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소통과 생태계 소통을 거역한 사대강 사업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사회적 소통은 무시한 물길의 소통

4대강 사업은 약 5년간에 걸쳐 시행된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다. 원래의 대운하 프로젝트가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살리기로 교묘하게 분장시켜 강행시킨 위장 사업이다. 수심을 6m로 필요 이상 높인 것도 4대강 사업이 실제로는 대운하의 연장임을 암시한다. 이런 사실이 대운하와 관련된 이 글이 4대강 문제와 직결되게 만든다. 사업은 완료되었지만 국토에 커다란 생채기를 낸 상흔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아직도 논란의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나라의 전진을 가로막는 건 청산되지 못한 과오 처리 때문이다. 지금의 소란은 그때 소통되지 않은 아픈 결과다. 많은 반대와 우려를 잠재우고 강행했기에 그 오만과 탐욕의 아픈 결실을 거둬들이고 있다.

공사가 한창 진척되던 2010년, 이미 하천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인 독일 프라이부르그(Freiburg) 대학의 라이프 교수가 환경전문잡지 <크리티셰 외콜로기>(Kritische Ökologie) 10월호에 4대강 사업이 하천과 환경에 미치는 문제점을 기고해 사업의 허구성을 경고했지만 정부는 마이동풍(馬耳東風) 격이었다. 국정원까지 개입되고 검은 돈다발이 학자들의 양심을 휘저어놓았다. 이 시점에 굳이 지난 글을 싣는 이유는 양심을 저버린 일부 몰지각한 지도자들의 일그러진 행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지성들을 자성케 하기 위함이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2008년 1월 13일자의 국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대운하와 문명사적 소통>이란 제하에 이명박 정부가 선거 시에 공약한 프로젝트의 국가적 현안을 다룬 바 있다. 그는 창세기의 에덴동산 기사를 통해 소통의 상실을 언급하고 소통은 종교적 차원만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대사임을 로마의 도로망 확장과 중국의 만리장성 건설을 예로 들어 설파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소통을 이루고 인간상호 간의 수평적인 소통을 이루신 유일한 소통자로 언급하기도 했다.

오 목사는 대운하의 본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문명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수려한 문장과 비장한 어투로 독자의 심금을 두드렸다. 그의 시각이 옳음은 소통의 상실에 대한 성경적 배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통자라는 이해의 측면이었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문명사적 접근에 해당할만한 숙고나 고찰이 전혀 없었으며, 수사학적 강조와 낭만적인 호소로 일관했다. 국론 통일을 위해 기여하겠다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그가 예를 든 역사적 사실들은 한 쪽 시각에서 바라본 단견이었음이 유감스럽다. 그가 지니고 있는 대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제호에 걸맞게 좀 더 깊이 있는 통찰과 함께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었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의 칼럼에서 발췌한 인용 부분이다.

 

"소통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 로마는 사람과 자원의 소통을 촉진하는 도로망 건설에 힘을 쏟았다. 반면에 고대 중국은 사람의 왕래를 끊는 거대한 방벽인 만리장성을 쌓아올리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 결과 로마의 도로망은 팍스로마나로 이어진 데 반해 만리장성은 중국에 결코 팍스(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운하의 본질을 제대로 보려면 문명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물길이 통하면 정신이 통하게 마련이다. 대운하가 한국 전체를 관통하면 산간벽지에까지 이어지는 물길의 소통으로 우리 민족의 암적 존재인 지역분열의 종식과 통합을 이루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강에서 낙동강으로, 낙동강에서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창의성과 열정이 어우러져 동양의 예지와 서양의 합리성이 고도로 결합된 현장이 돼야 할 것이다....... 고속도로가 인위적 소통이라면 대운하는 문명사적, 정신사적 소통이 돼야 할 것이다. 대운하가 국력 결집과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소통을 이루는 생명의 물길로 자리 잡기를 소원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질문이 솟구친다. 로마의 도로망은 과연 팍스로마나를 이루었던가? 그 광활한 도로로 말을 달리며 유럽 전체를 피로 물들인 침략의 역사는 어떻게 저울질해야 하나? 로마군단이 지나간 도로 양 옆에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었어도 팍스로마나를 운위할 수 있을까?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운 국책사업은 아니었을까? 로마의 도로망 건설에는 자원의 소통이라는 긍정적 면만이, 중국의 만리장성 축성에는 사람의 통행을 단절시킨 부정적 면만이 있을까? 물길이 통하면 과연 정신이 통할까? 한 사람의 정신세계는 세계의 모든 물길을 합한 것보다 더 깊고 깊은 심연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 하물며 정신의 소통은 한반도를 흐르는 모든 물길을 하나로 통합한다 해도 이룩할 수 없는 지난(至難)의 과제다.

 

한반도의 생채기 사대강 사업, 분열만 키워

한반도를 관통하는 대운하는 민족의 암적 존재인 지역 분열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만 있다면 대운하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도 이 민족은 할 수 있으리라. 국토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할지라도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민족 대통합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뉘라서 감히 거역할 것인가? 과연 대운하 사업이 민족적 통합을 이루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대운하를 열 번 뚫어 한반도를 사통팔달하게 만들어도 민족적 통합이라는 이상이 요원한 일임은 지난 역사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지 않는가?

이집트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비단 나일 강의 젖줄만이 아니라 조상들이 남긴 흔적들과 문화유산임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가 아닌가? 대운하에는 과연 소통의 시대정신이 흐를까? 한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적 흐름이나 시대적 조류라 하는 것은 논란을 잠재우며 강행한 가시적인 업적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삶을 조망할 때 비로소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틀을 갖출 수 있다. 대운하의 관광지를 따라가면서 외국인은 과연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한반도의 땅과 정신적인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유아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대운하의 건설 사업이 과연 동양의 예지와 서양의 합리성이 고도로 결합된 현장이 될까?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이 낳은 통합의 현장이라고 말하기에는 대운하는 너무도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소재에 불과하다. 고속도로와 대운하를 인위적 소통과 정신사적 소통으로 대비시킨 것은 지난 시대와 현 시대의 정치세력과 맞물려 온당치 못하다. 의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운하 공사로 인한 환경파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래의 형질을 뜯어고치는 것은 국토의 성형수술이 아닌가? 자연에 칼질을 하는 것은 창조주의 얼굴을 상하게 하는 행위임을 왜 모르는가! 진정 물 흐르듯 하는 국민적 여론 수렴과 함께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토론이 전개되려면 국민 전체가 참여한 대토론회를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4대강 사업은 재앙의 서곡이었다.

 

역천(逆天)의 역천(逆川), 사대강사업

한반도의 물길을 거꾸로 흐르게 말라! 큰 강은 큰 강대로, 작은 강은 작은 강대로 그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생태적 형상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창조 이후로 하늘은 하늘의 길을 지켰고 땅은 땅의 길을 지켰으며 강과 바다는 물들의 길을 지켜왔다. 인공의 힘을 가해 자연 개발과 생활 편의를 구실로 대자연을 파괴할 때마다 인류는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과학 만능을 부르짖을 만큼 인류는 거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자연의 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땅이 모자라 간척지를 개발할 때마다 농경지로 변한 드넓은 땅에서 낟알을 추수하기도 하고 산업단지의 조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은 남겼지만, 그로 인해 자연은 지독한 몸살을 앓았고 생태계는 비참할 정도로 파괴되어버리곤 했다. 새만금 방조제의 거국적인 공사 역시 관심국가의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 환경론자들에게는 악몽의 현장일 뿐이다. 거대한 간척지로 인해 농지로 활용할 수 있는 땅이 넓어진 이면에는 세계적인 늪지대가 사라진다는 어마어마한 손실이 있다.

이 땅의 작은 물줄기 하나도 경홀히 여길 수 없다. 물줄기마다 연결되어 있는 숱한 생명고리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욕심으로 하늘이 정한 물길을 되돌리려는 것은 역천(逆天)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소통자는 아첨하는 입술을 경계할 일이다. 한반도의 물길을 되돌리려는 대역사보다는 민족의 정신세계를 하나로 묶는 일이 더 시급하다. 동서로 나뉘고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혼을 단일민족의 기상으로 아우르는 대동단결이 선결되어야 한다. 소통의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의 지리멸렬과 분열상부터 해결할 일이다. 대중은 차치하고 소위 지도자라 일컬어지는 엘리트 집단의 물고 찢는 형국을 바로 잡을 일이다. 깨어진 가정을 복원하고 결손 가정들을 복구하는 사회적 회복 운동을 앞서 전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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