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9-18, 28-30

김에스더 목사 - The Second Life Foundation 대표, 뉴욕퀸즈교회 담임, 뉴욕사모합창단 및 미주여성목회자합창단 지휘

요한복음 4:9-18, 28-30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앗수르에 의해 B.C.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인들과 결혼하여 혈통적으로 섞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고대사를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들어가 사람의 시체 가루를 예루살렘 성전에 뿌린 사건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더욱 경멸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하여 유대주의와 반대편에 있는 헬레니즘을 강요당하면서 유대는 유다 마카베우스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사마리아는 헬레니즘을 수용하는 대신에 세금면제 혜택을 요구하면서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성전을 '제우스 헬레니오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후 유대는 저항운동이 성공하여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고, 후에 시몬의 아들 히루카누스가 왕이 되면서 사마리아 정복에 나서서 그리심산에 있던 성전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남아있던 사마리아인들과 이두매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주의를 없애고 유대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유대인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증오가 끓어오르던 참에 헤롯대왕이 죽자 유월절제사를 드리는 시기에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들어와 사람의 시체 가루를 뿌렸던 것입니다.

역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고 서로간에 적대 감정이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사마리아를 경유해서 가면 3일 정도의 길인데, 그 길로 가지 않고 요단 동편쪽으로 돌아서 배 이상으로 먼 길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놓은 자로 줄을 그어놓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럽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와 인연을 끊어버립니다. 그 사람이 있는 쪽으로는 가려고도 하지 않고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사마리아를 선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살고있는 한 여인을 만나셨는데, 그 때가 제 6시 즉 정오 12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낮에는 해가 뜨거워서 물을 길러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정오에 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살았던 것은 그녀의 삶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결혼을 여러 번 하거나 또는 결혼하지 않고 누군가와 동거하고 있으면 주위의 시선이 따가운데 그 당시에 그녀는 벌써 여섯번째 남자와 살고있었습니다.

그녀가 살고있던 동네 사람들도 그녀와 대화하기를 꺼리며 살았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사람도 아닌 유대인이 접근해서 말을 걸 때에 그녀는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것은 더욱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면, 아무리 필요한 것이 있어도 자기가 싫어하거나 꺼리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차라리 굶어죽을지언정 그 사람에게는 부탁하지 않겠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그 마음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눈에 보이는데, 내 속에 있는 죄는 보이지 않아서 즉 정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전도의 방법)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처음보는 사람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괜찮습니다"라며 대화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면 비록 처음보는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귀찮더라도 일단 대화는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한 두마디 더 이야기를 하다보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을 찾게 되고, 그 부분을 복음과 연관시켜서 지혜롭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1) 필요한 것을 먼저 바치기(베풀기)를 원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현재 필요로하는 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무엇을 하러갔는데, 처음보는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쁘거나 다른 이유로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와달라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가 그 방면에 전문가라며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닫았던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대화가 술술 풀려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물을 주는 대신에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실 때에 이 여인처럼 "왜"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하는 것 같지 않고, 나처럼 죄인은 없는 것 같고, 더이상 내 인생에서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이러한 나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요?", "전지전능하시고 부족할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보잘 것없는 저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지요?", "주위에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은데 왜 저에게 부탁하시는지요?"ㅡ등.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사실은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필요한 것이라서 하라는(바쳐보라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해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테스트를 하십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있던 사렙다 과부에게 엘리야가 먼저 자기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위해 '믿음'을 요청하시며, '믿음'을 얻기위해 '간구'하라고 하십니다.

(2)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

사마리아여인이 우물에 왔던 것은 물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그녀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녀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먼저 주님께 달라고 요청하시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영적으로 매우 갈급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목마름"을 알고 계신 주님은 그녀의 갈급함을 채워주시기 위해 '생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생수'는 믿는 자가 받을 성령(요 7:38, 39)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80% 정도가 물이며, 우리가 먹는 야채에도 물이 들어가 있습니다. 물의 섭취량이 적으면 인간의 몸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면에서도 물은 반드시 필요한데 영적인 '물'은 '성령'을 뜻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영적 동물인 인간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없는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악하게 사는 이들을 향해 "인간답게 살라, 먼저 인간이 되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령체험을 했어도 성령님을 구석에 몰아넣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혹은 성령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몸 속에 필요한 주성분인 물이 없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인공호흡기를 끼고 여기저기에 주사바늘을 꽂은 채, 자기의 할 일은 전혀 하지도 못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놓고 아프다고 짜증을 부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인간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수'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지금 그것을 먼저 주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바치지 못하면, 그것을 주님께서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고싶은 만큼 바쳐보십시요. 그런데 공짜로 복을 받고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공짜로 받지만, 복은 행위가 반드시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따라 복과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계산적인 사람 즉 믿음이 없거나 매우 적은 사람은, 지금 갖고있는 것을 바치고 나면 먹고살 일이 염려가 되므로 절대로 바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리로 계산하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얼마나 인색한지, 아니면 후한 마음으로 주님께 바치는지에 따라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3) 숨김없는 죄의 고백을 원하시는 주님

그녀의 갈급함이 무엇인지를 아신 주님께서는 현재 정말로 그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신 뒤에 그녀의 헛점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숨기고 싶은 삶이 있는데, 그것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그녀의 죄를 드러내자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 우리의 숨기고 싶은 죄악을 거짓없이 모두 있는 그대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여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숨김없이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고백할 때에 성령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4) 칭찬하시는 주님

사마리아 여인의 솔직한 죄의 고백을 듣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말이 "옳다", "참되도다"라고 두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죄는 잘못된 것이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옳은 행위라는 것, 즉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녀의 "죄를 고백"하는 행위를 칭찬해주셨던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다른 점을 보면, 인간은 다른 이들의 죄의 고백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하는 죄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긍휼함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기의 힘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죄의 고백을 통해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지 않음으로 인해 계속해서 생각해야 했던 그 죄를 고백함으로 인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죄의 고백을 통해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며,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은, 그러나 우리에게 그 부족한 것을 먼저 주님께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부족한 것을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에 진정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나 조물주를 그리워하며 조물주를 향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께서 직접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성령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속에 숨기고 싶은 죄악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고백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고백하는 행위를 칭찬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에 대하여 사마리아여인처럼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동댕이 치고 동네로 뛰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십니까?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기도)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제 삶 속에 직접 찾아오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저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저는 엉뚱한 것을 달라고 요구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제 삶의 주관자로 모시는 것인데, 그것보다 먹고 사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법을 어기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제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하기 싫기도 했습니다. 또 별 것 아닌 것까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제가 피조물임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함 때문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 크리스천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미운 짓이며, 매순간 죄인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칭찬받을 아름다운 삶인지 깨닫게 해주심을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가 죄를 고백함으로 주께서 그 모든 죄를 잊어버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백하지 않을수록 주께서는 계속해서 그 죄악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이제부터는 매순간마다 정말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까지도 고백하며 살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것이 크리스천의 특권이라는 말이 이제야 정말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사마리아여인을 찾아가셔서 그녀의 목마름을 채워주신 주님께서 제 삶에 찾아오셔서 저의 목마름을 채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남으로 인해 현실에 필요한 물동이를 버리고 주님을 전하러 뛰어간 것처럼 저도 현실에 안주하며 우울한 삶을 살지 말고 기쁨으로 주님을 전하는 일을 먼저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저에게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가운데 주님께는 영광이요 저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하며, 죄인인 저를 위하여 이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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