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저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는 조완호 집사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60여년의 세월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삶의 굴곡이 심해서 평범한 분들과 비교해 보면 삶의 길이가 서너 배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가족을 건져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서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군에서 전역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하기 전에 잠간동안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다.  그 때는 교회를 구경하러 다닐 정도였고 성경과 찬송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서 신문지에 싸서 가지고 다니는 때의 이야기다 그래도 시간이 되는대로 그 교회를 계속 다닐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갔다. 그런데 찬양을 인도 하던 전도사님이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했고 나는 박수치는 것이 쑥스러워서 조용히 앉아서 찬양만 했더니 전도사님이 그런 나의 모습을 못 마땅하게 계속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전도사님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교회를 안 나갔다. 물론 그 찬양을 인도 하신 전도사님은 내 친구 전도사가 아니고 다른 후배 전도사였다. 당시 내 친구 전도사는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었으며  학생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친구 전도사 하고는 고교 동기 였는데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 했으며  유머도 있어서 나 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생각 했었다. 그 때 교회 안에서 바라본 친구 전도사의 모습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가대를 지휘하는 모습도 멋있어 보였고 교인들도 전도사님 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존경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 친구 인데 이 정도는 존경 받아야지 하고 나 까지도 그 교회 안에 들어가면 어깨가 으쓱했다. 박수치는 부흥회만 아니었다면 출국 할 때까지 교회를 다녔을 텐데 그 박수치는 부흥회 때문에 교회를 일찍 그만 두었다

그런 이후에 나는 귀국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키우면서 교회 하고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지만 그 친구하고는 가끔 연락을 하였음으로 나는 전도사 친구만 생각하면 큰 교회에서 존경받는 그런 모습만 상상하고 있었다. 얼마후에 그 친구가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내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 할 때에 나는 충북 진천의 공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때쯤 해서 목사가 된 친구가 궁금해서 오랜만에 전화를 하니까 충남의 대전에 있는 어느 교회의 담임 목사로 교회를 옴겼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여름날 서울에서 회사 일을 마치고 진천공장으로 가는 길에 대전을 들려서 그 친구를 만나보고 진천의 공장으로 가기로 하고 주소 하나만 가지고 찾아 갔다. 대전 시내를 지나서 계룡산쪽으로 가다보니까 삼거리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는 길이 계룡산 방향 이었다. 계룡산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가는 도중에 다시 물어 보니까 주소지가 오른쪽 방향에 있었다. 차를 천천히 운전 하면서 교회 건물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오른쪽의 저 멀리에 큰 교회가 하나가 보였다. 둥글 둥글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교회인데 크기도 하고 유럽의 고궁을 보는 듯한 아주 멋있는 건물이 보였다. 속으로 생각 했다. 그럼 그렇지 내 친구 이고 서울의 큰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목사인데 교회가 저 정도는 되어야지 생각하면서 그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가는 도중에 다시한번 마을 주민에게 교회의 주소와 교회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그 분이 “주소는 맞는 것 같은데 교회 이름은 아니네요”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위에 있는 마을회관 쪽에 교회 하나가 더 있으니 확인 해 보라고 했다. 큰 교회가 아니어서 약간은 실망을 하였지만 그래도 주민이 알려 주는 곳으로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수가? 건물은 2층 건물이었고 간판은 분명히 새샘교회 이었는데 오래된 건물로서 허물어져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 이었고 1층은 부엌과 방이 있었는데 출입문이 없어서 사방팔방이 훤하게 보이도록 뻥 뻥 뚤려 있었다. 집에는 식구들이 없어서 다행히 나와 서로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가 나도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임으로 세상의 안목만 가지고 보기에는 완전히 실패한 목사였다. 그렇게 서울에서 잘 나가던 목사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나 생각하면서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해 보여서 다시한번 확인해 보았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타올에는 분명히 "000목사 임직기념" 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 친구목사가 확실히 맞았다. 나는 혹시라도 그 친구목사와 마주칠까봐서 서둘러 되돌아 나왔다. 그리고 진천 공장까지 가는 길에 우울하고 가슴이 아팠다. 회사로 돌아온 즉시 사업하는 처형께 부탁해서 적은 금액이지만 매 달 후원금을 보내도록 했다. 

그 후에 얼마 안 되어서 그 친구목사는 대전 시내로 교회를 옴기었고 나는 대전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일이 있어서 갈 때는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2층에 있는 그 친구 목사의 교회를 방문했다. 우리 부부도 함께 그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그 때에  사모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초라하게 보였던 그 곳에서 머물던 그 때가 영적으로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 주일 아침 설교 시간에 성도가 사모님 혼자였다. 그러니까 목사님 설교가 제대로 안되었고 사모는 강력하게 항의 했다. 나도 교회의 성도다. 주일 예배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싶으니까  더더욱 은혜의 설교를 해 달라, 그렇게 하면서 내조를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 하지만 그 당시에 내가 받은 충격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 친구가 목사를 그만 두고 취직이라도 시켜줘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했다. 그 친구는 믿음 생활을 안 하는 내가 불쌍하게 보였고 나는 그 친구가 목사라는 것이 불쌍하게 보였던 그 때의 그 시절의 이야기다

그 때 나에게 그토록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였던 친구목사가 본 헤럴드를 소개 해 주어서 지금 저의 사연을 올리고 있다.  나의 절친한 친구 목사! 항상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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