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2:14-15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본문 바로 앞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며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접속사가 그러므로(therefore)이다. "벌을 줄 것인데,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개유한다"라고 하는 말은 왠지 말이 안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쓰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시지만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므로 이스라엘이 그 벌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어서 도무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게 될 것이 포함된 말씀이다. 따라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그들이 주께서 주시는 벌을 견딜 수 없으므로 살려달라고 주 앞에 돌아오므로"라는 뜻이다. 즉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개유하고 위로하신다는 의미이다.

14절에서 "개유한다"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파타'(פָּתָה)는 좋은 의미로는 '마음을 열게 하다'(to be open-minded), '넓히다'(be wide), '설득하다'(persuade),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로는 '유인하다'(entice), '속이다'(deceive)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긍정적인 의미의 '마음을 열게 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잘 타일러서 마음을 열게 한다는 말이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벌을 내리시며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을 열도록 설득하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개유하시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신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거친 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살았던 '광야'를 의미하며 또 앞으로 있을 포로생활과 거기에서 황폐해진 조국으로 돌아올 때를 뜻한다. '광야'는 살기 힘든 '거친 들'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광야'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는 곳이며 '교회'를 의미한다(행 7:48).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새 출발을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광야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점이었다. 이렇게 광야가 새롭게 출발하는 장소가 되는 이유는, 광야는 거친 들이므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듯이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반드시 징계를 하게 되어 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그러나 사랑은 징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그가 슬플 때에 위로를 하게 되어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사랑은 위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징계와 위로가 함께 있어야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위로'라는 것은 힘들고 고달프고 우울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며 행복하고 즐거울 때에는 위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멈추시고 이제는 광야로 내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가 끝났다고 한숨을 돌리다가 낙심할만한 환경이 왔다고 해서 우리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 40:1-3).

15절을 보면, "포도원"과 "아골 골짜기"가 나온다. "포도원"이라는 것은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복의 상징이며 안식에 들어간 상태를 의미한다. 노아의 방주 사건 이후에 노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포도원을 경작했다.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역시 황폐해져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났던 땅에서 포도가 자랄 수 있는 포도원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땅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도원은 기쁨과 복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를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은 포도주를 금했으나 가나안 즉 안식에 들어가서는 먹을 수 있었던 것이며, 홍수의 심판 후에 안식에 들어간 노아는 그의 장막 즉 성막에서 안식과 복의 상징인 포도주를 마셨던 것이다. 성막이 생기기 전에는 장막이 성막이었다.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일곱 번째 절기인 '장막절'이 바로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막' 즉 '성막'(성전)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포도나무에 대한 것이며, 그래서 신부인 교회에게 진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첫 번째 표적으로 혼인잔치에서 신랑이 준비해야할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또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준다"라고 하신다. 아골 골짜기는 아간의 죄로 인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비참하게 참패하여 아간과 그의 온 가족을 죽인 장소이다. 그는 여리고성 전투 후에 여호와께서 아무 것도 취하지 말고 여호와께 모두 드리라고 하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탐심에 눈이 어두워 귀한 것들을 몰래 숨겨두었다. '탐심'은 '우상숭배'의 죄와 똑같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아간의 죄로 인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그런 아골 골짜기가 이제는 '소망의 문'이 되게 해주신다고 한다. 아간의 죄로 온 가족이 죽었던 것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지만 심판을 받았던 그 끔찍한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친 들에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겠다는 뜻이다. 죽어야 마땅할 우리를 광야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소망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탐심과 간음 즉 영적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새롭게 고쳐주시기 위하여 먼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던 그들이 가지 못하도록 가시와 담을 쌓아서 막으신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에게로, 이방 나라에게로 도움을 요청했던 그 모든 길이 차단되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그렇게 막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답답하기만 하고 기도 응답을 안 해주신다고 금식 기도와 작정 기도에 들어가기도 하며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며 자기를 도와줄 사람과 환경을 찾아 헤메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박사학위가 몇 개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캐낼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과 고멜처럼 끊임없이 교만히 행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단 모든 길을 막으신 다음에 그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신다. 생각해보니 그들이 섬기며 따라갔던 모든 우상들은 자기들이 만든 것이며,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기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환경과 상황을 통해 알게 하신다. 결국 그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두 손 들고 회개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러한 것이 주님의 설득이다.

"야곱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3-10)

[묵상]

그 동안 여러분이 받고싶었던 위로는 어떤 것이었는가? 가족과 교인과 친구들로부터 받고싶었던 위로의 모습과 형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어놓은 그 틀은 나만이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나를 위로해 줄 사람과 도구와 환경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위로를 주위에서 해주지 않을 때에 실망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주위를 점점 어둡게 만들어가면서, 즉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나만 위로를 받겠다고 하는 모순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주위에 상처준 것에 대해서는 위로해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나만 위로해 달라고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어 그러한 나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초라한 꼴로 바라보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진정으로 받고싶어하는 위로는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며 우리가 듣고싶은 말을 해주는 그러한 위로가 아니라, 바닥을 치는 그 순간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는 그 말씀 하나 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위로여야만 합니다. 그래야 거친 광야에서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장부처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진정 듣고싶은 위로는 어떤 것인가? 

여러분이 위로를 받고싶은 장소와 환경은 어떤 것인가? 

잘 생각해보면,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은 탐심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거친 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신 8:1-6).

[기도 제목]

1) 혼과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고멜과 이스라엘처럼 끊임없이 신랑되신 주님을 배반하고 제가 원하는 길로 달려갔고, 달려가고 있는 저를 붙들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3) 저는 끊임없이 제 생각에서 만들어내는 우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으며, 주의 일에 열심을 다하느라 바쁘고 피곤한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대로 되기 위하여 이 방법, 저 방법을 궁리하느라 제 머리는 너무나 바쁘고 제 몸은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를 광야(교회)로 이끌어서 훈련을 통해 위로해주신다고 하시니 진정으로 주께서 이끄시는 그 광야(교회)에서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으로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시켜 주옵소서

4)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이 끝나면 거친 들인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위로해주신다고 하시는데, 그것도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또다시 한숨이 나옵니다. 좋은 환경으로 인도하셔서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셔서 위로하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지금 제가 처한 환경이 징계의 때인지, 거친 들에 있는 때인지 부터 분별하며 살게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다면, 그러할 때가 오지 않도록 저에게 회개의 영을 불어넣어 주셔서 온전히 회개시켜 주옵소서.

5) 그 동안 저는 제 육신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그곳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텐데, 저는 제가 원하는 교회에서 제가 원하는 방식의 위로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저의 우상이었기에 우상을 미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며 지금껏 살아온 것을 이제라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6)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과 "위로"의 개념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잘못 각인된 모든 가치관과 지식과 경험 등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7)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제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고 있어서 순결한 신부로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셔서 모두 주님 앞에 고백하고 그 모든 부분에서 회복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회복되므로 주님의 나라가 다시금 제 주위에 펼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므로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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