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예수학(Jesustics)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대해야

박호용 교수, 대전신학대학교 신대원장, 연세대학교(B.A, Th.M, Ph.D), 장로로신학대학원(M.Div.) 등, 저서: 창세기 주석 외 10권 이상, 설교집: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외 6권, 역서: 모세 외 4권, 왕성한 연구 및 복음 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1. 필자는 대전신대에서 5년 동안(2000년 3월-2005년 2월) 교수생활을 했다. 그 후 선교사로 사역 하다가 13년만에 다시 교수로서 대전신대 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난 날의 교수생활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반복교육의 필요성’이었다. 이를 위해 매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찬송 하나와 말씀 암송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기도를 먼저 하고, 이어서 찬송을 부른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 당신은 존귀한 사람,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당신은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그런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 당신을 축복해요,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당신은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필자가 이 찬송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고자 한 동기는 이 찬송 가사에 담긴 뜻을 학생들이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능히 이기며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2. 이어서 필자는 전화번호 408-539-1136을 함께 외우는 시간을 갖는다.

이 전화번호는 성경구절로 된 하나의 상징으로써, 408은 창세기 40장 8절과 이사야 40장 8절을 말하고, 539는 요한복음 5장 39절을 말하고, 1136은 로마서 11장 36절을 말한다. 이 같은 네 구절의 성경 말씀을 암송하게 된 배경에는 유대인들의 ‘테필린(Tefillin)’ 교육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이다. ‘테필린’이란 유대인들이 머리와 손목에 매는 네모난 작은 상자로써 그 안에는 네 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성경구절들이 들어있다. 쉽게 말해 테필린은 ‘성구함’(또는 ‘경갑’)이다. 테필린에는 네 개의 말씀, 즉 출애굽기 13장 1-10절, 출애굽기 13장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및 신명기 11장 13-21절이 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 네 개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밤낮으로 암송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평생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반복해서 암송하듯이, 유대인들은 이 네 부분의 성경 본문을 세뇌가 되도록 평생 반복해서 암송하는 교육을 시켰다. 유대교육의 성공비결은 바로 테필린에 대한 반복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네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러하다.

 

3. 테필린의 첫 번째 방에 있는 제1의 말씀(출 13:1-10)의 주제는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한 일을 제일 우선으로 삼았다. 제1의 말씀에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는 원리를 찾고자 한다. 두 번째 방에 있는 제2의 말씀(출 13:11-16)의 주제는 ‘봉헌’이다. 즉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초태생인 장자(동물도 해당)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모든 초태생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에 있는 제3의 말씀(신 6:4-9)의 주제는 ‘섬김’이다. 세 번째 말씀은 ‘쉐마’ 본문으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하라(섬기라)는 것이다. 네 번째 방에 있는 제4의 말씀(신 11:13-21)의 주제는 ‘축복’이다. 앞에 세 개의 방에 있는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면 반드시 축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와 달리 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엄청난 고난과 저주가 임한다는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네 본문 중에서 제3의 말씀인 ‘쉐마 본문’(신 6:4-9)이 중심이고, 이를 바탕으로 후대에 다른 본문들(출 13:1-10; 출 13:11-16; 신 11:13-21)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4. 테필린의 네 말씀처럼 전화번호 408-539-1136에 담긴 네 말씀을 필자는 ‘새 테필린’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새 테필린’의 말씀을 하나씩 자세히 다시 설명하면 이러하다.

첫 번째 방에 있는 제1의 말씀(창 40:8)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다. 애굽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인 애굽 왕에게 범죄하여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날 동시에 꿈을 꾸었으나 이 꿈을 아무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있었다. 이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감옥에 와 있는 요셉이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가득 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자기에게 말하면 그 꿈을 해석해 주겠다고 했다. 결국 요셉이 그 두 사람의 꿈을 제대로 해석해 줌으로써 요셉은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모든 것은 해석’이라는 사실이다. 꿈을 꾸는 것보다도 꿈에 대한 해석, 즉 해몽이 중요하듯이 인생도, 역사도, 성경도 모두 다 결국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네 인생의 행복의 비결, 성공의 비결은 결국 해석을 잘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대로 해석을 잘 못하면 불행해지고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만다. 요셉이 이방 땅인 애굽에서 성공한 것은 해석을 잘해서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해석을 잘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꿈에 대한 해석을 잘할 수 있도록 그에게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해석, 하나님이 들어간 해석, 그것이 좋은 해석, 잘 된 해석이다. 성경이 인류 최고의 걸작품이고 영원한 베스트셀러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써간 이야기(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인생이 명품인생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최고의 작가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 드라마를 써 갔기 때문이다.

 

5. 두 번째 방에 있는 제2의 말씀(사 40:8)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제2이사야(사 40-55장)에 속하는 이 말씀의 배경은 이러하다. 주전 587년 유다 나라는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 땅으로 포로되어 끌려갔다. 역사적 파국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그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적 회의 속에 빠지게 되었다. 즉 고대의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신들의 전쟁인데, 그 신들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하여 자신들이 지금 디아스포라 포로민 신세로 전락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가 와해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살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신학적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이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한 것이었다. 즉 성전이 있을 때는 ‘문서화 작업’이 절박하지 않았으나 성전이 불타고 난 후 이스라엘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살 길은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 전승을 문서(책)로 남기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모세오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명기 역사서(수-왕하)가 문서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예언자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에스겔, 제2이사야). 이렇게 해서 토라(모세오경)가 책으로 엮어지고, 이어서 예언서가 책으로 엮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전 종교’를 대신한 ‘책(말씀)의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제2이사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외치면서, 멸망한 백성 이스라엘이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일’(사 40:8)에 있음을 역설했던 것이다.

6. 세 번째 방에 있는 제3의 말씀(요 5:39)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은 신구약성경이 두 권의 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한 권의 책임을 증언하고 있다. 신구약성경을 통(짝)으로 된 한권의 책으로 읽고 가르쳐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신구약성경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고, 구약학 전공교수와 신약학 전공교수가 서로 경계를 지어 넘어서지 못하도록 과목을 정하고 가르치면서 신구약성경을 두 권의 책으로 이분화시켰다. 이는 결국 성경의 진리가 왜곡되는 결과를 빚었고, 나아가 성경이 힘을 잃고 교회는 위기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교에서 신구약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이분화되자, 이어서 신학교와 교회가 이분화되고, 교회와 사회가 이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우리의 몸이 통전적인 하나의 몸일 때 온전한 생명을 지닌 몸이 되지만, 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순간 생명이 없는 죽은 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한 권의 책인 신구약성경이 둘로 나누어지면서 구약을 해석할 때 성경의 중심이요,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해석이 난무하고, 반대로 신약을 해석할 때 그 뿌리가 되는 구약과 단절됨으로 뿌리(생명)없는 나무처럼 근본을 잃어버림으로 빗나간 해석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필자는 “신학은 예수학(Jesustics)이다”를 부르짖으면서 하나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권의 책으로 신구약성경을 대해야 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종래의 신학이 경계와 세분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 정신에 따라 성경신학도 구약학과 신약학으로 구분했으나, 이제는 해체와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을 따라 ‘그리스도 중심주의’로서의 ‘예수학’, 한 권의 책으로서의 ‘성경학’으로 신학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7. 네 번째 방에 있는 제4의 말씀(롬 11:36)의 주제는 ‘주께 영광’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 즉 1-11장(이론편)과 12-16장(실천편)으로 나누어진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론편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1-11장 전체를 요약하는 결론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주(主)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즉 역사의 모든 주권은 하나의 초점인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함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로마서의 중심부분인 9-11장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말하는 ‘바울의 역사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동족 유대인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그들을 통해 이방인이 구원받기를 원했으나 그들이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바꾸어 이방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고, 나중에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생의 제일의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교황을 비롯한 교회가 가로챘다고 보고, 종교개혁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에 있음을 역설했던 것이다.

 

8. 결론적으로 테필린의 네 말씀의 핵심이 제3의 말씀인 쉐마에 있듯이, 필자가 전화번호 408-539-1136이라는 상징을 통해 명명한 새 테필린의 네 말씀의 핵심 또한 제3의 말씀인 요한복음 5장 39절에 있다. 즉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요 5:39)이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창 40:8; 요 20:28)이요 하나님의 말씀(사 40:8; 요 1:1)이자 주님이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롬 11:36; 요 17:1),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기독교회와 만물(인류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명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복음)를 증언하는 일(전도와 선교)에 온 힘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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