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 거부”가 헌법재판소를 정치적인 타협책으로 통과했다고 본다. 양심적 병역 거부이니 병역 수행자는 비양심적인가?라는 질문이 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흑백논리, 이데올로기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징병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일제강점기의 문화가 가장 많은 곳이 군대이다. 그리고 6.25 동란, 베트남 참전 등 군은 우리에게 피동적인 죽음의 장소로 인지되어 있다. 그리고 군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는 죽은자가 잘못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군대는 엄격함과 불합리의 대명사가 아니라 명예의 전당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 수준이라면 양심적 비양심적이란 이분법적인 사고가 없어질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에서 군대는 청춘이 억압되는 장소이다. 청춘을 소집하는 국가의 명령은 명예가 아니라 억압으로 인지한다.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주장은 매우 불쾌한 주장이 될 것이다.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형람서원 대표, 한영대, 총신대, 광주바이블칼리지 강사

우리 군대에는 명예를 세우는 많은 충성된 군인들이 있다. 그러나 충성이 아닌 매우 소극적으로 병역을 수행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왜 병영에 들어갔는가? 군대는 엔터테이먼트가 아니라 생명이다. 한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성한”이란 형용사가 아깝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병역 의무를 “신성한 병역 의무”라고 한다. 성경에서 로마의 장교 백부장이 회심하는 일이 있는데, 군인 장교의 회심은 하나님과 황제 섬김의 두 요체 수행이 충분히 가능함을 보여준다.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로마 장교의 회심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의 회심인 사울의 회심과 유사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어려움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수행하는 자에게 합당한 명예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등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러한 부류가 가진 부와 권세는 부러워했다. 그런 사회에서 국가를 희생하는 것은 바보같은 행동일 것이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백이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헌신함에 명예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군대에서 시작하는 명예, 공직의 명예, 의사의 명예, 교사의 명예, 헌신이 요구되는 직분에 종사자들은 명예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명예를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이 명예를 위해서 탐욕을 절제할 수 있고, 공무원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수행하는 명예를 알아야 한다. 명예를 아는 사회에서 ‘양심’을 세울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돈이 우선하는 물질만능사회이기 때문에 양심이 탐욕 혹은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자기가 순수 양심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에서 인준받기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너무나 신속하게 양심적 병역 거부를 수용하려고 한다. 법은 사회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지지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법으로 사회를 선도하려는 자세는 독재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법치국가는 법이 사회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소극적인 자세여야 한다.

법과 명예는 너무나 조화롭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을 무능 혹은 답답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 명예는 없다. 그러한 법을 이용해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제화한다면 그 법을 이용해서 어떠한 수법이 등장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법에 엄위가 서고 법에 근거하여 수행하는 사람은 명예 의식이 있어야 한다. 아직 우리 사회는 정당한 법치가 잘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정권에 따라서 국가의 대계가 바뀌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의 대계를 확립하는 것이 우선한다. 그리고 보수나 진보의 자기 색깔을 나타내 보는 것을 제언한다. 명예롭지 못한 자에게 부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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