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웅덩이에 던져진 요셉을 보라

◐고통의 환경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사랑받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형들로 인해 깊은 웅덩이에 던져졌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으로 갔다. 고난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누명을 씌고 감옥에 죄수로 갇혔다. 요셉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날 때까지 견뎌야했던 13년의 세월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늪에서 견디는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그 여정을 한탄하고 저주하며, 상처로 똘똘 뭉쳐 자신을 학대하면서 보내지 않았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주스러운 고통의 환경을 자신이 주도하는 영향력 있는 에너지로 바꾸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을까? 요셉의 인생에서 어떤 계기로 그런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결단하는 계기가 어디서부터일까?

최원영목사ㅣ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신문 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본국제신학교학장,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충성된 일꾼되어가기,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등

◐깊은 웅덩이에 던져진 요셉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형들에 의해 사막의 깊은 웅덩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울부짖어도 듣는 사람이 없다. 누구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사막이다. 혼자서 깊은 웅덩이를 빠져 나갈 수 도 없다.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웅덩이에서 굶어 기진맥진하다가 죽어갈 것이다. 얼마나 공포스럽고 엄청난 불안이 엄습해왔을까? 상상만 해도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버린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공포가 무엇인지를 그는 깊은 웅덩이에서 경험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왔는데, 깊은 웅덩이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겁 많고 공포감에 가득찬 자신의 실체를 보았을 것이다. 요셉은 깊은 웅덩이에서 부르짖으며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밑바닥에서 외치며 기도하는 요셉을 하나님이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살았기에 청년 요셉은 흐트러지지 않는 존귀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요셉의 깊은 웅덩이 사건은 아버지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과 얍복강에서 홀로 밤을 새워가며 천사와 씨름하던 것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나는 아무 힘도 없고, 의지할 대상도 없고, 부족함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볼 때, 우리는 존재의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다. 잘난 사람은 존재의 바닥에 무릎 꿇은 것이 쉽지 않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바닥에 엎드린 세리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바리새인은 기도를 응답받지 못했고 세리는 응답을 받았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문제를 가지고 엎드렸다.이것이 신앙의 본질을 붙드는 힘이다. 날마다 존재의 바닥에 엎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잘났습니다.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없어도 잘 살 수 있고, 나의 일터와 가정과 인생을 잘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 삶에 깊숙이 관여해서 전적인 헌신도 온전한 순종도 요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냥 방관자의 모습으로 옆에만 계십시요. 내 인생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주인이 아니라 나의 삶 전부를 통치하는 통치지자가 아니라 단순히 부속품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신앙의 형태이다. 내 삶 가운데 예수님과 성경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증거이다.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이다.

바래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신앙적 의무도 잘했다. 그리고 사회적인 수준도 교육적인 수준도 높았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뉘우치지 않았다. 내가 죄인인 것을 늘 느끼고 존재의 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잃어버렸다.

기도원 마당에 뿌려 놓은 잔디씨가 비를 맞으며 제법 예쁘게 올라오고 있다. 하늘에서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절하게 부어주시기에 자연 생태계는 건강하게 순환를 하고 있다.

◐신앙의 근육을 키워라

베드로의 탁월함이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범상치 않는 청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그 결과 두 배에 가득 찰 정도로 고기가 잡혔다. 어부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 앞에 베드로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 하니”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온 젊은 청년 예수에게 무릎을 끊고 엎드렸다. 그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다. 존재의 바닥에 엎드린 베드로를 향해 예수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새로운 사명의 장으로 불렀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명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가? 늘 점검할 분야가 있다. 다른말로 하면 소명을 받고 바리새인으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바뀌어볼 수 있다. 처음부터 손가락질 받는 바리새인은 없다. 바리새인은 다른말로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 생활에 익숙하고 빈틈없는데 마음에 형식만 남은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종교인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고 겉만 화려한 속빈강정이라고 한다. 겉은 덜 화려해도 괜찮다. 그러나 속은 꽉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천성 갈 때까지 쓰러지지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체력이 너무 약하다. 신앙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앙의 근육이 약하면 현실은 골리앗처럼 커 보여 한 순간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중년을 지나가는 분들이 스트레스의 강도를 이겨내지 못하면 한순간 이가 몽땅 흔들리며 쏙 빠져버린다. 이것은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을 사랑하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비전을 사모하면 신앙의 근육이 발달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빈껍대기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꾼만 된다. 빈껍대기는 다만 태워버릴 뿐이다. 그러나 속이 꽉찬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물어가는 것은 축복이다.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세워간다. 속이 꽉찬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존재의 바닥에 엎드려야 한다.

상가집에 가보라. 삶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안개처럼 느껴진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움이 짧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 앞에서는 동일하다. 죽음을 피해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라.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늘 존재의 바닥에 엎드려야 한다. 그러면 추한 모습으로 추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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