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표절의 비탈길에서 (2)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해아래 새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창작이란

과연 학문의 세계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라 칭할 만한 이치나 진리가 있는 것일까? 해 아래 새것이 없음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진리다. 새것이라 부르는 것들 속에는 옛것의 흔적이 다분히 남아있다. 유행이 한 시대나 수십 년의 주기를 두고 뒤바뀌는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하나의 반증이 된다. 특정 주제나 이슈를 다룸에 있어 너무 독창적이면 일반인의 관점에 용납되기 전까지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심지어 이단시된다.

그래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인된 학자나 전문인의 표현을 빌려 활용한다.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과정에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언어로 옷 입혀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 어디까지 표절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무 자르듯 그렇게 쉬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동일한 개념과 거의 같은 표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창작될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특정한 표현이 반드시 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도 맞지 않다. 지적 경험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뇌에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듣거나 꼭 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 불교에서는 이를 인연(因緣)이라 하고 일반적으로는 데쟈부(deja-vu)라 칭한다. 옥스포드 사전(Oxford Dictionary)에서는 데쟈부를 “현재 상황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낌”이라 간단히 정의한다. 기억하는 장면이나 사건이 분명히 첫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꼭 듣거나 본 것처럼 느끼는 이 심리 현상을 기시(旣視) 체험이라고도 부른다.

 

●표절의 벙커(Bunker)를 벗어나 창작의 그린(Green)에 공을 올리라

성경은 어떠한가? 사실 네 개의 복음서는 하나의 자료, 혹은 여럿의 소스들에서 비롯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시대적 차이를 두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 받으며 자신만의 복음서를 남겼다.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그들 중 누구에게도 표절했다 말하지는 않는다. 유사점과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 서로가 특정 소스를 활용했지만 각자의 경험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창, 그리고 각자의 특유한 지적 프레임에 따라 메시지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표절의 영역에 해당하는 내용이 얼마인가 보다 저자가 펼치는 전체적 맥락에서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물론 짜깁기 식의 글은 단죄되어 마땅하다. 매번 표절 시비에 걸릴 만큼 그런 부류의 글을 써왔다면 비판받을 만하다. 하지만 한두 번의 해프닝 때문에 수십 년간 갈고 닦은 학자의 학문 여정에 비난의 봇물을 퍼붓는 것은 지나치다. 개인의 지적 자산을 법적으로 보장하기 전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를 공유했기에 표절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작금의 표절에 대한 시비곡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학자는 표절의 벙커를 피해 창작의 그린에 자신의 공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먼저 알고 먼저 깨달은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의 위치에서 나중 알고 나중 깨닫는 후지후각자(後知後覺者)의 본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학문 자체만이 아니라 학문하는 모든 과정에서도 모델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럴 때 우리 사회의 저변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갑질의 대상이 되어버린, 소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부지부각자(不知不覺者)들을 지극히 밝은(明明) 앎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선지선각자/후지후각자/부지부각자는 쑨원(孫文)이 <삼민주의>에서 소개한 개념)

 

●표절의 시비를 우리라는 아우름으로 보듬어야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휘갈기는 글발 얼마로 한 사람이 죽고 살 수 있으며 공동체가 삐걱거리거나 단단해질 수 있으며 나라가 한풀이 소동에 휘말리거나 국격의 진작에 한 몫 할 수 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너와 나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대의 동류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해야 할 열린 지체들이다. 진정 펜이 칼보다 강하다면 살인검 아닌 활인검으로 표절의 불길을 잠재우고 창작의 불씨를 살려내는 칼춤을 추어야 한다.

남북 대치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는 지난 시기에 남남 갈등, 동서 분열 같은 아찔한 대립을 겪어왔다. 지금도 그로 인한 어지럼증이 우리에게 있다. 아직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방향키로 인해 위대한 이 민족의 기상은 한껏 움츠려든 상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우름이다. 모든 시대의 아픔을 아우르고, 모든 사상의 다양함을 아우르며, 모든 빈약함과 풍요로움을 아울러야 한다.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적 기개와 대의를 사해에 떨쳐야 한다. 세계사적 개인으로서만 아니라 우리 각자는 숨 쉬며 호흡하는 살과 뼈의 연약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선 자리에서부터 지구의 한 모퉁이를 지키는 주춧돌이어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고 “우리”라는 집합적 개인으로 서로에게 상당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표절과 영구 결별한 창작만이 그 지킴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신학과 강단에서의 표절은 근절되어야

표절이 신성한 신학계에서만은 근절되어야 한다. 이 그늘진 구석이 우리의 공간에 자리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어디 신학 논문만이겠는가! 설교의 표절 현장은 그 기괴한 모습이 더욱 놀랍다. 원 설교자보다 더 능란하게 외치는 이들을 보면 다문 입도 벌어진다. 이건 아니다. 모든 설교자는 자신이 갈고 닦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식의 모자이크 식 설교는 듣는 자의 영혼에 실익이 없다.

교수이건 설교자이건 표절에 연루되었던 본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성하는 마음으로 정심(正心)을 고수하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교수는 모든 것에 앞서 성실한 연구에 매진해야 하며 표절 방지를 위한 진지한 숙의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학교는 교수가 기본적인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배려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보직과 관련된 과중한 짐을 덜어주고 탁월한 강의가 가능하도록 지원하며 학문적 진전을 이룰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한계가 있음은 교수 사회의 녹록치 않은 환경 때문임을 인지하고 학교를 배움의 터전으로 일신시켜나가야 한다.

 

●표절의 신작로를 거절하고 창작의 오솔길로 가는 사람

창작의 길은 외롭고 비좁다. 글쓰기는 구원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창작의 영예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지만 표절의 파멸로 이끄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찾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바른 길인 줄 알면서도 쉽고 넓은 길을 택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래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 것을 권했다. 가르치기도 힘들고 가르친 대로 살기는 더 힘들어서 그랬으리라.

가르치는 이를 우리가 선생(先生)이라 하여 ‘앞 선 자’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은 선생의 삶이 녹록치 않음을 알기에 그렇다. 세태가 쉽고 편안한 길을 택해도 선생은 ‘앞 선 자’이기에 세태를 역류하는 의지를 키워야 옳다. 표절의 신작로를 거절하고 창작의 오솔길을 찾아드는 것이 선생 된 본분이요 지혜다. 창작은 전인미답의 처녀림을 개간하는 것과 같다. 어려움이 있어도 새로움을 익혀가는 즐거움이 있다. 박토가 변하여 언젠가 옥토가 될 것을 알기에 산을 깎아 밭을 일구려는 농부의 신념이 옹골찬 것이다.

당신이 학자라면 학자이기에 우보만리(牛步萬里)의 끈기로 창작의 세계를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 태산을 이루려면 한줌의 흙에서 출발해야 한다. 창작은 고통이지만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영롱한 빛깔의 진주를 얻는다. 김정희의 다채로운 추사체(秋史體)는 그가 제주에서 8년 3개월 위리안치(圍籬安置)란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개를 닳게 하는 열정으로 쓰고 또 쓰면서 일궈낸 피나는 연마의 결과였다. 장인은 신 한 켤레를 만들 때도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다. 숙련된 작가일수록 쓰고 다시 쓰고 고쳐 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사 하나에도 깊이 고민한다. 고심 끝에 만들어진 한 문장, 난산 끝에 태어난 생명이 귀한 이유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댄다.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가는 도중에 마주쳐야 했던 갈랫길이 얼마나 많았던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끄집어내기란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 그래서 천형(天刑)이라 하지 않는가! 창작의 길은 오르기 어려워도 올라야 정상에 선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어야 새날이 이른다. 혼돈(chaos)의 밤을 지나야 조화(cosmos)의 아침을 맞이한다. 창작의 씨를 뿌리면 노작의 열매를 얻는다.

가르치는 이는 먼저 배우고 익히는 일에 뼈를 깎는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 원만한 도의 경지를 이루어 저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토록 해야 한다. 쿵푸(功夫)의 고수들처럼 달인의 경지에 서기까지 공부(工夫 또는 功夫)에 게을리 않는 집중과 몰입이 관건이다. 처절하게 배우고 치열하게 학문하는 자들에게 표절이란 단어는 존재할 수 없다. 표절의 비탈길에 서면 천 길 낭떠러지가 코앞이다. 창작의 오름은 힘겨워도 안전하고 보람차다. 창작의 구로(劬勞) 끝에 누리는 새 생명의 기쁨을 어디 감히 비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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