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의 사상 사색(2) 한국교회는 구원파적 구원론인가?

한국교회의 신앙이 “구원파적”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는데, 김세윤 교수의 글에서(참고 <칭의와 성화>(두란노, 2013)) 주도적으로 보았었다.

우리는 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에 대해서 비평을 했었고,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을 펴내기도 했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김세윤 교수의 사상을 사색하며 탐구하고 있고, 톰 라이트의 칭의 이해를 병행하고 있다.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신학은 같지 않다”는 짧은 글을 인터넷신문 본헤럴드에 개제했다(2018. 2.14). 김세윤 교수의 사상에 대해서 여러 부분으로 비평을 했었는데,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한국 교회를 “구원파적 구원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구원파에 의해서 한국 교회가 피해를 보았는데, 동질동류에게 어떻게 피해를 볼 수 있겠는가? 라고 한국교회와 구원파적 구원론이 같을 수 없다고 필자는 제시했었다. 그런데 그런 대학자께서 까닭없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색을 했다.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형람서원 대표, 한영대, 총신대, 광주바이블칼리지 강사

그리고 다음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국 교회 대학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 교회가 구원파적 구원론에 있다면 현상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했다. 한국 교회가 구원파적 구원론이라고 비평하면서, 한국 교회에서 나오는 산물을 취하는 것은 구원파적 구원론의 산물을 취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 교회에 유력한 학자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 의아심을 가졌다. 유체이탈화법인가?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들이 현재 한국 교회 상황을 무책임하게 비판만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런데 더 많은 학자들이 한국 교회를 “구원파적 구원론”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이해하고 비평하는지 반복해서 비평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김세윤 교수는 구원파적 구원론에 대해서 자기 이해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 사색했다.

정훈택 교수는 "정통 교회의 입장은 회개하고 죄 사함 받으라는 것인데, 구원파는 회개와 믿음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당신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피동적으로 깨달으면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의지적인 회개나 결단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사이비 기독교의 마력이다"라고 말했다(“누가 한국교회 신앙을 구원파적이라 지탄하나”, 뉴스앤조이, 2005, 4, 26). 구원파적 구원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칭의 후에 성화가 없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맹점은 하나님께서 하신 칭의에 성화도 하나님께서 하심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이중은혜).

정훈택 교수가 제시한 구원파적 구원론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필자가 생각한 김세윤 교수가 제시한 구원파적 구원론은 다음과 같다. “김세윤 교수는 1세기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완전하게 이루었다고 스스로 믿는 것을 구원파적 구원론으로 정의했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믿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피동적 구원이라고 착각까지 한 상태로 김세윤 교수는 분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맘몬에 빠져버린 한국교회를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필자도 어느 부분까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파적 구원론이라는 용어로 고착시켜야 하는가에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 구원관에 문제가 있다”는 분석과 “한국 교회는 구원파적 구원론”이라는 단정은 크게 다르다.

김세윤 교수의 비평이 상당히 일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자기 믿음 형성 이해를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큰 선생은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시키는 것이다. 작은 선생은 외부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다. 소인배는 내부의 오류를 지적할 뿐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세윤 교수의 지적은 타당성이 있지만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오류의 근원을 16세기 이신칭의 교리가 잘못된 것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이신칭의 교리에 오류가 있다고 할지라고 김세윤 교수의 원리에 의하면 현재 교회와 관계성은 거의 약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문제이지 16세기 유럽의 가치가 21세기 한국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 필자는 1세기 구원과 16세기 구원을 동일동질로 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만(진리의 절대성), 김세윤 교수는 준용의 원리(진리의 가변성, 상대성)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구원 이해를 “1세기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이해하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정훈택 교수가 한국 교회가 피동적 구원을 가졌다고 했고, 비록 문장 표현은 있지만 능동적 구원이다. 1세기 구원사건을 믿음은 능동적 구원이고 구원파적 구원론이다. 그러나 구원파적 구원론에서는 구원의 효력이 우주적이고, 그 사실을 믿는 것까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단순하게 1세기 십자가 사건을 자기 구원으로 취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장로교적 신앙(절대예정)으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강하게 주장한다. 이것이 김세윤 교수에게는 더욱 구원파적 구원론으로 이해하게 했을 것이다. 칼빈의 예정 교리는 안전한 구원의 확보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성도가 가져야 할 처절한 믿음의 쟁투를 위한 교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침체기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인구절벽을 예상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인구절벽이면 한국 교회도 인구 절벽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침체기이기 때문에 설상가상, 사면초가로 위급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다음 이동 장소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 교회의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와 신자는 자기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의 위치를 파악해서 서로 교통해야 조력과 협력이 가능하다.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이 유체이탈화법으로 한국교회를 비평하는 것이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라는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 배안에 있는 모든 공동체가 수장(水葬)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라는 배에서 이탈해서 독자생존 할 수 없다. 배의 선장은 배를 책임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배를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피동적으로 구원얻음이 맞다. 피동성을 갖는 신앙문장을 확립해야 한다. 피동적이라고 말하면서 능동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비논리적이어서 틀렸다. 능동적으로 획득한 것을 피동적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판단착오이다. 구원의 피동성을 피동 문장으로 밝히 표현하는 구도는 쉽지 않다. 필자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표현하는 것은 ‘침묵’에 있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사람의 말은 말, 지혜로운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어리석은 미련한 방도에 있다(고전 1:18-25). 그러니 너희는 주의 앞에서 잠잠하라(합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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