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분량 만큼 진주는 커진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 Th.D, 본국제신학교학장,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 등

서양속담에 결혼하는 딸에게 어머니가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르는 진주를 선물한다. 진주는 딸이 결혼 후 흘릴 눈물을 상징하는 선물이다. 결혼이란 기쁨의 눈물보다는 슬픔의 눈물이 더 많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 부족으로 인한 마음의 갈등과 설움의 눈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는 깊은 상실감의 상처의 눈물도 있다. 갈등의 골이 깊어 험한 대화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허기진 배를 움켜주고 하루하루 걱정과 근심으로 땅끝처럼 살아가는 울부짖는 설움과 원망의 눈물도 있다.

젊은이들이 왜 결혼을 포기할까? 또한 결혼해서 왜 자녀를 낳지 않을까? 울어야할 짐들이 너무 무겁기에 미리 걱정과 염려로 결혼포기 자녀포기로 이어지고 있으리라고 본다. 전후 한때 100만명이 넘는 신생아 출산을 보여왔던 한국이 금년에는 35만명으로 사상 최악의 출산을 할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매년 20만명대의 사망자가 있었는데, 금년부터 30만명대로 진입하면서 장례비용의 급증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대두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2023년에는 사망자 30만명시대 출생자 30만명 시대가 된다는 끔찍한 시대를 예고하고 있고, 2023년 이후에는 사망자보다 출생자가 적는 인구 감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 전분야에 찾아올 태풍은 핵폭탄에 버금가는 충격을 던져줄 것이다.

종교시장도 그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않고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텅텅비어가는 건물안에서 외롭게 울며 눈물로 채워가는 고달프고 외로운 고독한 싸움을 힘겹게할 것이다. 결혼뿐만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닥치는 어려움으로 인해 울어야할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대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다.

왜 하필이면 서양인들은 진주를 자녀들에게 선물로 줄까? 진주 ‘아비큘리데’는 이렇게 생성된다. 진주는 굴의 몸에 들어온 모래알이 변해 생성된 보석이다. 몸에 모래가 들어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나카’라는 특수한 물질을 생성해 살 갓에 파고든 모래를 끊임없이 감싼다. 고통의 분량만큼 진주는 점점 커진다. 그러나 모래알을 무시하면 통증은 없지만 살이 곪아 곧 굴은 죽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을 만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삶속에서 모래알을 만날 때 기도와 말씀으로 맞서서 눈물의 진주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파멸하는 사람이 있다.

눈물은 강력한 힘이 있다. 아내의 눈물은 남편을 감동시킨다. 자녀의 눈물은 부모의 마음을 녹인다. 눈물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 고아는 울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관심도 같지 않고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샘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크게 놀라면 부모를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뜨린다.

미국 미시간주의 성 요셉 보육원에 아주 포악한 고아 소년이 있었다.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웠다.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했다. 입양도 실패했고, 고아소년은 웃음과 눈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어느날, 베레다 수녀가 그를 꼭 껴안으면 속삭였다. “하나님은 너를 놓지 않는다. 너를 사랑한다, 힘들 때는 울며 기도하라.” 소년은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피자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피자 한 판을 11초에 반죽하는 최고 기술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피자 체인점을 만들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사람이 바로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너건이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눈물의 힘이다. 기도의 능력이다.

누구나 삶의 짐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힘들고 괴로우면 울어야 한다. 그냥 울면 불쌍하다. 그냥 울면 처량하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울면 희망이 보인다. 기도하면서 울면 힘이 난다. 눈물의 기도가 축복으로 변한다. 눈물의 기도가 소망이 된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들은 울지 않는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보듬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고아는 울지 않는다. 눈물의 기도를 들어줄 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더욱 외로운 것이다.

때로는 눈물이 축복이다. 우리의 삶속에 모래알이 침입해 올 때, 그것을 눈물의 기도로 감싸면 역경이 진주가 된다. 울며 씨를 뿌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그립다.

아버지 최우용원장이 일생동안 민족을 위해서 울던 기도원 뒷산 정상에 세워놓은 기도처소. 이곳에서 고인은 울며 하나님께 눈물의 씨앗을 드렸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후 기도원을 설립하셨다. 아버지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셨다.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통하기 위해 기도원 뒷산 정상에 기도의 집을 지어 놓고 한 평생 홀로 기도의 시간을 드렸다. 80년대 중반에 손수 벽돌과 돌 구둘장과 지붕 스레트와 시멘과 물과 문짝을 경사도가 심한 뒷산을 지고 올라가셨다. 맨몸으로 올라가는데도 땀이 나고 힘들었다. 직접 맨 손으로 자신을 위한 기도처소를 지으시고 그곳에서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천성을 바라보는 장소가되었다.  자식이 사고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먼저 세상을 뜰때도 홀로 기도의 집에서 고통의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기도원이 사기꾼에 의해 산산 조각이되어 매각되었고, 다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찾아올때까지 아버지는 비난을 홀로 감수하면서 외로이 깊은 산 정상에서 기도로 눈물을 쓸어냈던 것이다. 기도의 처소는 아버지의 삶의 눈물과 말로 항변할 수 없는 처절한 순간을 지탱해줄수있었던 유일한 평안의 장소였다.

20분이면 충분히 올라가는 산 정상에 오르는데 나는 20년 이상이 걸린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의 눈물과 아픔과 상처와 설움이 베어 있는 곳이기에 외면했다. 나는 아버지가 고난을 받으며 슬픔속에 홀로 꺽꺽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그 외로움과 눈물의 깊이를 이해할 만한 중년이 되었다. 30년이 훨씬 더 된 기도처소가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내부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었고, 베니아판으로된 천장과 벽체가 무너져 너부러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보면서 가슴을 쓰러내렸다.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된 것보다 낡고 오래된 옛 정취가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이 정서적으로 더 다가오고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움의 단어가 가지는 그 무게를 흔적에서 찾을려고 애쓰는것 같다.

고인이 되신 아버지로부터 기도원을 물려 받은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대 중반에 물려받았는데 그 사이 나도 50대 중반이 되었다. 나의 기억속에 기도원은 낡은 옛 과거의 청사진으로 남아있다. 옛 과거의 청사진 보다 더 험하게 황폐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기도원이 30년만에 새로운 성산으로 거듭났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버려 폐허로 낡아져가던 기도원을 보면서 매일 노모는 혼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기도원이 기도의 기능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주님을 향한 눈물의 씨앗을 드렸기에 인생에 마지막 촛불이 꺼지기 전에 기도원이 새롭게 세워지게 되었다.

기도원 뒷산

기도원이 새옷을 입은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쁘신지 노모는 주무시다가 매일 밤 서너번씩 기도원 마당에 나왔다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원 산자라기에 있는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나무들이 자신을 향해서 말을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으면, 깊은밤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의 흔들림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노모는 깊은밤 나부끼는 나무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시편기자는 울며 씨를 뿌리는자는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거둔다고 했다.

기도원 정문

우는 것은 축복이다. 자신의 죄악을 보고 애통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더 나아가 부흥의 열기가 매 말라가는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며 울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다양한 종교 시장에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기를 위해 울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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