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12-18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용모가 변화하시고 어느새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하여 예수님과 함께 ‘별세’, 곧 진정한 엑소도스에 대하여 논한 것을 다루었습니다. 그 후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해 참된 엑소도스의 길이 열렸고, 이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함께 죄로부터의 참된 엑소도스를 만끽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상태는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가운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마다 죄와 사탄과 부패한 세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변화산상에서 주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나누었던 ‘별세’, 곧 참된 엑소도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써 그 안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부활의 권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 사실을 확증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5-7)

히브리서 사도 역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는 진정한 "엑소도스"로서 죄로부터의 ‘해방’과 연결됩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예수”로 살아갈 때, 즉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 참된 승리의 엑소도스를 늘 누리는 영광된 주의 백성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과 교만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믿음에 서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하여 곤고하고 지치고 자기자신에 대해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이에 심지어 바울마저 자신 안에 있는 죄성 때문에 처절하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지만 오늘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에 대해 ‘엑소더스’라고 칭한 사실입니다. 15절에서 “내가 떠난 후에라도”는 원어로 (meta. th.n evmh.n e;xodon )(메타 테인 엑소돈)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 단어를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전형적으로 (싸나토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었다면 ‘엑소도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죽음과 관련해서 사용하기 어색한 “엑소도스”를 자신의 죽음에 사용할 정도입니다. 이에 우리는 그가 그의 죽음에 대해 “엑소도스”를 사용한 사실에서 놀라운 주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죽음은 진정한 의미에서 최종적이고 영원한 엑소도스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과 함께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되고 불신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 저는 베드로와 함께 성도의 죽음은 “최종적인 영원한 엑소도스”라고 선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미리 알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한편, 불신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채우면서 이생의 자랑 거리가 많아지면 저 세상을 그리워하거나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이길 수 없고, 삶 가운데 절망하면 죽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더 안전하고 평안한 영원한 쉼의 장소로 갈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착각은 현재 당하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는 환상일 뿐, 사실 그들은 죽음과 함께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으로 떨어집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완전하게 차단된, 그리고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어둠과 절망과 고통과 악에 빠져서 끝없이 유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닥이 없는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것처럼 불신자들은 죽음 직후에 바닥이 없는 무저갱으로 영원토록 떨어지는 그러한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 1:12-13). 

사실, 불신자들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태양과 물과 공기와 수많은 꽃들과 과일과 음식, 또한 하나님의 잔존하는 형상에 의한 인간들 사이에서의 선함은 오직 이 땅에서 호흡을 가지고 사는 동안만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이 마치는 그 순간,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지옥 갈 날은 각각 그리 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올해에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5년도 채 안 남았고, 어떤 사람은 10년, 젊은이들은 30년에서 50년 정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지 않는 한, 그들은 고작 수십 년 내에 반드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시간이 없는 것입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처럼 믿으며 이 땅에서 맘껏 죄를 짓고 맘껏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18-25)

이들 불신자들을 위해 예배된 것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22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2-2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13:8; 계 20:15).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립니다. 즉, 우리는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진정한 엑소도스를 누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엑소도스를 누리는 상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지날 때는 완전한 믿음을 지니게 되면서 우리의 모든 죄성과 의심과 갈등과 유혹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죽음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태로 들어가는 최종적인 엑소도스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죄와 죽음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어 영원토록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엑소도스”라고 부를 수 있었고, 그에게 그의 죽음은 고작 완전한 희락의 상태, 거룩의 상태,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이르는 최종 단계일 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 이후에 곧바로 진정한 엑소도스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뵙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로마 감옥에서 황제의 결정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었던 바울의 심정이 나타납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2:20-24)

바울은 몸으로 살든, 이 세상을 떠나든, 그리스도와 함께 하니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은 남아 있는 주의 백성에게 더 유익하겠지만, 사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의 관점에서도 죽음은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참되고 최종적인 ‘엑소도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최종적인 영원한 ‘엑소도스’를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에 죽음도 유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더욱더 유익하기 위해서는 육체 가운데 사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위해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바다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풍랑이 이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또한 마귀의 역사가 쉬지 않는 이 세상 및 그 안에 사는 인생을 묘사합니다. 바다가 뛰놀면 그곳에서 짐승들이 나옵니다. 이는 역사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마귀의 종 노릇을 하는 왕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신자들의 삶을 바다에서의 항해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유리 바다”가 나옵니다. 유리 바다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죽음을 지나는 자들이 건너는 바다입니다. 신자들은 죽음과 함께 유리 바다를 건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계 4:6).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2-3). 

이 땅에서는 바다의 위험과 유혹과 풍랑과 환난이 있지만, 죽음과 함께 유리 바다를 지나 주의 품에 안기면 그곳에는 완전한 자유와 거룩과 안전함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내면에 있던 죄성은 죽음을 지나면서 완전하게 제거됨으로 그들은 의로운 영이 됩니다. 이에 히브리서 사도는 주의 보좌 앞에 있는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을 보고 선포합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우리는 죽음을 지나는 순간, 죄와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의로운 영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죽음은 베드로가 언급한 것처럼 최종적이고 영원한 ‘엑소도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영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들을 향한 배척과 핍박이 진행될 것입니다. 특히 역사 끝에 이르면 대환난이 있어서 그때 교회가 겪게 될 고통과 핍박은 로마 시대보다 더 심할 것이며,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심한 핍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땅에서 어려움과 핍박을 받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장 하나님의 보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주의 백성이 죽음을 지나자마자 하나님의 보좌 앞인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9-17)

그러므로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계시록 7장을 듣게 될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주를 향한 믿음의 정절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죽음이 고작 최종적인 ‘엑소도스’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엑소도스를 지난 후에 흰 옷을 입은 거룩한 무리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고 찬양하며 외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바다의 풍랑으로 인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통해 하나님과 쉬지 않는 교통과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그들 위에 있고, 그들은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상함도, 해함도 없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최종적인 영원한 엑소도스의 상태에 들어갑니까? 바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떠한 고난과 환난을 당하든 죽음 직후에는 완전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죽음 직후에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난 후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염려 거리가 완전하게 사라져 더 이상 염려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실패나 속상한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내 영혼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만족과 평강의 엑소도스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어 우리 영혼은 끝없는 생명수를 마시며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안식의 상태로 있다가 ‘인자의 날’에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장막이 이 땅에 내려오는 새하늘과 새땅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면 다시는 죽음도, 애통도, 아픔도, 상함도 없을 것이며, 온 땅의 모든 피조물들 역시 완전한 평화와 건강과 사랑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모든 동물을 포함한 만물 역시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롬 8:18-23).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은 어느 날 반드시 죽음을 지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불신자들에게는 지옥 문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최종 엑소도스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개역한글).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보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성큼 성큼 우리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의 몸이 연약하여지는 것이고 몸이 늙는 것입니다.  

누구나 얼마 후에 죽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죽음을 지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병에 걸려 죽음을 지날 수 있고,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죽음을 지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늙어서 죽음을 지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안전 사고에 의해 죽음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어린양의 피로 값을 치르고 구원을 얻은 자들마다 오늘 베드로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죽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삼천층, 곧 낙원에 들어가는 입구이며, 영원한 안식과 만족과 희락에 들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죽음이라는 최종 엑소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 예수님을 만날 그날을 더욱 앞당기고 싶습니까? 혹은 롯의 처처럼 썩어질 세상에 더욱 마음과 삶을 빼앗기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아직도 여전히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오늘이라는 날에 왜 삽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돈을 위해 삽니까? 쾌락을 위해 삽니까? 인기와 권력을 위해 삽니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죽음 앞에서 참으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참으로 오늘이라는 날에 날마다, 죽음과 함께 저 영원한 세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썩어질 것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 살아온 자들은 죽음이 최종 엑소도스인 것을 알기에 오히려 진심으로 죽음을 감사하며 주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던 바울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참으로 죽음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됩니까? 오직 지금 죽더라도 주님 만나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들에게만 죽음은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 보시기에 지금까지 날마다 보람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가 아닌 자들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롯의 아내처럼 죽음 앞에서 저 세상으로 가지 않으려고 뒤를 돌아보며 눈을 감지 못하며 온 몸을 버둥거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목자로서,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탁 받아 맡은 자로서 간절히 호소 드립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영원한 보람과 영광을 위해, 그리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외칩니다. 
“바울처럼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그리스도로 살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2:20-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처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며 주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베드로후서를 통해 베드로의 유언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최종 엑소도스를 바라보는 베드로가 주의 자녀들에게 무슨 유언을 했습니까? 그것은 베드로후서 3장 17-18절에서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즉, 너희가 굳세게 붙든 복음의 말씀으로 신의 성품에 동참하여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것이 그의 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종 ‘엑소도스’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즉 우리의 호흡이 마치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가며 그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며, 이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장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넉넉히 감당함으로 하늘의 보화를 날마다 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당부하십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 …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늘 영원한 나라를 위해 투자하고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주 예수님을 만날 때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함께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주의 백성들이 날마다 ‘죽음’이라는 최종 엑소도스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30)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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