금에 닿았을 때 멸망이 홀연히 임했다. 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유다가 그 뒤를 따랐다. 북으로부터 기울어진 가마가 균형을 잃으면 끓는 기름이 쏟아진다. 다림줄 재앙은 마지막 판결문이다. 판결문의 내용은 다시 용서치 않겠다는 심판의 의지다. 이삭의 산당들은 훼파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파괴된다. 이어지는 심판은 끝의 도래로 인해 쌓인 시체와 애곡이다. 그리고 하나도 남지 않고 죽임 당할 지도자들의 최후다. 아모스의 환상들이 이 시점에서 자주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지금 조국교회의 상황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안온함이다. 조국이 재앙에 처할 때 동방의 제국도 영향력을 잃고 서방의 강국도 강 건너 불구경일 것이다. 가슴은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움인데 아직도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무심할 정도로 감각을 잃어버린 동족의 가슴을 어이 할 것인가? 여전히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르고 공장의 기계는 예전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행렬과 저마다 자신의 신을 찾아 부르짖는 소리가 일상을 채운다. 재앙의 첫 신호탄을 보기 시작할 때면 이미 늦다. 어쩌나! 땅의 바람을 붙든 천사들을 보며 하늘의 하나님께 감히 하소연한다.

야긴과 보아스를 부르는 시대

나라의 위기는 충신을 부르고 교회의 위기는 사명자를 부른다. 목숨을 버리는 충성과 사명이 없다면 나라와 교회의 미래는 암담하다. 심판의 기울기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지만 일으키는 능력은 항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성전을 지탱하던 두 기둥은 야긴과 보아스였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그에게 능력이 머문다. 충신도 사명자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그들이 지닌 능력은 자신을 버려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힘이다. 보아스는 룻의 남편이요 야긴은 포로였다. 보아스의 씨에서 메시아가 탄생되고 바벨론 포로 37년 만에 복권된 여호야긴에게서 민족 회생의 불씨를 본다. 하나님이 보아스를 세우셨고 여호야긴은 재생의 은혜에 머물렀다.

이 시대의 흔들리는 교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 역시 야긴과 보아스다.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기둥과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는 기도의 기둥이 서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건재하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고 몰입함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대정신이 말씀을 거부하고 기도를 대체한 것들이 기도를 외면케 한다. 마지막 때의 사명자로 부름 받았다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말씀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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