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삭 목사( Azusa Pacific Univ. Calvin Theological Sem.)

   

'풀밭위의 점심식사', 마네가 1863년 당신 관전인 살롱(salon)전에 이 작품을 [목욕]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였으나, 결과는 낙선됨

‘풀밭 위의 점심식사(Dejeuner sur l’herbe’(1863)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작품으로, 크기 208x264.5cm이며, 캔버스 유채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 소장되어 있다. 살롱전(Le Salon)에 출품되었으나 낙선하여 낙선작품(Salon des Refusés) 전시회에 전시되었고, 당시 많은 비난과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이다.  입체감이나 원근감을 색조로 조정해서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식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보다는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고 화면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환영주의(illusionism)적 회화기법을 벗어난 현대 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모더니즘의 특징, 곧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인상주의 (impressionism, 印象主義) 사조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에두아르마네(1832-1883), 인상주의의 아버지, 전통과 혁신의 중개자.

이 그림에 두 명의 여자가 나오는데  한 여자는 뒤에서 목욕을 하는 듯 하고, 한 여자는 옷을 모두 벗은 채 남자들과 점심을 즐기며 소풍을 하는 장면이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기법도 문제지만 주로 여신의 나신을 표현하던 누드를 실제 인물로 그렸다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이 그림의 내용이 당시 부르주아( bourgeoisie )들의 향락과 퇴폐적 속성의 민낯을 들어내는데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게 했던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마네는 그런 사회상을 화폭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 그림의 가장 큰 문제는 남녀 불평등일 것이다.  왜 여자만 옷을 벗고 남자들은 저렇게 정장을 하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을까? 같이 벗고 있든지 아니면 같이 입고 있든지 분명 부적절한 상황임에도 저들의 눈빛은 너무 자연스럽다. 마치 여성의 성을 쇼우 윈도우(show window)에 걸린 상품처럼 즐기고 있는 모습,…. 그러나 사실 이 모습이 그때 뿐 아니라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우리 사회에 정형화된 성차별의 자화상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을까?

최근 OECD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포럼(WEF)이 성별격차지수’(GGI•Gender Gap Index)를, 유엔개발계획(UNDP)이 성불평등지수(GII•Gender Inequality Index)를 발표하는 등 남녀평등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 도처에서 또 대한민국에서 성,취업,임금,인권문제등을 안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인간으로서 또 하나의 장애를 가진(disabled) 것이라고 할 만큼 불합리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본질적인 문제는 여자를 차등하게 보는 남성들의 잘못된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가정, 교육, 또는 문화에서 오랫동안 잠재되고 물들여진 일종의 사상 같은 것이다.  여기서 모든 차별과 불평등이 야기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의 답을 위해 그렇게 수십년 걸처 학술적인 연구와 논문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책의 저술과 논쟁들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신학을 위한 신학,학술을 위한 학술의 논쟁은 아닌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공리(公理 axiom)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아니 인간자체를 차별하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너무 당연한 전제이다.  여자가 인간임이 확실하다면 차별은 불의요 불법이며 이는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한다. 여기에는 다른 개연성의 여지가 있을 수 없으며 이 한가지면 사실 더 달리 할 말이 없다.
창세기 1:27에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하셨다.  남자와 여자를 각각 대등한 명사로 나열하셨지 선후나 차등 개념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 선명하다.  더구나 창세기 2:18의 돕는 배필(neh'-ghed)의 어원”나가드(naw-gad) 역시 숨어 있거나 존재감이 없는 상대가 아니라 정면에 존재하는 대상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돕는 배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떤 면에서 도움을 받는 존재 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월등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가부장적 문화에 적응(accomodation)하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당시 문화가 반영된 성서의 부분, 또는 사도들이 던진 몇 구절의 말씀으로 공리를 왜곡시키려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최근 어느 페미니스트 단체처럼 여성들이 상의를 벗어 던지고 우리 몸은 음란물이 아니라며 성(sex)에서 남성들과 동등함을 주장하거나 상대 성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적대시하면서 모든 면에서 투쟁하겠다고 나서는 생물학주의 급진적 페미니즘(Biologic Radical  Feminism ) 은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성 차별운동이다. 이는 남자도  아이를 낳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남녀 성은 서로 존재해야 할 아름다운 차이(distinction)이다. 따라서 모든 차이는 기능적(functional)인 시야로 보아야 타당하다.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여자가 할 수 있고,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남자가 할 수 있다. 남자에게 더 알맞은 일이 있고 여자에게 더 알맞은 일이 있다. 이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조정해 나갈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참된 인간상(Image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