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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에 대한 오해와 혼란 』한국에 극심한 홍수와 가뭄 피해가 사라진 것은 4대강개발 때문

어떤 연구원이 아이스크림 판매량의 연중 증감 실태를 조사하였습니다. 한 여름에 아이스크림이 가장 많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물에 빠져 죽는 익사자가 가장 많았습니다. 연구자는 그 두 통계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급증하는 동안, 익사 사망자 수도 함께 증가하였고,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감소하면 익사 사망자 수도 감소하였습니다. 연구자는 매우 당황해 하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익사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은 아이스크림이 그 원인이다.”

통계학에서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하여서 일어나는 오류를 일컫는 말로 “신생아와 황새”또는 “기저귀와 맥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1800년대 네덜란드에서 기이한 현상이 관측됐습니다. 황새의 수가 늘어날수록 출생률이 증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관성이 최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정말로 황새 수가 증가하는 것이 유아 출생을 늘이는 것은 아니지만 황새 수의 증가와 유아 출생의 증가 요인이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인구가 증가하여 유아출생 수가 증가하였고, 도시 인구가 증가하자 음식물 쓰레기가 늘어나자 그것을 먹으려는 황새의 수도 증가한 것입니다. 이 경우 도시 인구 증가와 신생아 출생수의 증가는 인과관계이지만 신생아 출생 수의 증가와 황새의 수 증가는 상관관계입니다. 인과관계에서는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면 결과가 사라지지만 상관관계에서는 한 쪽을 통제해도 다른 쪽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익사자 수가 증가하는 것이 아이스크림 판매량 증가 때문이라고 한 것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잘못 생각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 그러한 연구 결과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별을 아무나 쉽게 간파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가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더더욱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1990년대 미국 월마트 영수증 분석을 통한 기저귀와 맥주 판매의 연관성 발견이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기저귀와 맥주 매출이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됐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트 판매관리부장이 어느 날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저귀와 맥주 간 기묘한 상관관계를 추적하기 위해 기저귀 진열대 위치를 일부러 맥주 진열대 가까운 곳으로 바꿨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음 달 기저귀와 맥주 모두 매출이 전달의 5배로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아를 키우는 가정은 주말에 1주일 치 기저귀 한 팩을 구입합니다. 하지만 종종 기저귀가 예상보다 빨리 소진되고, 그럴 때마다 (한 주의 절반가량이 지난) 수요일 오후 아내는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할 때 기저귀 한 팩만 사 오라”고 부탁합니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퇴근 직후 차를 몰고 마트에 들려 기저귀를 사고 나오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기왕 힘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나 한 팩 사 가자” 기저귀와 맥주 판매가 동반 상승한 요인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다른 마트에서도 기저귀와 맥주 묶음 상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판매자는 판매가 늘어나서 좋고 소비자는 필요한 두 가지를 쉽게 살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대형 마트들은 기저귀와 맥주처럼 동시에 판매가 늘어나는 품목을 찾는데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빨간색, 은색, 파란색, 녹색, 회색 자동차가 흰색 자동차보다 자동차 사고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색상과 자동차 사고율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자동차 구매자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이런 정보는 소비자에게 반드시 알려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4대강 개발에 대해서 참 말이 많습니다. 그 동안 감사원에서 세 번이나 조사를 했었는데 이 번에 네 번째 조사를 하였습니다. 현 정부가 감사원으로 하여금 4대강 개발에 대한 조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감사원은 서울대학교산학협력단에 조사를 의뢰했고, 서울대학교산학협력단이 감사원 의뢰를 받아 2013~2016년 4년치 자료를 토대로 2013년부터 향후 50년간의 비용과 편익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총비용은 31조원, 총 편익은 6조6천억 원으로, 비용 대비 편익비율이 0.21로 나타났습니다. 편익비율이 1% 이상일 경우 사업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4대강 사업의 경제성을 모두 낙제점수로 끌어내리기 위해 애를 많이 쓴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에 투입된 비용은 사업비 24조6,966억 원, 유지관리비 4조286억 원, 재투자비 2조3,274억 원 등 31조526억 원으로 파악됐고, 이에 반해 편익은 수질개선 효과가 2,363억 원, 이수 효과 1조486억 원, 친수 효과 3조 5,247억 원, 수력발전 및 골재판매 효과 1조8155억 원 등 6조6천억 원에 그치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특기 사항은 홍수피해 예방 효과가 0원으로 집계됐다는 점입니다. 서울대학교산학협력단은 4대강 사업 이후 홍수가 야기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린 적이 없어 편익이 다소 과소 추정됐을 가능성은 있다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 수년간의 강우량 기록에 의하며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거짓말입니다. 학자의 양심상 변명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 4대강 사업 이후 홍수가 야기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린 적이 없어 편익이 다소 과소 추정됐을 가능성은 있다.”라고 변명의 퇴로를 열어 둔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4대강 사업 때문인데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사라졌는데 홍수나 가뭄 피해에 대한 편익이 0원이라고 하면서 4대강 개발은 불필요한 사업이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밥을 먹어서 배고 고프지 않는데 왜 배가 고프지 않는데 돈을 들여 밥을 사 먹었느냐고 나무라는 식입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치른 방송국들의 수재의연금 모으기 캠페인과 가뭄피해지역 돕기 운동이 사라졌습니다. 한국에 극심한 홍수와 가뭄 피해가 사라진 것은 4대강 개발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환경학자의 심도 있고 정직한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고향에 들려 낙동강 변에서 70평생을 농사만 지어온 6촌 형에게 물어보았더니 4대강 개발 이후 홍수와 가뭄 피해가 없어 근심 걱정이 사라져서 너무 좋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는 환경문제를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화여대의 박석순 교수는 환경문제를 제대로 공부한 실력있는 학자인데, 그의 조사와 분석에 의하면 지금까지 4대강에 대한 정치권의 이야기는 거의가 왜곡되고 과장된 거짓이라고 하였습니다. 박교수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생각해 볼 때 4대강개발에 대한 정부의 조사나 언론의 보도나 환경운동단체들의 주장이나 전문가라는 학자들의 주장은 마치 아이스크림 판매 증가가 익사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실들에 대한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정부발표나 언론의 보도나 학자들의 이론이나 환경운동단체들의 주장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들이 정치와 관계되고 대중의 관심을 사게 되면 언론이 정치권에 빌붙어 확대 혹은 축소 왜곡하기 때문에 국민은 믿어야 될 것과 믿지 말아야 될 것을 분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자연과학 분야보다 사회과학 분야로 가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복잡하게 변합니다. 이러한 형편에서는 사실과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보다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 모든 데이터와 사실이 악용될 위험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모든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 안정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과학이고, 둘째는 사회과학입니다. 사회과학(社會科學)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탐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입니다. 사화과학이 다루는 분야는 인류학 종교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예술학 윤리 도덕 등이 다 사회학 분야입니다.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經驗科學)입니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입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라고도 합니다. 과거에는 자연현상이 재현가능하다는 특성에 따라, 실험이 가능하고, 정밀한 수리적 방법으로 현상들 사이에 함수관계를 확정할 수 있는 등 방법 면에서도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과학에서도 같은 방법을 채택하려고 하여, 심리학·인류학·지리학 등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자연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건너지는 않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성경을 읽다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것을 보고 자기도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뻔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가서 항의하듯 따졌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그래서 빠진 겁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농담이지만 믿음은 그 청년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지만 자연과학도 믿습니다. 자연과학을 믿지 못하면 불안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연과학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자연과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여러 선물 중에 대단히 귀중한 선물입니다.

아이스크림과 익사자 오류와 황새와 신생아 오류는 한 가지 원인으로부터 비롯되는 두 가지 결과를 서로가 인과관계라고 오해하여 일어나는 오류입니다. 요즘은 정치계나 언론이나 환경문제나 학계나 심지어 종교계에서조차 오류가 많습니다.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뜻에서 이를 가리켜 허위 상관관계라고 합니다. 허위 상관관계를 영어로는 spurious correl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런 용어는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미국인들도 잘 모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온 세계가 spurious correlation에 속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환경 문제가 그렇고 인문학계에도 spurious correlation가 판을 칩니다. 지식인, 젊은이들, NGO 운동하는 이들이 거의 spurious correlation에 속고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영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과학자들도 ‘영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영감’은 ‘믿음’과 관련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예상이 곧 ‘믿음’에 해당됩니다.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수학이 바로 ‘믿음’에서 시작 됩니다. 먼저 증명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 공리가 존재해야 합니다. 공리가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리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렇다’라고 믿고 시작하는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과학적 실험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것을 밝히기 위한 과정입니다.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상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때문에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험이 실패를 해도 계속 실험을 하는 것은 ‘믿음’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새로운 실험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과학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힘입니다.

물론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믿음’은 다릅니다. 과학자의 믿음은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겠다는 ‘믿음’입니다. 종교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다릅니다. 그러나 과학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종교성을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에 대한 이해 가능성’은 증명되고 실험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과 ‘영감’때문에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은 종교에 의존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종교는 과학에 의존하여 경이로운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다.”고 주장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다루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무한이 있고 거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무한’은 과학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리학에서‘무한’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한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세계의 시작과 끝도 무한과 관련되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과학에서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무한의 세계에 대하여 믿는 것처럼 과학도 무한의 세계에 중요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과학이 종교와 대화하려면 정확한 데이터와 그것들이 인과관계인지 상관관계인지에 대한 혼동과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학자들은 사실과 데이터를 개인이나 정치적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고 대중들이 사건과 데이터의 허위 상관관계에 휘둘리지 않도록 일깨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선각의 학자들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부가적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이 무지를 죄로 규정한다는 사실은 소위 빅데이터로 인한 혼란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책임이 더욱 엄중함을 강조한다고 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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