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 한 때 / 야생화 놀이/ 고추 / 부부 / 광년 / 임차인 / 오토바이 / 비빔밥 / 시인 / 잊혀져간다 / 유기농

                            장영생

 

내게 맞는 옷 고르려다
이내 문을 닫는다
바래고
헐렁하고
후줄근한 몸만 걸려있는 옷장
무엇에 맞출까
깊은 묵상 뒤져도
보이지 않는 나
맵씨나는 속옷 
챙길 나이는
산등성이 너머
발뒤축만 보이는데
꾸미고 싶고
보이고 싶어도
내게 딱 맞는 옷
처음부터 없었다
어울린다고
인생이 다 그런거라며
이런 자리
저런 자리
흔들리고
바둥거리다
건너니 하늘 문 가까운 것을

 

소나기

                          장영생

한방울
두방울
톡톡
두드리는 손등
젖힌 고개 위로
시커멓게 지나며
가을 빛이 미안해한다
먼저 떠난 아우들
달래주려나
후드득 쏟아 붓는다
아주 짧게
적시다 만 골목길
코빼기 내민 가을이
밟히며 지나간다

 

텃밭

          장영생

 

돌아서면 무성한
한여름 잡풀들
무서운 식성 제치고
손가락만 하던
오이
가지
스무날 사이에
애기 팔뚝만하다
빈 구석
한 삽 푸고
찔러 둔 호박씨
오롱조롱 서울마디
뻐근해진 허리 
추수릴 틈 안주는 텃밭
목마른 텃새
쪼아 먹은 복수박
여남은 개 썩은 것도
이리 속상한데
찜통에 무너진 밭
농사꾼은 어떤 맘일까

폭우

         장영생

까만 밤 지우려나
밑빠진 독이었나
밤새도록
퍼붓다가
새벽빛 들이치니
희멀건한 속살
부끄러워
회색 구름으로 숨는다
이대로 물러날까
존심 남아
반항하는 끼리 끼리
몰려 들다
부딪힌 한 방
이 동네 
저 동네
넘어가며 
벌건 대낮 부숴뜨린다

                           장영생

호미에
달라 붙고
바짓가랑이에
엉켜 붙고
한 톨도 아까워라
밭에 털며 웃는다
흙으로 나고
돌아가야 될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압니다
뒤꼍 한뼘 땅이라도
놀리고
게으름 피면
무성한 잡풀들
못된 짓은 해도
나쁜 짓은
한적없다는 농부
거름 냄새가
땀냄새보다
향기로울 때
흙은
우리 손으로
웃고 울다가
돌아올 날 기다린다고

 

소명

                      장영생

 

잠시 와닿은 느낌
막연한 허상인데
제 멋대로
소명이라 여기는건
아니기를

예정이었고
주의 뜻
이루기 위해
이 길로 인도하신 것이기를

자랑도
명예도
부도 없는 이 몸
어느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고목이 된 지금
세상 밭만 구르던 돌
구르다
구르다
스홀에 떨어질
죄악과
부끄러운 인생으로 범벅인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셔서
주의 이름 높이는
그릇이기를

마음 다잡고
각오하게 하소서
힘들지라도
능력이 부족하여
실망되는 일 만날지라도
포기하지 않토록
보여 주시는 증거들
이 죄인 쓰시려는
예정인 것을
확신 갖게 하소서

 

처서

                             장영생

슬금슬금
삐집고 보지만
순서 바꾸면
부담되겠고
기다리는 것 보면
뛰쳐 나가고픈데
서있는 말복
밀칠 수는 없고
줄줄 흐르는 땀이
애처롭구나
용광로 등에 지고
뜨겁게 불어대니
몰리기만 하다
아주 구석까지 밀렸다
예전 입추도 한물 갔는지
이름 값도 감췄다
열린 창으로
시원하게
들이 대주면
새벽잠이라도 편해지련만

 

한 때

                     장영생

 

울음 구별사 암매미
떼창속 짝 골라
힘쎈 놈 
데려 갔나보다
도심의 숲
이 정도는
받아주겠지
칠년 묵힌 어둠
햇살 두 주간
악다구니도 부족할 시간
생각이 짧았다
입추 지나
말복 가까우니
불 뿜던 한여름
지쳤는지
주춤거린다
그래
기다릴줄 모르는 우리
낙엽 되기 전
푸른 잎이
화려하게
불사르는 이유
남겨두고 싶은 한 때라는 것

야생화 놀이 

             

                           장영생

 

고냉지 능선
풍차도 시들었나
힘빠진 날갯죽지
찜통 덜어주는
숲속 노래 마당
천삼백삼십 고지
만항재
함백산 오르막
야생화 모여 사는 고개
작은 꽃마다
작은 생명
벌이 꽃술찌르면
쳐져 있던 꽃잎
움찔거린다
말나리송이풀
참나물
큰제비고깔 
섬초롱오빠
눈개승마
노랑물봉선
각시취는 하늘나리만 좋아
제 앞에 세우고
왜미나리아재비
둥근이질풀
꼼꼼히
조곤조곤
들이밀지 않고선
누가 누구인지
색도 비슷
모양도 닮았구나
노루오줌은
금새 눈치 빼았겠다
너른 바닥
온통 차지했으니
이쁘게 그리고픈데
찬찬히
여러번 
들여다 보아도
마음 주지않는 야생화

 

고추

                     장영생

고추밭
새벽 빛 들면
잰걸음에
손놀림 바빠지는
구순 노모
뜨거워지면
못딴다며
마대자루
차기까지
펴지못하는 허리
딸만 내리 다섯 
그놈의 고추가 뭔지
줄기차게 애쓰더니
마지막이 고추였다
나오면 뭘해
유치원 들어가기 전
하늘나라 가버린 남편
애지중지
환갑 넘긴 막내
여섯 새끼
고추밭으로 키웠지
지금도
농사는
고추농사가 제일이라며
고추밭에 매여 사신다

 

부부

                       장영생

새벽 일 나가려
준비할 땐
부엌과 안방사이
미닫이 꼬옥 닫는다
덜그럭 소리
단잠 깨울까
자정 넘어 자는게
버릇인 당신
유난히도
안맞는 사사건건
맞추려다
세월보낸 사십여년
순한 가슴
붉게 물들이고
상처 보듬을 말
건네지도 못했는데
눈 안보아도
나눠지는 대화
버릇 되버린 말투
걸기도 주저되는 말
우물쭈물
결단 못하는 성격이
지탱해 온 비결
게편이던
가재가
옆걸음 치더니
하늘의 별처럼
달라져 버린 생각
당첨 기다리는
로또 버리고
보면서 맞춰 가는
퍼즐로 바꿔볼까

 

 광년 

                         장영생

하루가 몇 초지
머리 굴린다
일분 육십초
한시간은 육십분
하루 이십사시간
복잡한 계산
어지러운 머리
그딴 계산 왜 하는데

질량도 거의 없고
전기도 띠지않는
중성미자
우주의 유령
37억 광년 떨어진
은하에서 내려와
지구 땅속을 뚫고
남극에 있는 센서에
도착했단다
일광년
아니
일년이라 해도
짐작은 커녕
상상도 안되는데
37억 광년이라니
핑핑도는 머리
돌다 돌다
토라도 나올 느낌
억단위 광년과 노는
과학자들
몇 광년을 보내면
하루가 질까

 

임차인

              장영생

여늬 때처럼
그 집을 괴롭혔다
아니다
양동이 물로
통째 날려버린 셈
어미 돈벌레는
냅따 달아나고
새끼는 물에 휩쓸렸는지
주차장에서 세차를 하고
버리는 하수구
세들어 사는 돈벌레
임대인의 기세로
설움을 안겼구나
살만만 하면
비워달라
올려달라
여보
빌라면 어때
꼭 아파트라야 되나
이 통장
저 적금
밤새도록 머리 볶는다

오토바이

                      장영생

구순이 되가는
영감이 재주도 좋아
그 나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니
자식들이 그리
말리는대도
고집인지
집착인지
오토바이 없이 어떻게 사냐고
바람 빼놓으면
그냥 끌고 나가고
키 감춰두면
끌고가서
키 새로 만들고
기름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다니다
언덕배기에서
그냥 끌고 가더라고
엔진이 못쓰게 된걸
자식들이 불쌍하다고
새로 사준게 화근이었나
글쎄
서있는 차를 받아서
자식들
또 난리 났구먼
구분도 못하면서 타냐고
인자 손놓게 될지도 모르지
우회전하는 차에 받혀
몇개월 
병원 신세지다
퇴원 앞두고 미끄러져
고관절에 금이 갔다고
다시 오토바이 타실거냐
며느리가 물으니
오토바이 없잖아
아들이 버린걸 알고 
서운해 하시더란다

비빔밥

                                장영생

맨 꼭대기 가지
나뭇잎도
끓는 햇살 못견디나
고개를 숙였다
땅에서 올라오는 뜨거움
그늘 숲이 덜어주고
물소리에 끼워 넣은
산새들 이중주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작은 날 것들 먹이
젖어드는 소매
달라붙는 바지가랑이
그늘과
바람 섞은 산채 비빔밥
물소리에 산새소리 
육회 비빔밥
찜통으로 지은 돌솥 비빔밥
저 앞이 능선인데
정상이 보이는데
타는 입술
빈 물병
아서라 여름이란다
비빔밥엔 오이 냉국이 최고

 

시인

                            장영생

 

내게 붙여준 도구
시인입니다
이쁜 말로 훔칠 맘
전혀 없는
그저 나를 위해
쫑긋 세운 귀로
한마디 한마디
현미경처럼
살피다가
힘겨운 일 버텨주는
예쁜 글만 그려보는
시인입니다
모임이든
어디서든
고운 글
고운 마음
고픈 이들과
나누고 받는
본성 깨우는 시인
읽히고 싶은 도구입니다

 

잊혀져간다

                             장영생

철조망 넘어
떨어지던 붉은 장미
흘리는 눈물 보이시나요
흐르는 물따라
불어드는 바람에
색은 바래가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사변
기웃거리지도 못한채
슬그머니 넘겼지요
그런일이 있었는지도
꺼내 볼 맘조차
없었던게 아닐런지요

양은 공기에 숟가락
달랑 들고
한 주걱 퍼주는 집 앞
줄을 서는 아이들
솜바지만 입어도
따뜻했지
홑껍데기 달달 떨며
씻지못한 검뎅이
눈만 빤짝
쵸코렛 기브미
어디서 주워들은 꼬부랑 말
미군트럭 쫓았던 일

잊는게 많으니
기억이란 단어가 
빛처럼 보이네요
보이는건 같아도
보는게 다른 우리 세대
이젠 우리도 그냥 넘겨볼까
생각 다듬어 보려
쎈 장마 기다립니다

유기농

            

                       【장영생 詩】

잎파리는 고라니
멧돼지는 뿌리까지
우린 뭐 먹고 살라고
먹다 조금 남겨주면 어때서
걔들이 그걸 알면
그리도 먹어댈까
두더쥐
달팽이
배추벌레
소문없이 찾아드는
벌레들 놀이마당
동물농장 따로없네
옆집
뒷집
앞집
우리집 에워싼 독한 약들
식구끼리
조금 부쳐 먹자고
농약 한번 안쓰니
이름 모를 잡초천국
유기농은 늘 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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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국제문학 신인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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