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교회에서 목회 하던 친구요 동역자인 목사가 은퇴하고 남미 선교사로 가서 기쁘고 즐겁게 선교를 하다가 암이 발견되어 치료와 투병 중 지난 주간에 더 이상 치료하기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호스피스로 옮겼습니다.

호스피스는 치료를 중단하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목회를 은퇴하고 남미 니카라과 선교 사역을 한 지난 몇 년이 생애 중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고 아내에게 했다는 그 말에 목회의 무게와 선교의 보람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새 생명의 의미가 농축되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처럼 간사함이 없는 착하고 신실한 친구요 동역자인 그는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병상에 누워 찾아오는 교우들과 친구들에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언제나 과장이나 치우침이 없이 정직하고 절제된 언행을 보여주어 동역자들 사이에서도 착하고 신실한 친구로 알려져 있었는데, 몸이 쇠약해져 힘을 잃은 작은 목소리지만 찾아오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 설교보다 폐부를 파고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명랑하고 강하던 사모님이 꺼져가는 촛불 같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붙들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였습니다. 친구도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내려놓고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니카라과에서 온 선교사들을 만나고는 몇 년에 걸쳐 땀을 쏟아 온 선교지로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합니다. 만날 때마다 ‘니카라과에 한 번 오세요.’라고 하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정어린 친구요 동역자의 마음이었는데..., 나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니카라과에 가도 친구는 없고..., 나보고 니카라과로 오라고 해 놓고 자기는 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친구도 그의 아내도 남은 시간이 며칠이 될지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겠다며 그리 길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입니다. 의사가 포기한 친구가 먼저 갈지 그를 위로 방문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먼저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목사지만 너무 슬픈 사람에게는 막상 위로할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지만 그 천국 먼저 가는 친구에게, 천국에 가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 좀 더 오래 남아 있는 것이 특권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는데 왜 이렇게 안타깝고 슬픈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나의 영적 지력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고, 고통도 없고, 슬픔과 절망도 없고, 그곳에 가면 감기도 안 걸리고, 그곳에는 모기도 없고, 암도 관절염도 안 걸리고, 간 신장 심장에 문제가 발생하는 일도 없고, 가난도 실패도 배신도 미움도 모함도 비난도 수군수군 하는 것도 없는데, 그런 천국에 가는 이들 앞에서 소망 있는 그리스도인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는 슬퍼하기는 하되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믿는 자의 슬픔이 불신자의 슬픔과 다른 것은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슬픔도 아픔도 절망도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의 파도가 거듭하면 상쇠 됩니다. 유행가 가사에 ‘세월이 약이겠지요.’라고 하는데, 세월이 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월에 그런 약효를 넣어두셨습니다. 천 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며 슬퍼하던 자들도 지금은 다 떠났습니다. 천 년 전에 떠난 자와 백 년 전에 떠난 자의 세월의 간격을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은 참척의 고통도 슬픔도 지난 이야기로 만들어버립니다. 시간을 길게 보면 슬픔도 아픔도 견디기가 조금은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80년 100년이 아니라 영원을 살 존재들입니다. 희로애락은 영원한 존재인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누리는 특권이며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거나 고통스럽게 죽는 것도 불신앙이 아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빛나고 평안한 것도 은혜이지만 믿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죽는 모습이나 고생과 실패와 아픔과 슬픔을 겪는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것을 다 겪으셨습니다. 믿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스데반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준 낮은 신앙입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모든 믿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스데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과학은 매우 필요하고 또 유용합니다. 과학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이 비정상적이 됩니다. 과학을 인정해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과학도 생물학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죽음을 생물학이나 과학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믿는 사람은 스데반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적 미신입니다. 죽음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렇습니다.

형통하고 부자 되고 출세하고 건강해야 좋은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 여러 가지 복을 받아 누리기도 하지만, 예수 잘 믿어도 이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마지막까지 그 고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안하고 형통하고 고통이 없고 걱정 근심이 없고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것을 적게 겪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것을 많이 겪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통, 실패, 염려, 걱정, 두려움 같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로 믿음이 좋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은혜로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고생을 선호하며 산 것은 아닙니다. 그도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합니다. 가난하면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몸이 약하면 더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서 돈을 벌고 건강하게 되어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영원하지 않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하지 않은 것도 중요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성실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그 성실한 노력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와 건강이 남보다 나은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부와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바울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올인 하여 살면 안 됩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을 언제나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그 여인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무시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도 않고 사마리아인과 말을 섞는 것까지 불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출신들은 미국인들과 직접 말을 섞지 않으려고 같은 영어를 하면서도 중간에 통역을 세워서 이야기 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의 미국인을 아주 낮추어 보는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낮추어보았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의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피하여 다니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 사마리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유대인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라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피곤하여 쉬고 싶기도 하고, 또 목이 마르기도 해서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여자가 물 길러 왔습니다. 그 지역에서 낮 12시는 물을 길러 올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서 그 시간은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인데 그 여인이 그 시간에 물 길러 온 것은 그녀의 지나온 삶의 정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걸자 그녀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며 유대인인 당신이 어째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느닷없이 그녀에게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오히려 나에게 물을 구했을 거라고 하자 그녀는 이 깊은 우물을 두레박도 없이 어떻게 물을 길을 수 있느냐며 당신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물려 준 야곱보다 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 물을 자기에게도 주어 다시 이곳에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그 물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여인의 관심은 우리 모두의 관심입니다. 다시 목마르지 않을 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런 물을 구합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는 우물을 파든지 저수지를 만들든지 해야 합니다. 수고하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없고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물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고하지 않고 물을 얻으려 하고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물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시하신 물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야기가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사마리아 여인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마시는 물에 대환 집착에서 벗어났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수고하지 않고 무엇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릇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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