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이지만 백인들은 백인 편이고, 히스패닉은 히스패닉 편이고, 흑인들은 흑인 편이고, 아시아인들은 아시안 편입니다. 미국을 주도하는 종족은 백인입니다. 백인이 우수해서라기보다 수가 많아서 지배적입니다. 다수인 백인들은 유색인종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정책적으로 철저하게 이민자의 수를 통제합니다. 특히 전문직에 이민자들이 진출하는 숫자를 철저하게 카운터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인종시장 같지만 결코 호락호락 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기타 유럽과는 아주 다른 나라입니다. 흔히 미국을 melting pot이라고 합니다. 종교와 문화를 다 허용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Americanize 되도록 유도하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법은 인종차별금지법입니다. 인종차별금지법이 너무 강력해서 역차별이 되고 있습니다. 백인을 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고 유색인종을 욕하는 것은 인종차별이 됩니다. 기독교와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고 이슬람을 비난하면 종교 차별이 됩니다. 이런 역차별 때문에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이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니까 인종을 차별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인종차별의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인종차별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종차별금지법이 강력한 것은 인종 차별이 그만큼 심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에 편 가르는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유엔도 국제관계도 북핵 문제도 경제와 정치도 편 가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북회담도 결국은 편 가르기입니다. 남한이나 북한은 북핵 때문에 복잡한 국제외교 문제에 얽혀 있지만 결국 미국편인지 중국편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남한이나 북한에게 여러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있지만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간단합니다. 미국 편이냐 중국 편이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남한이나 북한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설명은 매우 기분 나쁜 설명이지만 어느 편이냐 하는 것은 방향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가치관에 따라 방향을 설정하고 연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이상과 목표가 대한민국과 같다면 사소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중국 편에 서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대한민국과 지향하는 가치와 사상과 이념이 같다면 사소한 이견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어도 미국편에 서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한국의 보수정당이 저렇게 지리멸렬 된 것도 방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분쟁도 가만히 보면 결국 편 가르기 수준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편 장로 편 안수집사 편 권사 편 은퇴 장로 편 시무장로 편 그 외에 온갖 편당들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 중에 이 편 가르는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부자도 가난한 자도 학자도 무식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차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초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위대한 것도 그가 인종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링컨이 프랑스 장군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노예의 서비스에 일어서서 예를 표하자 프랑스 장군이‘대통령께서 하찮은 노예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링컨이 ‘대통령이 되어서 노예보다 예의를 못 지켜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링컨은 특별한 인간이고 우리 모두는 사실 링컨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편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의 놀이에도 편이 있고, 국회의원들의 정치 활동에도 정당이라는 편이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편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도 편이 나누어져 바울편, 베드로편, 아볼로편이 있었습니다. 이런 편당은 부정적인 현상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편을 가르지 않는 사람을 큰 사람, 또는 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편을 가르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릅니다. 따지고 보면 이 편 가르는 문제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가 힘들어 지고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편을 짓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세상 편에 설 것인가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방향성 혹은 지향성의 문제입니다. 즉 남을 공격하고, 누구를 왕따시키고, 해코지하기 위해서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불의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알아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방언이 그 이후의 방언과 다른 점은 외국어를 알아듣는 방언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의 방언은 두 번 다시 있을 필요가 없고 또 사실 다시 일어나지도 않는 방언입니다. 오순절 방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성령께서 왜, 무엇하러 오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행 2:5-11). 오순절 외국어 방언은 행 1:8절의 말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사도들이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방언입니다. 그 할 일이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 사건에 성령 받으면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속의 사역을 누구에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즉 구원 받을 대상이 누구냐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이 이 사실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할 복음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는 사건이 오순절이었기에 사도들은 그 사실을 강조하여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도 힘들었고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바울의 전도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숙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이 사도들 자신들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 17:18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셨지만 그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전한 말을 각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요즘 선교사들이 선교지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시지만 사도들을 보내시고 지금도 선교사를 보내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반드시 선교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시면 됐지 왜 불안전한 사람을 보낼까요?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는 선교나 전도를 통해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는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를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현장은 목회자 훈련 장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교나 목회의 가시적 성과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전부가 아님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빛 되고 소금 되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해도 그마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불신자가 신자를 보고 예수님 믿게 되기보다는 예수님 안 믿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는 전도의 문을 열기 보다는 전도의 문을 닫을 위험성이 높은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가 되고 목회가 되고 장로 권사 집사의 직을 서툴게라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역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차별 없이 소명을 감당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이냐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중대하고 엄청난 일을 어린아이 같고 지렁이 같은 우리에게 맡겨두시고 마음을 놓으시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의 효율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방해가 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수준의 우리들을 하나님 편으로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그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만 하면 우리를 혼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존재가 못되므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라는 방향성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웬만한 실수와 잘못은 눈감아 주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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