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창세기 22장 1-14절의 내용을 소재로 하여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대단히 유명한 책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책에서 그리스 철학을 섭렵하면서 그 철학을 분석하고 비판하였습니다. 그 책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책임과 동시에 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공포와 전율”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느꼈을 감정을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책에서 아브라함이 어딘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듣고 마을로 돌아와서 외국어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며 ‘Abraham returned to the village to spoke foreign language after God told him to sacrifice his son for a burnt offering.’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통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고통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흔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참척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참척이란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부모의 고통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죽음을 두고 불효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죽음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죽음에 대해 예의나 도덕적 평가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린 것은 아니지만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행위는 윤리적으로 볼 때 살인을 저지르려 했던 것이고, 이 사건에 대한 신약성경의 설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재미있는 추측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네겝 사막에 위치한 브엘세바에서 살았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 즉 지금의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80km 정도 됩니다. 그 정도의 거리를 3일 이상 걸려서 도달했다는 사실에서 기발한 상상을 한 것 같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도착 시간을 지연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브라함이 아무런 갈등이나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간 것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가 상상한 것처럼 침묵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침묵의 사흘 길이 공포와 전율의 시간이었다면 그런 추측도 전혀 무리한 상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공포와 전율의 침묵은 윤리적 혹은 보편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앙의 차원이며 믿음의 역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아브라함이 이 역설의 믿음 사건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고, 성경이 믿음의 표상으로 아브라함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는 이런 맥락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크고 장엄한 메시지는 모리아산에서가아니라 공포와 전율의 한가운데서 아들 이삭과 나눈 대화 중에 아브라함이 한 설명에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삭이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한 이 말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니는 메시지인지 인식하고 한 말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술이 언약의 핵심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순간까지는 아들이 제물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뜻에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반 독자들도 모리아산 위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에 압도되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대목을 언급은 하면서도 이 메시지의 무게만큼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었던 믿음의 내용이 바로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인 복음이고 구원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성경의 언약은 쌍방의 동의하에서 체결된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언약입니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여 체결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관입니다. 이 엄중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지만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드릴 번제할 어린양은 없습니다.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하는 근거가 바로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믿음을 테스트 받았지만 하나님께 드릴 번제할 어린양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어린양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메시야입니다. 이삭은 처음부터 번제할 어린양이 아니었습니다. 죄 중에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께 드려질 번제에 합당한 어린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은 다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인류의 죄를 용서할 어린양은 아브라함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굳이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제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케 해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인간이 만족케 해 드릴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복음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존재는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 언약과 복음의 토대에서 하신 말씀이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마련하신 대안이 복음이라는 사실이 심오한 복음의 진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인간 구원 뿐 아니라 인간사의 모든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 궁극적 해결책과 대안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에는 자연법칙과 온갖 원리와 질서가 포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자연법칙이나 온갖 원리와 질서에 맡겨두신 체 관망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며 참새 한 마리의 생사와 들풀 한 포기까지 친히 다스리시며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당면하고 봉착하는 온갖 딜레마에 대한 대안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은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마련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외교, 도덕, 정의, 법률, 제도, 환경 등 온갖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임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상과 철학과 제도는 그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 보수의 가치나 진보의 가치를 선호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과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지혜에 관한 문제이지 그것이 궁극적 대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궁극적 대안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 문제에 대한 궁극적 대안을 제시할 만큼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대안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것과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지혜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지혜이고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궁극적인 대안이 아닌 것을 마치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의 태도입니다.

반면에 더 나은 가치에 대한 선택이나 주장이나 지지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직무유기입니다. 나는 보수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정치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등 사회적 제 문제에 대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저지르는 문제에 대하여 분노하며 비판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에 진보주의 대통령이 집권하여 온갖 문제를 저지르고 있는데 대하여 나는 비판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좌파라는 오해와 비난도 받았고, 지금은 진보주의자들과 그 정권을 비판하니까 우파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기독교인이 보수나 진보의 입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고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드릴 어린양을 준비할 수 없었지만 공포와 전율 가운데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순종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심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같은 체험을 하고 난 후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앞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이레라고 할 때 ‘이레’는 히브리어 ‘보다.’라는 뜻의 ‘야레’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이레는 ‘예비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보시는 하나님’또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궁극적 대안이 없는 순종의 길에서 공포와 전율을 온 몸으로 감당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사상, 철학, 정치, 경제 등 제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주장이 궁극적 대안은 아닐지라도 공포와 전율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여부를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침묵이 때로는 덕목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더 나은 가치를 주장하고 지지하는 일에 공포와 전율이 있을지라도 그 부담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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