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7:9-14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본문 바로 앞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숫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한 지파마다 12,000명씩 더해진 숫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구의 수를 세라고 하실 때에는 전쟁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군인의 수를 계수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백성의 수를 센다는 것은 곧 전쟁 준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9절에서 "이 일 후에"라고 한 것은, 전쟁에 나갈 144,000명 즉 여호와의 군대가 소집된 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것은 동서남북 네 곳을 말하듯 이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온 세상에서 여호와의 군사들이 모여서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흰옷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다. 제사장은 아무나 될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지명하여 부른 아론의 아들들만이 될 수 있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 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출 28:1). 그래서 민수기 16장을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만을 품은 고라와 다단과 온 등 족장 250명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들 모두 땅이 갈라져서 그 속에 장사되는 최후를 맞이하는 심판을 받게 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날 베드로전서 2장9절의 말씀을 토대로 한 "만인 제사장설"로 인하여 교회에 다니면 누구나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족보에서 통과되어야 했다. 그리고 족보에서 자격이 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육체 및 직무 테스트를 해서 자격이 되는 사람은 흰 옷을 입혔지만,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검은 옷을 입혀서 내보냈다. 오늘날 목사 가운을 검은 색으로 많이 입고 있는데, 계시록 6장에서 각기 다른 색의 네 말들을 등장시키며 검정은 기근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이나 신약시대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택하신 족속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성경도 묵상하지 않고 평소에 찬양과 기도생활도 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루 예배를 드렸다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는 싶은데, 제사장이 갖추어야할 것을 갖추기 위해 힘쓰는 것은 싫어한다.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삼으신 것은, 그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전세계에 나누어주는 축복권을 주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해서 양육하듯 제사장은 하나님의 양떼를 양육하기위해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보이지않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희생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희생을 할 수는 있으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144,000 즉 하나님의 군대로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왕같은 제사장'인 것이며, 영적 전쟁터에서 마귀의 군사들과 싸울 생각이 없이 그들과 타협하고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오히려 주의 종들을 핍박하는 이들은 아무리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책을 갖고있다고 할지라도 '왕같은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본문 14절에서 언급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므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제사장의 옷을 아무나 입을 수 없는데, 본문에는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 흰색은 성결과 승리를 뜻하는 색이다. 그래서 제사장의 복장을 보면, 성막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 성결"이라는 글을 쓴 정금으로 된 패를 이마에 붙여야 했다.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출28:38).

오늘날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주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흰옷을 입은 제사장들의 의복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주신 것이다. 더운 여름만 되면 많은 이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팔, 다리를 다 드러내놓은 옷을 입고 양말은 당연히 신지 않고 슬리퍼같이 정식 신발이 아닌 편한 신발을 신고 예배의 자리에 나온다.

출애굽기 28장에는 제사장의 의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은 먼저 베로 만든 속바지를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내려오도록 입어서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입어야 한다(42절). 그리고 그 위에 흰 베실로 짠 반포 속옷을 입어야 한다. 여기에서 속옷이라는 것은 양복을 입었을 때, 와이셔츠가 겉옷이 아니라 속에 입는 옷인 것과 같은 개념이다. 이 흰색 속옷은 제사장들의 평상복이다. 

흰색 속옷은 계절과 상관없이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오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매어야 했다. 특히 1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여 속죄소 안에 염소의 피를 갖고 들어가서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은 흰옷을 입고 들어갔으며, 그 날에는 모든 백성들도 흰옷을 입어야만 했다.

교인들은 아무렇게나 시원하게 입고 편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아무리 무더운 여름일지라도 목사 만큼은 양복을 입고 또는 목사 가운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또한 모순이다. 교인들이 정말로 자신들도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도 목사와 똑같이 양복이나 정장을 입고 주님 앞에 정결한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 외모는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변화산상에서의 모습이나 계시록 1장에서의 모습은 모두 흰옷을 입은 왕같은 제사장의 외모이다. 계시록 1장1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사야 6장에서는 스랍들이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리고 만군의 여호와께 "거룩하다"하며 찬양하는 모습이 나온다.

오늘날 예배시에 목사가 가운을 입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많이 하는데, 사실 가운을 입는 목적은 권위를 나타내는 것보다 앞서서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그들의 신전 안에 있는 제사장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옷을 벗고 있으며 머리를 밀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와 완전히 다르게 모든 부분을 가리게 했으며, 머리를 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 아무 제사장이든지 안 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겔 44:17-23)

따라서 모든 예복은 하체를 완전히 가려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사를 하거나 또는 찬양인도자들이 통일해서 옷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짧은 치마를 입거나 하체가 드러나도록 몸에 딱 맞는 바지를 입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지시하신 바와 완전히 다른 선악과를 따먹는 반역을 저지르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라고 자세히 지시하신 이유는,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체는 인간의 죄성을 상징한다. 

[적용]

본문에서 말씀하는 흰옷을 입은 무리나 왕같은 제사장은 같은 의미를 가진 자들이다. 제사장의 직분은 주님의 백성들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는 것이다. 주일에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교회를 찾아가서 내 기분을 만족시켜주는 예배만 참석하고 기분좋게 집에 돌아가는 것은 제사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평일에도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예배자의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는 완전히 제사장이 되어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세상 일을 모두 뒤로 하고, 내가 원하는 오락이나 쉼을 멀리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예배에만 집중하여 번제단에서 새까맣게 온 몸이 다 타서 재가 되는 제물처럼 나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희생을 하며, 혹시라도 죄를 짓지 않았나 살펴서 매순간 회개하며 주 앞에서 성결에 힘쓰는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이란 개념은 내 몸과 마음이 편하게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도록 온전히 그분 안에 연합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자리에 앉아볼 시간도 없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쉬지않고 일해야 하는 날이다.

★ 그 동안 나는 이마에 즉 내 생각 속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며 살아왔는가, 아니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채 살아왔는가?

★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 몸이 적셔졌는가? 그분의 의로운 옷을 입고 있는가? 나의 의를 걸치며 살아가는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갖고 속죄소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남은 피는 자신이 입은 흰옷에 다 뿌렸다. 나는 진정으로 나의 죄를 속죄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온 몸에 뒤집어 쓸 수 있는가? 아니면, 흰옷에 묻은 핏자국을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봐, 그리고 그 옷을 빨기 귀찮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 피가 묻을까봐 조심하며 살지는 않는가? 즉 나는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전혀 없는가?

★ 평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내 차림은 어떠한가? 특히 여름철 나의 복장은 어떠한가? 나의 편함을 위한 복장인가, 아니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복장인가? 즉 나의 희생이 전혀 없는 자세인가, 아니면 나를 죽이고 희생하는 자세인가?

★ 출애굽기 28장에서 말씀하는 제사장의 옷과 현재 내가 입고다니는 옷 또는 예배드리러 갈 때 입는 옷은 얼마나 다른가? 나는 하체를 얼마나 드러내놓고 살고 있는가? 즉 나의 죄성을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있는가? 

오늘날의 패션은 될 수 있는대로 하체가 완전히 드러나도록 만들고 있다. 바지나 치마가 허리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골반에서부터 내려오게 변했다. 또 과거엔 남자들의 바지는 통이 넓었는데, 이젠 남자들의 양복도 바지가 몸에 딱 붙는 형태로 패션이 흘러가고 있으며, 여자들의 바지는 더이상 붙을 수 없도록 레깅스를 입어서 완전히 하체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치마길이는 '똥꼬치마'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엄청 짧아져서 그런 치마를 입고 앉으면 치마가 더 올라가므로 속팬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따라서 그런 차림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이들의 팬티를 보며 설교자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겔 42:14)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끊임없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각을 하기를 원하시며 거룩한 말과 거룩한 표정과 거룩한 몸짓과 거룩한 행동을 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 그만큼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크다는 것이다. 현재 나에게 주님을 향한 어떠한 소명이나 사명이 없다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흰옷을 입은 수많은 무리 속에 내가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천국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항상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것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새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선택한 나의 의의 옷을 벗어버리고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의 옷, 그분의 의로운 옷을 입어야만 한다. 내가 아무 옷이나 걸치고 아무렇게나 말하므로 나의 죄악이 주변의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는 커녕 그들에게 더욱 죄를 짓도록 부추기지 말아야 한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오늘도 내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주께서 지정해주신 제사장의 옷을 입고 죄를 멀리하며 주님의 양떼들을 위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생각과 언행은 거룩하지 못하면서,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아무리 외쳐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오늘도 성령충만함을 간구하며 오직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성령 안에서 말하고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 거룩한 길로 가도록 부르시며 이끄시는 그분처럼 거룩한 자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원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기도 제목]

1) 혼과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저의 삶을 돌아보면, "여호와께 성결"이 아니라 "내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떨어진 생활을 해온 저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불러주시며 사명을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제 삶 속에서 모든 선택의 기준은 제 지식과 상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아닌 제 의의 옷을 입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진정으로 셀 수 없는 흰 옷을 입은 무리에 속하고 싶습니다.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4) 저도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떠들며, 목사님이나 교사들을 우습게 보며 그들과 내가 아무 차이가 없고 그들도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을 고백합니다. 옷차림에서는 그들과 내가 다르며 그들은 정장을 입어야 하지만 나는 교인이므로 괜찮다고 하면서, 다른 면에서는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질서의 하나님 앞에서 무질서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오니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살도록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저를 이끌어주옵소서.

5) 직장에 갈 때에는 정장을 입거나 귀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멋을 내고 나갔으면서, 정작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기도 하고, 하체가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가기도 하며 저의 죄악을 완전히 드러내놓고 갔음을 고백합니다. 죄악을 품은 기도와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주님께 결코 상달되지 못할 자세로 나아갔던 과거가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품격을 갖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6) 저 자신을 부인하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님의 지체로서 온유하고 겸손히 살게하여 주옵소서

7)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생각과 언행을 하며 살아가는 셀 수 없는 흰 옷을 입은 무리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함을 받았다는 증거를 갖고 증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오늘도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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