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교육의 모태 복음농민의숙

2. 새마을교육의 모태 복음농민의숙

1970년대 우리나라의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정신운동이 있다.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하겠다.

특히, 새마을운동사에서 전북 순창군 복흥면과는 뗄 수 없는 인물이 김준이다.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장으로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이끌었고,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준은 이리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한 그는 1951년부터는 갓 출범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임학(林學)을 가르치게 되지만, 교수 임용 3년만에 교수직을 떠나게 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준 원장

당시 한국의 산야는 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해져 있었고, 국가의 근간인 농촌(농업이 산업의 8할)은 몹시도 피폐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덴마크를 전쟁의 폐허에서 푸르게 일으킨 「달가스」를 흠모하며 ‘오직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국립대학교의 교수직을 과감히 버리고 농촌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경찰로부터는 빨갱이 취급을 받기도 하였다.

대학 강단을 떠나 대전, 이리(지금의 익산), 함평 등지의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복음농민운동’을 하던 선생이 전북 순창군 복흥면 답동으로 들어온 때는 1959년 이른 봄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답동으로 오게 된 동기를 살펴보자.

당시 가맛골에는 「평심원」이라고 하는 결핵환자 요양소가 있었다. 이곳을 이끌어가던 사람들은 광주에서 활동하던 순수한 기독교 신앙인들이었다. 이들 중에 광주 동부교회의 목사인 백영흠 씨가 있었는데, 백 목사는 답동에 예배당을 세우고 얼마 동안 전도활동을 하던 중 김준을 만나게 된다.

농민운동을 하면서도 공동생활체를 꿈꾸던 그는 가맛골 산주(백석기 집사)의 양해와 백 목사의 권유를 받고 답동과 가맛골을 무대로 꿈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함께 온 사람들은 그를 따르던 대전농림학원 출신 청년들과 전남 영광에서 따라온 청년 등 십여 인이었다.

김준이 복흥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조림사업이었다. 서두에서 거론한 대로 당시의 산은 대부분 천둥 벌거숭이었다. 전쟁의 폐해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생활이 궁핍해진 농민들이 장작으로 내다 팔기 위해 굵은 나무들을 마구 베어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발과 홍수가 해마다 반복되면서 흉년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향의 재산을 일부 정리한 자금으로 소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은단풍나무 등의 묘목을 구입하여 가맛골과 답동 인근의 산에 심고 가꾸었다. 그때 심어진 나무들은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량이 자라고 있다.

두번째로 한 일은 임학과 교수들과 공동으로 오리나무 육종 개량연구를 하는 한편, 특용작물 재배와 낙농이었다. 집 부근에는 포도밭을 조성하는 한편, 버섯포를 만들고 종균을 이용하여 느타리와 표교버섯을 재배하였다. 낙농사업으로는 양봉을 들여오고, 비육우를 사육하였으며, 우량품종의 돼지를 들여와 새끼를 번식시켜 주변 농가에 공급하고, 샤넨 종種 젖양을 들여와 길렀다. 채밀기에 나오는 꿀은 광주 등지에 팔아서 생필품 구입자금으로 사용하고, 양유는 구성원들의 영양을 보충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아주 혁신적인 분야들로써 당시 우리나라의 농촌, 특히 복흥이라는 분지 안에서는 전혀 보지도 못했고, 생각지도 못할 매우 앞선 모습들이었다.

생전의 김준 원장

세 번째로 한 일은 주민들과의 대화였다. 당시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들어와서 보지도 못한 일들을 벌이는 데에서 오는 반감과 경계심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전도하며 수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예배시간을 갖고, 끝난 후에는 농사에 필요한 의견들을 주고받곤 하였다.

복음농민의숙의 핵심 사업중 하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가르친 일이었다. 처음에는 김준과 함께 온 몇몇 청년들이 예배가 끝난 뒤에 청소년들을 모아서 영어, 수학, 새로운 농사법 등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았다. 소문이 돌자 얼마 가지 않아서 배우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결국 김준의 주관으로 중학의 정규과목 대부분을 가르치게 된다. 교재는 광주서중학교에서 헌책을 모아 보내주었다. 숙식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 속에 교수법은 신진 농법을 위주로 한 실습과 이론이 반복되고, 기독교 신앙이 가미된 수업이었다. 또한, 학생들의 근면성과 체력을 키우기 위하여 새벽 4시면 구성원 모두가 일어나 새벽달리기와 냉수마찰로 하루의 첫 일과를 시작했다.

당시에 한국에서 발행되는 유력한 월간지로 『사상계』가 있었는데, 이 잡지사에서 선생의 공동체와 학생들에 관하여 취재를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까지 이름 없이 운영되던 학숙에 붙여진 이름이 『복음농민의숙 福音農民義塾』이며, 여기에 관한 특집기사가 『사상계』<1959년 11월호>에 소개된 바 있다.

이후, 의숙은 1962년 봄까지 운영되고, 김준은 1962년 여름에 복흥을 떠나게 된다. 가맛골 산주(백석기)가 5․16 후 가맛골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사업에 투자하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투자한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가맛골이 채권자에게 양도되어 부득이 가맛골에서 벌이던 일들을 접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또 하나의 일이 선생을 부르고 있었다. 5․16 후에 출범한 「재건국민운동」을 이끌던 유달영 박사의 추천으로 「재건국민운동」에의 동참을 하게된다. 이런 두 가지 일로 김준은 복흥을 떠나게 되지만, 「재건국민운동」에의 동참은 선생이 훗날 새마을운동을 이끌어가게 되는 단초가 된다.

김준의 복흥 생활은 삼년 남짓이었으나, 산간 오지(奧地) 복흥으로서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웃 주민들에게는 말보다 행동으로 계몽의 길을 걸었고, 농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답동과 가맛골에서의 공동체 생활 삼년은 김준 자신으로서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새마을운동을 이끄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고, 새마을교육의 큰 틀을 짜는 데에도 복음농민의숙이 밑그림이 되었다고도 했다.

당시 복흥에서는 국민(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한다 하여도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극히 적었다. 이럴 때에『복음농민의숙』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의숙을 나온 사람들은 일부는 검정고시를 거쳐 상급학교엘 진학하여 공직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있고, 이곳에서의 교육을 생업에 이용하여 축산이나 작물재배를 해온 사람들도 있다. 졸업생 상당수가 사회의 동량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준은 개인적인 욕심은 추호도 없는 분이었다. 농심(農心)을 알고, 오로지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 전체가 잘 산다고 믿었던 분이다. 혜인(惠仁) 국희종이 나환자촌 건설의 꿈을 접고 복흥에 오게 된 것도 김준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김준의 호는 혜경(惠耕)이요, 국희종의 호는 혜인(惠仁)이다. 국희종이 복흥으로 오기로 작정하면서 서로 호를 지어 나누어 갖게 되는데, 김준은 은혜로 밭을 갈고, 국희종은 은혜로 의술을 펼치자는 뜻이 들어있다.

복흥이 어두울 때 횃불을 높이 들어 밝혔던 분,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살게 된다고 믿었던 분, 복흥과 인연이 깊어 복흥을 잊지 못하는 혜경(惠耕) 김준(金準)은 새마을운동으로 민족중흥의 기틀을 놓았던 분이다.

 

<참고자료>

1. 『귀일원 60년사』

2. 『복흥면지』 2011년호

3. 『전환시대의 행정가』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론(박종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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